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729
729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황영의 저택.
구조되어 온 황영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대인, 번거롭게 해드려 송구스럽습니다.”
“됐다. 이미 지난 일에 대해 얘기할 필요는 없다. 그자가 복수에 그토록 집착하고 있었을 줄은 자네도 몰랐을 테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환심면구를 쓸 필요도 없다.”
“계획에 차질을 빚어 송구하옵니다. 내려주시는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 목적은 달성했으니 괜찮다. 비록 과정에서 빈틈을 보이긴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사람을 풀어 진양이 죽었다는 소식을 널리 퍼뜨리도록 하라.”
얘기를 하는 사이, 뱀 문양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들고 있던 책에 글자가 사라지고 새로운 글자가 나타났다.
“더 이상 돌아갈 필요 없겠구나. 네 정체가 탄로 났다. 영제 그놈도 참으로 매정한 놈이구나. 훌륭한 충신인 황씨 가문에 천자검까지 들이밀다니.”
* * *
진양의 저택 부근.
장하는 높은 언덕에 선 채 멀리 있는 진양의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이동하던 장하는 수묵화의 여인에게 목씨 가문의 후손이 이도 부근에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래서 곧바로 동쪽 국경지대에서 방향을 틀어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곳에 서서 저택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묵화의 여인 역시 아무런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다.
멀리 보이는 저택은 겉보기엔 잠잠해 보였으나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마음 같아선 들어가서 살펴보고 싶었으나 그럴 능력은 되지 않았다.
“포기하거라. 이곳을 만든 강자는 어쩌면 나보다 더 강한 실력자일지도 모른다. 설령 모든 것을 감수하고 들어간다고 해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게다. 어차피 밖에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있는 게 없어. 그렇다고 네가 들어가도 마찬가지일 게다.”
수묵화의 여인은 장하 곁에서 그녀를 말렸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직접 보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 같아서요. 혹시 모르잖아요. 누군가 놓친 빈틈이라도 있을지.”
“포기하라니깐. 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쳤다. 정천사 녀석들조차 추적에 실패했는데 여기서 뭘 더 어쩌겠다는 게냐? 정천사 놈들의 추적 능력은 심지어 나보다도 더 높은 수준이야.”
수묵화의 여인은 장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으면 된 거 아니냐? 어째서 굳이 만나려고 하는 것이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쩌면 자신의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분까지 버리고 이곳까지 온 것이지. 그런데, 여기서 네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느냐? 설령 그를 만난다고 해도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겠느냐?”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장하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반나절 뒤.
그제서야 고개를 들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 평생 남에게 이용만 당하고 쓸모없어지면 버려지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제게 기회를 준 사람은 오직 그 사람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저를 함부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 발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주었고 저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모든 생각에서 자유로워졌으나 오직 단 한 가지, 그가 살아있는지는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요.”
“알겠다…….”
수묵화의 여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장하를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이 아파 왔다.
그녀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른다.
심지어 그녀가 과거에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를 구해준 사람을 만나는 것.
그건 이미 장하의 마음속에 강한 집념이 되어있었다.
그때, 수묵화의 여인이 손을 뻗었다.
한 줄기의 빛이 쏘아지며 반대편 산자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정체불명의 누군가 있었다.
그는 빛이 닿기 전에 한발 먼저 움직이며 피했다.
이어서 반딧불이 같은 은은한 빛이 방원 백여 장을 뒤덮었다.
나무, 새, 벌레, 낙엽.
모든 것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어서 그들의 색채가 모두 사라지며 방원 백여 장 내의 범위는 전부 흑백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그 대신 그곳의 풍경이 그대로 그려진 수묵화가 그 자리에서 펄럭였다.
수묵화의 여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다시 한번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공중에 둥둥 떠 있던 수묵화가 사라져버렸다.
수묵화가 사라지자 숲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초유, 나일세.”
다소 쉰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면구를 쓴 한 남자가 수묵화의 여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묵화 여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순간.
그녀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그녀는 주먹으로 남자의 가슴을 강타했다.
“컥!”
남자는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여인의 주먹을 맞아주었다.
그러나 여인의 주먹이 그의 면구로 향하는 순간 재빨리 손을 들어 막았다.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까지도 그놈의 면구에 집착을 하고 있는 겐가!”
남자가 방어 태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날 죽이겠다면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하겠네. 허나 여기서 나의 면구를 벗긴다면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죽게 될 걸세. 난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그렇다고 도의를 져버릴 순 없는 법.”
이어서 남자의 시선이 장하에게 향했다.
