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498
망각 (3)
‘살려야 해.’
【 멈춰주세요. 】
사랑만큼 바라다보기 힘든 감정은 없다.
그것은 민망하다거나 오글거린다는 이유로, 때론 되돌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치졸한 끝을 맞이하기에.
하지만 그 감정 자체를 거부하냐고 묻는다면 누가 그렇다고 답할까?
【 세영 님. 】
속으로 꽁꽁 감정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인도를 한 번 벗어난 사람이라면, 절실히.
순수한 감정에 휩싸여 행복하게 지내는 하루를 바랄 것이다.
【 당장 마력을 거둬주세요. 일시적으로 시간을 멈추었습니다. 】
땀을 쥔 손이 떨린다.
고개를 돌린 세영의 눈동자에는 희미한 빛 한 점마저 보이지 않았다.
“야.”
날카롭고 동굴같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거 풀어.”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니까.’
【 영창 중인 회복 마법을 먼저 거두는 편이 좋을 겁니다. 】
【 무엇이 세영 님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
세계간의 연결이 약해진 지금. 오늘을 버티면 탈출할 갈피를 잡을 수 있다.
세영을 움직이게 둬서는 안된다. 유일하게 이성을 가진 백양이 판단해 소리쳤다.
【 부디 정신을 차리십시오. 】
백양의 정령안에는 두 세계의 세영이 마치 한 사람처럼 겹쳐져 있었다.
새빨간 선이 이어질 듯 말 듯 움직이며, 세계는 세영이 두 사람을 구하길 종용하고 있다. 이는 탑의 힘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 의지력이 강한 세영을 이렇게까지 몰아넣다니, 대체 무슨 터무니 없는 힘을.
백양이 목소리를 곤두세웠다.
【 지금 느끼는 건 세영 님의 감정이 아닙니다. 정신 마법의 일종이에요. 거기서 빠져나와야만 합니다. 】
‘아니? 내 감정일걸.’
아귀를 쥔 세영이 실소했다.
언짢아 찌푸린 미간 아래의 눈시울이 몹시 붉었다.
‘그거잖아. 내가 바라던 걸 보여주고, 그걸 망쳐서 좆같게 하는 거.’
【 ……. 】
‘근데, 이것도 하나의 현실이라매. 내가 모르는 세상에선, 나랑 얘가 이어질 예정이었네.’
세영은 반쯤 분개한 상태였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할 정도로 이상하게,
‘그리고 그 미래가 곧 파토나기 직전이고.’
‘난 이렇게 이어지길 원했어. 같잖은 운명놀음이 아니라. 제대로.’
【 감정의 민감도를 높여, 그것이 자신의 감정인 양 착각하게 하는 마법이 있습니다. 】
‘내가 그걸 몰라서 말하는 것 같아?’
【 사랑하지 않습니까. 만나러 가야죠. 】
‘사랑하지. 어디서든 사랑하고 싶지. 이 세계에서도 이루어지는 걸 말이야. 응?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내가 여기 가담해도, 어떻게든 돌아갈 방법이….’
유감스럽게도 없다. 백양의 침묵에 세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 아파.’
정신 침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
하지만 그 또한 세영의 의지가 있다면 가뿐히 뚫어낼 수 있어야 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어떤 세계에서든 그와 이어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
백양은 세영의 기억을 훔쳐봐 알고 있었다. 강간 당한 것. 천천히 이시헌을 사랑하게 된 것.
그 대신 죽으려 했고, 그에게 설득당하고, 그가 죽었을 땐 이를 되살리려 했다.
그녀는 이시헌에게 무슨 도움을 받았나.
반할 건덕지가 어디에 있던가?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난, 가문에 대한 것에 대해 이세영은 이시헌에게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했던 거?
성관계와, 약간의 온정이 전부다. 심지어 그것은 정상적인 관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 범죄로 사랑에 입문하는 경우가 역사에 아예 없지는 않고…. 꽤 많죠. 이상한 건 아닙니다. 】
‘…….’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백양이 생각해 봐도 둘의 관계는 꽤나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둘은 너무도 서로를 절대적으로 아낀다. 사랑의 크기가 다른 여인들과 남다르다는 게 아니라, 이유가 애매하다는 거다.
이시헌의 기억으로 추려봤을 때, 진달래에겐 나름의 사랑의 이유가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렇다.
세영만이 애매한 시작을 갖고 있을 뿐이다.
백양이 알기로, 운명은 존재한다. 전생의 인물이 이후에 엮인다거나 하는 등등 말이다.
혹시 그럼.
……누군가 이시헌과 이세영의 운명을 훨씬 더 앞당겼다면?
