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61
61
재액의 주문
이선과 로테는 사막을 걷고 있었다. 로테의 뜻은 아니었다. 이 여정의 길잡이는 이선이었다.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쉬는 것도 모두 이선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선이 사막으로 가야 한다고 했고, 로테는 불만을 꾹 참고 사막을 건넜다.
이선의 축지縮地로 매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각종 마법으로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가도 가도 모래만 보이는 풍경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몇 시간째 계속되는 사막에 질려갈 즈음 이선이 걸음을 멈췄다.
“여긴 어디입니까?”
“모릅니다.”
“몰라요?”
“저는 천기를 따라 왔을 뿐이니까요. 그래도 무언가 있긴 한 모양이군요.”
이선이 발을 구르자 사방 수백 미터에 있는 모래가 일제히 솟구쳤다. 그리고 지하로 통하는 거대한 문이 드러났다.
“이건 뭔가요?”
“그걸 지금부터 알아야겠죠.”
지하로 들어간 둘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굶어 죽은 몬스터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뼈와 핏자국이 눌어붙어 있었다.
“투기장이군요.”
“투기장…… 직접 보는 건 처음입니다. 그래도 결코 좋은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다는 건 알겠습니다.”
“지하에 지어진 투기장은 다 그렇습니다.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긴 한데. 흠. 전자기기도 전부 망가졌군요. 심지어 연결되어 있지 않던 저장 장치까지. 이런 게 가능한 건 과학뿐인데…… 이게 저희가 김우현을 쫓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천기가 그렇게 말하니 그렇겠지요.”
천기, 천기, 천기.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지만 로테는 불만을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천기를 믿으며 하늘에 보이는 천기를 읽는다. 거기에 술자의 의지는 없다. 술자는 던져진 천기를 보고 전하고, 행동한다. 천기의 부정은 믿음의 부정이고, 그들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할 거라면 술사나 도사와 동행해선 안 된다. 서로의 믿음을 헐뜯는 것은 동행끼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에이네에 의해 전자 자료는 전부 파기되었지만, 아날로그 자료까지 파괴된 건 아니었다. 종이로 된 홍보 책자나 투기장 벽에 붙어 있는 벽보들은 파괴되지 않았고, 참화를 피해 상태가 좋은 것도 있었다.
“위령 기업, 중견 기업이네요. 그런데 아까부터 뭘 그렇게 보는 거예요?”
“살아남은 사람이 있나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성과는 있었습니까?”
이선이 침울하게 고개를 저었다. 로테가 안내 책자의 그림을 두드렸다.
“투기장은 하나가 아닌 거로 보입니다. 다른 장소에 있는 투기장을 찾는다면 누군갈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럼 빨리 움직여야겠네요.”
딸랑. 이선이 팔목에 감고 있던 방울을 풀었다. 듣는 사람이 시원해지는 신기한 방울 소리가 투기장을 감싸며 퍼졌고, 원령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잠시 이어졌다.
“간단하게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이만 가도록 하죠.”
이선과 로테는 투기장을 빠져나왔다. 다른 투기장의 위치는 로테가 대략 알았다. 하나만 운용했다면 모르나 복수의 투기장을 가지고 영상까지 팔아먹었으니 꼬리잡기는 쉬웠다. 몇 분 사이에 투기장의 위치가 몽땅 털려 위원회 어플에 올라올 정도로.
위령 기업의 투기장을 돌며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구하고, 죽어 마땅한 자들을 죽이며 거슬러 올라간 두 사람은 도시 위령까지 도착했다.
한때 위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도시는 위령 기업이 사라지며 무주공산이 됐고, 다른 국가가 깃발을 꽂으며 그 이름을 잃었다.
로테는 전 위령 기업 사원이라던 남자를 잡아 정보를 캤다. 위원회를 이용해도 되는 일이지만, 이건 김우현과 관계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섣불리 아랫사람을 시킬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먹통이 된 전자기기. 그리고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기업을 박살 낸 삼인조.”
