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504
사랑해요
도원의 무인들이 축축한 눈을 들쑤시며 이곳으로 무리를 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나를 잡아서 혼약식을 진행할 생각인가.”
성인식은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동원된 것을 보면, 얼추 어떻게 흘러간 상황인지 예상이 된다.
“황도가 알려줬겠네. 딱히 입막음은 하지 않았으니까.”
천도가 특이한 경우이지, 도원의 무인들이 나 하나 위한답시고 죽을 사람들은 아니다. 황도가 나를 좋아하는 건 완전히 별개였다.
그들은 황도의 말을 듣고 재빨리 병사를 꾸려 나를 납치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이다.
‘며칠만 버텨볼까.’
고개를 내려 천도와 흑단을 확인했다.
흑단은 어떻게 하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천도는 내 손을 쥐고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리고 있었다.
자기 가슴에 내려놓은 천도의 주먹은 새파란 핏줄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차갑고 창백했다.
“천도.”
헤어짐을 자각하고 허망해진 얼굴이 마치 울 것 같아, 나는 위로를 겸해 최대한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내 부름에 천도가 화들짝 놀라 나를 올려다 보았다.
“네. 그, 저희 도망칠까요…?”
“지금은 그래야지. 괜찮아?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내 걱정에 천도는 쓰게 웃었다.
“괜찮아요.”
입술을 비틀며 토한 어색한 거짓말, 이를 증명하 듯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럴 리가 있냐. 손 줘.”
-불쑥!
“앗, 사형. 잠깐….”
나는 천도의 손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내 쪽에서 따스한 온기를 전달할 차례. 악수하고 아귀에 힘을 조금 주면, 천도의 창백한 손에서 싸늘한 기운이 스멀스멀 전도되어왔다.
“어때?”
“음, 따뜻해요 헤헤. 사형의 온기가 잘 전해져와요.”
“답도 참 어색하네.”
“그야, 곧 헤어지잖아요?”
그제야 조금 진정했는지, 희미하게 웃는 천도. 입에서 내뱉는 말에는 처량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울려는 천도를 품에 안고 나는 번쩍 들어올렸다.
숫처녀의 부푼 가슴, 잘록한 허리. 엉덩이를 손에 받치고 입술을 맞추면 그윽한 복숭아 향이 전해진다.
천도는 내가 알던 것보다 굉장히 성숙했다. 마음도, 몸 이곳저곳도.
“어떻게든 성인식 전 날까지 버텨야 하는데. 야외에서 잠들 순 있겠어?”
도원의 무인들이 코앞까지 들이치는 걸 보며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천도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슬며시 흔들었다.
“사실은요. 사형….”
“응?”
“저, 그게.”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천도.
왜 갑자기 천도가 이럴까?
이제와서 죽는 것이 싫어졌다고 보기에는 내 품을 떠나지 않으려 했고, 죄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볼 때 아마 나에게 어떤 거짓말을 한 모양이었다.
무슨 거짓말인지, 설마 이 꿈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속였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윽고 떨어진 천도의 목소리는 비통하기 짝이 없었다.
예컨대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딱히 특정한 날짜와 관계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천도를 죽이고 도원을 나가야 한다는 구조는 맞을 거고, 그게 성인식의 전 날이라는 건 틀렸을 수 있다.
요컨대 천도는 조금이라도 나와 함께 있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
“괜찮아. 솔직히 말해도 천도 널 미워할 일은 없을 거니까.”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문제는 그 거짓말마저, 나에게 있어선 시한부인 그녀의 안타까운 발버둥으로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사랑스럽게 옆에서 쭉 함께.
‘참.’
천도의 낭설을 꿰뚫지 못한 내 무능함이 가장 문제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시간이 많이 끌렸네.”
“……!”
내 말에 천도가 흠칫 놀라 떨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천도야.”
“네에, 네.”
떨리는 목소리로 두 번 대답하는 천도. 내 건조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하루는 어떠냐.”
“…….”
“하루 정도면, 마음의 정리가 되겠어?”
콩닥콩닥, 그녀의 심장박동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천도는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중얼거렸다.
“3일…. 은 안돼요?”
성인식은 일주일이나 남았다.
구태여 천도가 3일을 언급했다는 건, 자신이 한 거짓말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 꿈에서 빠져나가려면 날짜는 관계 없이 그녀를 죽이고 도원을 나가면 된다.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었다.
‘시간 차이가 많이 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내 안색의 변화를 눈치 채더니, 아까보다 더 다급해진 천도가 내 목을 감싸 안았다.
내가 따뜻하게 데운 그녀의 손은 어느새 다시 겨울 추위를 머금어 차가워진지 오래였다.
“그럼 이틀, 이틀만 줘요. 조금만 더 사형이랑 함께 있고 싶어요.”