“소녀의 숙원을 이뤄주기 위해 이곳까지 왔으니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자네가 끝까지 이루려는 일이 있듯 나에게도 끝까지 이루려는 일이 있다는 걸 말이야.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법이 어디 있나?”
“흥! 말이 많군!”
수묵화의 여인은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무서운 기세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장하는 곁에서 멍한 얼굴로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줄 몰라 하면서 말이다.
면구를 쓴 남자는 쓰러진 채 얼굴을 감싸며 수묵화 여인의 주먹을 모두 받아냈다.
한 차례 구타가 끝난 뒤.
남자는 허리를 문지르며 다시 일어났다.
“일단 여긴 대화를 나누기에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은데. 자리를 옮겨서 계속하는 게 어떻겠나?’
수묵화 여인은 아무 말 없이 차갑게 면구를 쓴 남자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장하가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꺼냈다.
“대인, 여기까지 데려다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게다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분인 것 같은데 잠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누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껄껄, 젊은 사람이 뭘 좀 아는구만…….”
면구를 쓴 남자가 흡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묵화 여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그렇게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다.
* * *
같은 시각.
묵양은 마당에 선 채 조용히 소동이 벌어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그러나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이상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곳의 분위기를 살피러 오는 자들에게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번 상대에게 눈길을 준 것은 그들이 범상치 않은 고수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애초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 * *
자리를 떠난 세 사람은 무려 천 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한 산봉우리에서 멈춰 섰다.
이들은 곧장 산 중턱으로 향했고, 남자는 앞장서서 그곳에 있는 석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내가 이도 부근에 마련해둔 거처일세. 매우 안전한 곳이지.”
남자는 그제서야 천천히 면구를 벗었다.
평범한 중년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는 흉터로 이루어진 복잡한 부문이 새겨져 있었다.
부문에서는 기괴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고도 뒤돌아서면 곧바로 잊게 만들어버렸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수묵화 여인의 눈빛은 복잡해졌다.
심지어 그녀조차도 상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의 얼굴을 보았음에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얼굴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상대가 자신의 동의도 없이 기억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얼굴을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그러나 얼굴에 닿기 전.
힘을 풀며 가볍게 상대의 뺨을 만졌다.
“해기정!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분노로 가득 찬 고함은 곧이어 개탄의 탄식으로 변했다.
그녀는 장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이만 가서 쉬거라. 난 이 친구와 잠시 나눌 얘기가 있다.”
장하가 자리를 떠난 뒤.
해기정이라고 불린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초유, 말했다시피 우린 각자의 목적이 있다네. 자네는 목씨 가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여 한 폭의 작품이 되었고, 나 역시 비록 복잡한 상황에 얽히긴 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세. 결국은 이럴 수밖에 없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겐가? 이런 금지된 술법까지는 쓰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건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야. 문파 내에 나와 다른 이념을 가진 자가 나타났다네. 그는 자신의 이념을 위하여 배반을 했다네. 공법을 사용하여 영혼만 빠져나와 대황에 소식을 전하려는 그 순간, 그가 정보를 흘렸다네. 그 바람에 나의 육신이 발각되게 되었지. 그래서 난 어쩔 수 없이 금지된 술법을 펼치며 나의 얼굴을 지우고 과거를 끊어내는 수밖에 없었어.
그 이후로 이 세상에 해기정이라는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네. 그저 이름 없는 한 사람만이 남았을 뿐.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당시 내가 대영 신조에 있지 않았다는 점. 나의 육신을 발견한 자는 욕심은 가득했으나 위험을 떠안을 용기는 없었다네. 그래서 나를 유령 경매로 보내버렸어. 그가 날 구해준 덕분에 영혼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었고 목숨은 건지게 되었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동문에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어쨌든 목숨은 건졌으니 이만하면 다행인 걸세. 나는 문파 내의 무언자(無言者)일세. 내가 짊어지고 있는 건 단지 나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야. 이것은 나의 의지이자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일세.”
해기정의 말에서는 유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가 느껴졌다.
초유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으나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한참 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당시엔 좋은 길을 다 포기하고 갑작스럽게 무언자가 된 자네를 이해할 수 없었네. 허나 목씨 가문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스스로 한 폭의 그림이 되어버렸을 때. 그제서야 깨달았다네. 그리고 자네가 날 용서하지 않기를 바랐지. 그랬다면 나 역시도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을 텐데…….”
해기정은 조용히 초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때는 젊고 유명하고 재능 넘치던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수묵화로 변해버렸다.
그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초유는 눈을 감은 채 그의 가슴에 기댔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