그녀는 삼인조보다 전자기기에 주목했다. 기업 하나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 셋이 뭉쳐 다니는 건 흔한 일이지만, 전자기기를 한 번에 먹통으로 만들고 저장 매체까지 파괴할 수 있는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로테는 현이 최후의 안드로이드와 동행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최후의 안드로이드에게 이런 일은 숨 쉬는 것보다 간단하다.
‘드디어!’
시간의 탐정도 잡지 못했던 김우현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녀는 세 사람과 위령 기업이 어떤 관계인지 역추적했고, 어렵사리 리프턴에 닿았다. 그리고 거기서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만났다.
“당신이 여기 있는 걸 보면, 이게 김우현과 관련된 일인가 봅니다?”
리센의 제자, 호르스가 리프턴에 있었다. 그의 진한 눈썹이 호선을 그렸다.
“당신이야말로 이런 촌구석에는 무슨 일입니까?”
공적 업무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는 상사이며 부하인 그였지만, 사적인 영역은 좋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그는 좋게 말해 싸움꾼이었고, 나쁘게 말해 전투에 미친 놈이었다.
“조금만 조사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니 말해드리죠. 여기서 투신의 사도와 김우현 일행이라고 추측되는 사람들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투신의 사도?”
“몇 년 전. 저와 싸우다 도망친 고블린입니다. 뒤쫓아 죽이려 했는데, 설마 먼저 죽어버릴 줄이야.”
호르스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극한의 속도를 가지고, 상대의 속도를 떨어뜨리는 권능 겸 저주까지 사용하는 고블린의 전투 스타일은 근원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주민의 기억을 읽었을 테니 인상도 꽤 정확하게 땄겠군요. 다시 수배서를 뿌리고 난리통을 만들 겁니까?”
“아뇨. 사부님은 의사를 바꾸셨습니다. 북대륙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리센은, 당신 사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그건 비밀입니다. 사실 저도 사부님의 뜻을 전부 알 수는 없거든요. 볼일이 끝나셨으면 발을 치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밟고 계시는 거기. 아직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거든요.”
로테가 뒤로 물러나자 호르스는 땅에 난 여러 흔적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 희열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한참이나 그러던 그가 막 생각났다는 듯 툭 던졌다.
“기억으로 읽은 인상은 몽타주로 만들어 그쪽으로 보내겠습니다. 사부님이 그러라 하시니…….”
싸움의 흔적을 살피는 것에 심취한 호르스를 두고 이선과 로테는 다시 길을 떠났다.
“천기는 어느 쪽입니까?”
“저쪽입니다만… 낮이라 잘 안 보이는군요. 일단 움직이며 밤에 다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마하루피가 숨겨둔 자산은 그의 이름다웠다. 작은 동산처럼 쌓인 금화는, 이걸 그대로 기업에 재투자했으면 위령 기업의 규모가 두 단계는 커지지 않았을까 싶은 양이었다. 현은 금화를 아공간 주머니 하나로 삼켰다.
아까운 점이 있다면 그놈이 돈이 너무 충실했던 나머지 돈 말고 건질 게 없었다. 내심 영약을 기대했던 현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일을 마무리한 기분이 어때?”
합류하기로 했던 장소에서 셋은 무탈하게 합류했다. 현이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에이네에게 물었다.
“엿 같아.”
에이네는 복잡한 자신의 기분을 한 마디로 표현했다. 자기가 말하고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적절한 단어 선택이었다.
현과 이성철은 그런 에이네에게 공감했다. 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복수에도 종류가 있다. 기분 좋은 복수가 있냐 하면 찜찜함만 남는 복수도 있다. 살려달라고 비는 적을 죽이는 건 기분 좋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나아가 죽음보다 더 심한 짓을 하려 했던 상대를 반대로 조롱하는 건데 당연히 상쾌하다.
반대는 악바리 있는 놈들을 죽일 때다. 마지막까지 반항하며 방심할 수 없게 만들고 죽으면서까지 저주를 퍼붓는 것들은 죽이고 나서도 기분이… 엿 같다. 그놈들이 퍼붓는 저주는 말로만 나오는 저주가 아니라 진짜 힘을 가진 저주가 된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죽여야 한다.