“천도.”
“…조금이에요, 정말 조금만…. 사형에겐 잠깐인데.”
나에겐 잠깐이고, 천도에겐 평생이 될 시간.
아쉽게도 이 이상의 이야기는 코앞까지 닥쳐온 도원의 무인 때문에 힘들 것 같았다.
“일단은 도망칠까. 흑단!”
“네 아저씨.”
구태여 싸울 필요는 없이 도망가는 것이면 족하다.
-부스럭.
나와 흑단이 떠나기 직전, 수풀이 움직이며 그 사이로 백도가 얼굴을 내밀었다.
“야. 기생오라비.”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흑단과 나를 번갈아 본 백도. 내 품에 안긴 천도를 보더니,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짚는다.
천도가 불안한 얼굴로 백도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백도가 나를 잡으러 왔다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백도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생각 밖의 말이었다.
“……따라와.”
*****
백도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지도에도 기록되지 않은 허름한 집이었다.
-끼익.
나름대로 물도 나오고, 난방도 있는 단칸방.
헤어짐을 앞두고 진정하지 못한 천도를 침대에 앉혀둔 뒤 나는 집을 나와 백도와 밀회를 가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분명 족치려고 올 줄 알았는데.”
“……칫.”
아직도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혀를 내민 백도가 주먹을 쥐었다.
“나도 알건 알아…. 네가 힘을 쓰면 우리가 날뛰어봐야 아무 소용 없다는 거.”
백도는 고개를 돌려 천도가 있는 허름한 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천도가 선택한 거니까.”
그 뜻을 존중해 주겠다는 걸까.
“왜 무인들이 날 쫒아오지?”
“황도 때문에. 걔가 워낙 순진해서, 화법에 금방 넘어가니까. 여기 사람들이 아는 건 금방이었지.”
“의도는 아니었나 보네. 너는 괜찮아?”
“뭘?”
“내가 나가면, 너도 죽을 텐데.”
백도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더니 주먹을 쥐고 나를 바라보았다.
“한 대만 때리면 안 돼?”
“해봐.”
그대로 주먹을 뒤로 빼더니, 허리를 휘감아 회전력을 이용해 한 방.
내 명치에 제대로 꽂힌 스트레이트 훅에, 넘어가는 척 바닥에 넘어졌다.
“…연기하긴.”
일부러 넘어지는 게 들켰나?
백도는 피식 웃더니 무릎을 꿇었다.
“천도…. 잘 위로해줘. 가짜라고 너무 막대하진 말고. 그러면 다시 찾아와서 죽일 거니까.”
“두 번 말하는데, 너는 어쩔거야?”
“나는 이제 저기 들어가서, 적당히 속여두려고.”
도원이 위치한 방향을 턱짓한 백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나한테 사과해줘서 고마워.”
“내가 알던 백도가 아닌데.”
“뭐래.”
“하긴 도원에 있었을 때도, 좆되기 직전에는 네가 가장 믿음직하고 의젓했지.”
“칭찬하지 마. 뒤지고 싶지 않으면.”
칭찬이 낯 간지러운지 고개를 홱 돌리는 백도.
아무튼 황도나 천도의 말대로 용감무쌍에 가장 가까운 군상이었다.
나는 능청스레 녀석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너한테 사과를 했었나?”
“아직 기억에 왜곡되어 있을 때….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잖아? 정신이 없을 때 한 소리니까… 바로 알겠더라고. 너 진심이었어.”
그래서 이런 선택을 한 걸까.
정신 없는 와중 나도 모르게 한 말이 일을 이렇게 만든 것 같다. 물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이다.
백도는 수풀로 다시 걸어가더니, 나를 한 번 돌아보았다.
“황도는 지금도 이쪽 위치를 감추고있어. 네가 한 번 뚫어주니까 좋다고 움직이던데.”
“좋기는, 아쉬운 거겠지.”
“그래. 황도 고 년이 그러더라. 널 보면 참지 못할 것 같다고. 그래서 안온데.”
아쉽긴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아무리 가상이라도 이 세 명은 참 끈끈해 보였다. 천도를 위해서 두 자매가 이렇게 희생을 해주니까.
“그럼 간다.”
“야.”
나는 떠나가는 백도를 불러세웠다.
또 뭘 묻냐며 미간을 찌푸린 백도에게,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너 오늘 좀 예쁘다.”
“됐어!”
얼굴이 살짝 붉어진 백도가 고개를 돌리고 씩씩대며 도망갔다.
그러다 사라지기 직전 멈춰서서는.
“진짜한테도, 그렇게 말해줘.”
그리 말하고 호다닥, 뛰어가 버렸다.
여전히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않은 백도였다.
*****
방에 돌아와 한참을 지켜보았지만, 천도의 상태는 많이 좋지 않았다.