【 당신과 시헌 님이 이어진,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까? 】
‘당연하지. 누가 그걸 좋아하겠어. 상상이나 해봤지, 진심으로 그걸 바랐겠냐고.’
백양은 천천히 과거를 되새겼다. 그녀가 시간을 돌리듯, 세계를 어루만지며 방향을 추론해나갔다.
운명을 조작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는… 온 역사를 통틀어 셋이 전부.
당장 알려줄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 그럼에도, 과거를 후회하는 것보단.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까가 중요한 게 아닌지. 】
‘애들은, 그 현재를 살아갈 기회도 없는 거지.’
【 원래 이렇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
‘그걸 내가 바꿀 수 있는 거고.’
【 바꿀 수 있다면, 그건 당신의 힘이 아닌 왕의 힘 덕분이고. 그게 당신이 포기할 이유도 되지 않습니다. 】
정신 차리십쇼.
백양의 딱딱한 선고에 세영을 눈을 찌푸렸다.
곧 있으면 멈춘 시간이 다시 돌아간다. 선택의 시간이 있었고, 세영은 그것을 하려고 했다.
“…시헌아.”
다시 시간이 움직인다.
‘세영’의 입이 열렸다. 오열할 것처럼 먹먹한 소리가 울렸고, ‘시헌’의 손은 연신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야.”
약해진 목소리만큼이나 동세도 줄어들었다. 정말 기절한 듯 ‘시헌’의 손은 멎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내에는 오열하는 소리가 가득 찼다.
한 발자국 벗어난 세계에서, 세영은 손을 뻗으려 했다.
【 하지 마십쇼. 】
“놔.”
세영의 움직임을 강제로 막는다. 백양과 그녀는 동등한 계약 관계였기에 서로에게 충분한 간섭을 할 수 있었다.
【 당신의 운명에 대해선, 나중에 천천히 알려드릴 테니. 】
아마도 이시헌의 배후에는 더 어마어마한 존재가 잠식하고 있을 것이다.
‘…야, 놓으라니까.’
이세영의 발버둥에도 백양은 마력을 뿜어대기를 멈추질 않았다.
강제로 꿈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그녀의 행동을 제한했다.
【 지금 말씀 드리고 싶은 건, 두 분은 서로 사랑하고 있고. 그건 방식이 어찌되었든 더럽혀질 여지가 없다는 겁니다. 】
‘…….’
【 그러니 제발, 지금은 가만히 있어 주십쇼. 】
이세영의 정신은 아직 성장이 필요하다.
당시의 이시헌이 그러했듯이.
어쩌면 현재의 왕이 된 이시헌조차 더 많은 정신적인 성장을 필요로 할 수도 있었다.
-뚝.
이세영의 움직임이 멎었다. 손은 힘없이 떨렸고, 고개를 숙인 세영은 이만 꽉 물고 있었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
‘이시헌’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보듯 뻔했다.
그와 거의 비슷한 외모를 한 동일인의 죽음은… 또 다른 트라우마로 남겨질 가능성이 있지만.
【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 제가 협력하겠습니다. 】
잊은 게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겪어야할 무언가를 망각한 채 있었다.
그게 선역이든 악역이든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금은 한발자국 물러나야만 했다.
【 모든 게 정리된 그 날에는, 저보다 더 황홀한 사랑이 기다릴 겁니다. 】
백양의 위로가 쓸쓸히 울려퍼졌다.
*****
【 진정하셨습니까? 】
‘어.’
독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정신이 맹하다.
아무리 씩씩하게 일어서려고 해도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차원 돌파의 후유증이 이렇게나 심할 줄이야.
【 어떤 기분입니까. 】
‘…존나 부끄럽네.’
전혀 효율적이지도 않은 행동을 저질렀다.
하마터면 자기 인생을 말아먹을 뻔한 세영은, 손으로 자신의 열이 오른 이마를 쓸어올렸다.
‘내가, 왜 그랬지? 나랑은 아무 관계 엾는 세계인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탑이 보여준 세계가 아닐까.
【 그만큼, 그를 사랑했다는 뜻이 아닐까요. 】
낭만적인 포장을 곁들인 백양의 말에, 세영은 피식 웃었다.
웃기게도 그 말만으로 조금은 정신이 안정된 듯했다.
-투다다다다!
쾅!
“세영아!!!”
문이 열리며 들어온 금발 트윈테일의 여인이 숨을 헐떡이며 세영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 왔는지 이마에 식은땀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재 왜 저래?’
【 아무래도, 꽤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나 보네요. 】
‘그럼 그럴만하네.’
세영이 잠에 빠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몇 개월을 다른 세계에서 보낸 이세영에겐 더 오랜만에 보는 얼굴.
눈을 뜬 세영을 본 별의 눈망울에 습기가 어렸다.