상대와 정말 지독한 인연이 아닌 이상 목숨으로 거는 저주를 견디면서까지 화풀이를 하는 상대는 없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들키지 않았을 거란 낙관은 안 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위원회 측에는 늦든 빠르든 들키겠지.”
전 세계에 뿌려진 수배서에 있는 얼굴과 이 얼굴은 다르지만, 이미 프라그하를 만났다. 황야의 팔레트에서 공간이동 스크롤을 사용하기 전에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도 많다. 능력 있는 녀석들이니, 그놈들에게 전부 얼굴을 들켰다고 봐도 좋았다.
사자의 법은 여전히 현의 몸을 덮고 있으며, 에이네의 마력 흡수 능력은 추적 마술과 주술을 흡수해버린다.
현이 이성철에게 물었다.
“추적 대책은 가지고 있나?”
이성철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슬쩍 내보였다. 투명한 자수정 같은 목걸이를 보고 현이 살짝 놀랐다.
“시간의 회랑. 과연 회귀자.”
시간의 회랑, 시간의 신자 중 사도 이상만 만들 수 있는 특수한 아티팩트였다. 시간의 회랑은 효능 중 하나로 주변의 시간을 왜곡해 마법이나 주술로부터 소유자를 보호한다. 물리적인 보호 효과도 있지만, 그 진가는 추격을 피하는 데 있었다.
회랑의 마력이 마법과 주술에 혼선을 주며, 꼬여버린 시간은 추격자들에게 엉뚱한 정보를 제공한다. 경우에 따라선 마력 흡수나 사자의 법보다 더 나을 수도 있는 물건이 시간의 회랑이었다.
“마법과 주술에서 자유롭다 해서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건 알 텐데?”
“확실히, 그래도 날 찾을 수 있는 놈이 있겠지. 머리에 떠오르는 것만도 열 가까이 되니까. 근원 세계 전체를 뒤지면 더 많겠고. 하지만 그게 오히려 좋아.”
“좋다고?”
“내가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줘야 움직이는 놈들도 분명 나올 테니까.”
튜토리얼에 떨어진 뒤부터 지금까지 현의 목적은 변하지 않고 확고했다. 약간의 휴식,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놈들에 대한 복수. 위원회가 들고 일어나 근원 세계 전체를 뒤졌을 건데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현은 놈, 또는 놈들의 꼬리를 잡고 싶었다.
목적을 위해 목숨을 거는 건, 현에겐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이 자리에 시간을 누구보다 알차게 쓸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지.”
그냥 알차게만 쓸까. 항상 과거를 그려왔으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과거로 돌아갔을 때의 일을 준비했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놔두고 머리를 쓰겠다고 나설 정도로 현은 멍청하지 않았다.
“……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내 계획은 먼저 걸리면 도망치는 수동적인 방식이라 평시에는 할 일이 없거든.”
현이 먼저 나서 주의를 끌어도 되긴 된다. 그러나 그건 너무 위험했다. 정말 어지간한 일에는 대응할 자신이 있는 현이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노리고 만들어진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는 근원 세계다. 상상 가능한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세계. 그 상상 속에는 현의 죽음 또한 있었다.
“그러니까 평소에는 네 계획대로 움직이자고.”
적은 가만히 있어도 찾아온다. 눈에 불을 켜고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회귀자를 따라다니며 이익을 보는 게 좋다.
이성철에게서 답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도 운명 때문에 계획이 꼬여 속으로는 난감해하고 있었다. 틈을 봐 현에게 중요한 장소 몇 곳은 들르자고 하려고 하기도 했다. 현의 제안은 이성철에게도 이득이었다.
“이 전력이면, 예정보다 일정을 앞당길 수 있겠군.”
***
“역시 이놈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어두컴컴한데 1주일이고 2주일이고 틀어박혀 있으면 안 지루해? 태양 안 보고 싶어?”
에이네의 말을 무시하고 현과 이성철은 기계적으로 쓸만한 물건들을 채집했다. 채집이 끝나고 이성철이 몇 번째인지 모를 스크롤을 꺼내자, 에이네는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아무리 그래도 6개월 동안 먹고 자고 발굴만 하는 건 너무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