“사형…우리, 같이있는 시간, 3일로, 늘려주면 안돼요? 부탁이에요.”
강단 있게 끊어낸 황도와는 달리, 며칠에 걸쳐 끈적하게 애정을 나눈 탓일까.
헤어짐을 앞둔 천도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흑단아, 방으로 가 있을래?”
“네. 아저씨.”
아무래도 며칠간 밤을 새야할 것 같다.
흑단이 자기 방으로 가고, 나는 침대에 앉아 계속해서 천도를 위로했다.
키스를 해달라면 해주고, 안아달라면 안아주었다.
“흑, 흑….”
이유를 알지는 못했지만, 천도는 내 손과 몸을 계속해서 더듬어댔다.
어떻게든 머릿속에 내 질감을 기억하려고 하는 건지.
그래도 어찌저찌 진정을 하기는 했다.
“…떼 써서 미안해요.”
“괜찮아.”
이곳의 천도는 내가 알던 천도보다 정신이 유약하다.
아니, 정확히 따지면 자기 감정에 솔직하다고 보는 게 맞다.
내 스승님도… 내가 하는 말에 자주 상처를 받고, 기억에 담아두었으니까. 어쩌면 스승님의 속을 본떠 만든 것이, 이 어린 천도일지도 몰랐다.
“천도.”
“네…? 읍!”
그렇게 첫째날.
우리는 거사를 치루었다.
“읏…응!”
내 양물이 그녀를 관통했을 때.
처음에는 굉장히 버거워했다.
“앗, 앗…. 사형, 사형…!”
황도와는 달리 애액도 굉장히 적었고, 경험도 지식도 전무했던 탓이다.
하지만 살을 섞는 그 자체에 전달되는 애정은, 흔히 하는 키스와는 차원이 달랐고.
파과의 고통 직후임에도 천도는 굉장히 달뜬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악… 하아.”
젖가슴을 노출한 천도가 할딱이며 내 몸에 달라붙었다.
“사랑해요.”
뜨겁고 열정적인 한 마디가 내 귓전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알몸의 천도는 몹시 매혹적이었다. 발육만을 따지고 보면 스승님보다 덜했지만.
딱 알맞게 성숙한 풋 성인의 매혹적인 몸.
귀엽게 앙앙대는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츱… 츄읍, 파하… 츄릅.”
둘째 날.
하루종일 관계를 하며, 입을 맞추었다.
능숙해졌다지만 부드러운 수준에 그쳤던 키스가 보다 격정적으로 변했다.
관계가 중첩될수록, 감정은 더 커졌고.
내 혀를 격렬하게 빨던 천도는 어느순간부터 내 품을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흑…으웃, 읍…흐윽.”
또 감정이 터져 나온다.
허리를 팔로 걸며, 나는 천도를 다시금 품에 안았다.
이번에는 어제보다 더 큰 감정의 격동이었다.
“…그냥, 안 가면 안 돼요…? 여기 있어줘요. 평생 살아요 저랑.”
상관 없다고.
날 죽여도 괜찮다고 소리치던 천도가 꺾이기 시작했다.
“내가 더 사랑해요…. 진짜보다 더 잘해줄 자신 있어요. 평생 좋아하는 거 해주고… 화도 한 번 안내고… 맛, 맛있는 것도 만들어 줄거에요. 흑.”
“천도.”
“……죽기 싫단 말이야.”
애처럼 울기 시작한 천도가 눈물을 떨구었다.
갈수록 약해지는 천도의 모습에 나는 무어라 선뜻 위로하지도 못했다.
“내가 더 사랑한다고요. 그 사람보다 더!”
내 속을 긁어대는 흉터로 남기를 원했지만,
내 마음이 아플 말은 되도록 하지 않았던 천도.
“아직, 더 말할 수 있는데….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녀는 휘몰아친 감정을 이겨내지 못했다.
“흑, 으흑, 흐읍….”
눈물을 뚝뚝 흘려대며 내 가슴을 내치는데.
나는 그럴때마다 천도를 안고 달랠 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시간은 참으로 짧았다. 우리는 포옹에 집중했고, 끊김이 없이 열정적인 관계를 나누었다.
항상 울던 천도는 눈두덩이가 눈물에 부어터져도 내 몸을 더듬는 것에 열중했다.
“사형, 있잖아요….”
“응.”
“만약 그 세계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제가 사랑에 빠지도록 해주세요.”
“그러니까, 널?”
“진짜 저를요. 분명, 사형을 좋아할 테니까. 어쩌면 저보다 더….”
“그러냐.”
“네.”
“….”
“사형.”
“응.”
“…잊지 말아줘요.”
셋째날.
천도는 내 손에 죽었다.
“사랑해요.”
단 한 번도 변함이 없었던 그 말을 끝으로.
【 시련은,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