“우윽, 우으….”
아, 이 새끼 운다.
세영은 두 팔을 뻗었고, 그 품에 별이 안겨들었다.
“으아아앙! 세영아앙! 너 씨발 뒤지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
“욕할 건지 울 건지 하나만 해.”
“어헝헝헝.”
뒤를 보니 ‘사냥꾼’도 있었다. ‘사냥꾼’은 가볍게 눈 인사를 하곤 조심스럽게 가져온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릇에는 떡볶이가 담겨 있다. 과일 바구니를 대신한 걸까? 언제봐도 특이한 취향이다.
-꼬집.
“흐흐흑!”
울던 별이 갑자기 이세영의 가슴을 꾹 잡고, 떡 주무르듯 잡아당겼다.
“내가 알던 세영이가 맞아!”
주물주물, 가슴을 주무르며 눈물을 흘리는 별이.
어이가 없어 손으로 이마를 콩 찧어주자, 녀석이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손으로 가슴을 가린 세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어째 변하는 게 없냐.”
그 세계의 인터넷 방송도 그렇고, 지금도. 찐따같은 면은 변하질 않는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진달래랑 시바도 있었다.
“…….”
세영은 피식대며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의 별의 얼굴을 보니 그래도 웃음이 난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는 별의 인중을 소매로 닦아주며 말했다.
“공략 다시 해야겠네.”
“웅, 준비 다해놔써. 쩌어기 길드장이랑, 기사단한테 인원 차출해놓으라고.”
“잘했어, 인마.”
이제, 다음은 왕을 만나는 것.
다른 세계의 기억이 얼핏 떠올랐지만,
고개를 흔들어 잊어낸 세영이 두 주먹을 쥐고 의지를 불태웠다.
*****
“오라버니~!!”
달콤한 솜사탕같은 귀여움에, 톡톡 튀는 개성까지.
큰 가슴을 출렁거리며 콩콩 점프한 황도가 나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와앙~!”
아무리 빨리 달려들어도 내가 넘어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지.
황도는 폴짝 점프해서 내 가슴에 볼을 맞대었다.
“언능 사러가요 언능! 목심 최신판!”
황도만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남자에게 몹시 취약하다.
도원에는 황도와 말 한마디 섞고 싶어서 난리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원래 그런 게 있다.
백도처럼 완전히 신비하고, 절대 닿지 않을 꽃은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만. 황도는 그렇지 않다.
누가 말을 걸어도 친절하고, 귀엽고, 어린 승냥이처럼 아양도 떨어주니… 가히 도원 최고의 아이돌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무림에 아이돌?’
뭔가 매치가 잘 안 되는 말이다.
실제로 황도는 무희의 일을 겸하고 있으니 비슷한 개념이긴 할 터다.
어깨를 으쓱인 내가 백양에게 물었다.
‘그래도, 좋지?’
돌아오지 않는 대답.
아 그래, 없구나.
도원에 있어서 그런가. 당연히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여기 있는 걸까.
“오라버니? 오라버니!”
“…왜?”
“갑자기 왜 멍을 때리시나 해서요.”
꾹꾹, 가슴을 더욱 밀어붙이며 해맑게 웃는 황도.
나는 고개를 저으며 황도의 목덜미를 잡았다.
“헤헤. 언능 가요~ 오라버니랑 목심 보고 싶어요. 읽어 주시는 거죠?”
“…읽어주기까지 해야해?”
“항상 그랬잖아요!”
항상 그랬다.
그랬었나.
생각해 보면 읽어줄 때마다 은근히 성적 접촉을 하려던 황도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구나.”
그렇게 넘기려 손에 마력을 일으키려던 순간.
-푸스스.
근처 수풀이 흔들리며, 그곳에서 낯선 소녀가 머리에 이파리를 잔뜩 붙인 채 튀어나왔다.
“하아, 하아.”
애탄 숨을 내쉬며 나를 보며 걸어온 소녀. 황도가 깜짝 놀라 물었다.
“…누구세요?”
“…….”
소녀는 말이 없고,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오라버니, 행상인 쪽 아이 같은데…. 도원 사람은 아니에요. 길을 잃지 않았을까요?”
무언가 말을 하는 황도가 내 소매를 붙잡아 당겼다.
나는 끌어올리고 있는 마력을 멈추고 소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머지않아 소녀가 말했다.
“…아저씨.”
온 몸에 오소소 닭살이 솟아오른다.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아마 이 소녀 때문일 거다.
나는 흑단의 말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잠깐, 흑단?
내가 왜 얘 이름을 알고 있지?
“아저씨,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그 순간, 옆에 있던 황도의 눈썹이 잠시 기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