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811
811화 그게 가능할 리가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때.
왼쪽 세 번째 의자에 앉아있던 용양군이 맞은편의 빈자리를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 그녀와 실제로 쌍수(雙修, 성관계를 통해 수련을 하는 것) 도려(道侶, 수련 상대)인 사이는 아니지만, 한때의 기연으로 명목상으론 쌍수 도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제가 나서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무엇보다 사나이로서 나서야 할 때는 나서야 하는 법이니까요.”
용양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청전군을 노려보았다.
그리곤 피식- 하며 비웃었다.
“진작부터 문주께 진양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씀드리려고 했었습니다만, 어떤 미련한 것이 하찮은 이익 때문에 일을 전부 망쳐버리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었지요.”
용양군은 혀를 끌끌 차며 자리를 떠났다.
모든 이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용양군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진양을 끌어들였다면 필히 엄청난 이득을 보았을 것이다.
진양이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뿌린 영석의 양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회의가 끝난 뒤.
검은 통치마를 입은 여인이 청전군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당분간은 자중하도록 하거라. 만약 또다시 일을 그르친다면……. 그때는 결코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 * *
같은 시각.
진양은 저택에 머물며 소문이 널리 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찾아왔습니다. 배첩을 전해주면 알 거라고 하더군요.”
한 인형이 배첩을 진양에게 건네주었다.
배첩에 적힌 이름을 확인한 진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데리고 들어와.”
잠시 뒤.
인형을 따라 자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곧게 펴진 허리, 오똑한 코, 맑게 빛나는 눈, 짙은 눈썹까지.
그야말로 미남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용양군이라고 합니다. 진 선생님을 뵙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진양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별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용양군이 가볍게 팔을 휘두르자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가 나타났다.
비록 봉인이 된 상자이긴 하나, 봉인으로는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기운을 막을 수 없었다.
특히 그중에는 강력한 생기가 흘러나오는 상자가 있었다.
아마도 최상급 영약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진 선생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미안하지만 아무 대가 없이 선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만 가져가시지요.”
진양은 정중히 그의 선물을 거절했다.
배첩을 들고 왔다는 건 합환문을 대표하여 왔다는 뜻.
게다가 상자 안에는 전부 요상과 관련된 물건들이 들어있다.
진양은 상대가 무슨 의도로 왔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합환문, 그리고 그들과 연관된 자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진 선생,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어떠한 변명이나 핑계를 대러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저 어떻게 해야 진 선생과 대제희 전하의 노여움을 풀 수 있을지 듣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사람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저한테 오실 게 아니라 대제희 전하께 가셔야죠. 대제께 이번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대제희 전하입니다.”
용양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 선생, 핑계를 대려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이번 일은 결코 합환문 전체가 나서서 벌인 일이 아닙니다. 합환문에는 각자 개개인의 행동과 활동에 제약을 두거나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변명이나 핑계를 위해 찾아온 건 아닙니다. 단지 어떻게 해야 진 선생과 대제의 전하의 노여움을 풀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이번 사건을 최대한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을지 여쭙기 위해 온 것입니다.
진 선생께서 열쇠를 쥐고 계신다는 건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부담 없이 말씀해 주시지요.”
“장사를 조금 한다고 들었습니다.”
진양이 뜬금없이 물었다.
용양군은 어리둥절하긴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보잘것없는 규모이긴 하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이 장사 하듯 협상이나 이익 문제로 해결될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용양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순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양은 유령호의 선장이다.
유령호는 동해와 남해에서 크게 장사를 하고 있고, 또 경매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장사다.
큰 규모로 장사를 하는 사람인 만큼 당연하게 그를 장사꾼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걸 깨달았다.
진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제가 소문을 퍼뜨린 목적은 합환문과 그 일당을 전부 쓸어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고자 한 게 아니라 당신들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정도면 알아듣고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보아하니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지금 말씀드리도록 하죠.
제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전조 세력과 연루된 모든 이들의 목숨입니다. 살아있는 자는 직접 얼굴을 봐야겠고, 죽은 자는 시체를 봐야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딱 여기까지.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었을지 모르겠군요.”
한참의 침묵이 이어지고.
용양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경솔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돌아가는 즉시 문주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멀리는 안 나갑니다.”
진양은 포권을 취한 뒤 쌓여있는 선물을 가리켰다.
“잊지 말고 챙겨가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절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어차피 저를 찾아온다고 해서 해결될 건 없을 테니까요. 차라리 인맥을 이용해 신조의 귀족들과 만나보는 편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용양군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물론 마음 같아선 신조의 귀족들을 만나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가 선뜻 이런 일에 도움을 준단 말인가?
괜히 도움을 줬다가 영제에게 밉보이기라도 한다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그나마 지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대제희가 유일하다.
다른 사람들은 찍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갈 상황이 아니란 건 용양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돌아서기로 결정했다.
그가 돌아서는 순간.
진양이 그를 다시 불러세우면 선물을 가리켰다.
“가지고 돌아가십시오.”
“실례 많았습니다. 그럼 후일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용양군은 멋쩍은 듯 선물을 챙겼고, 인형의 안내를 받아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용양군을 보내고 난 뒤.
진양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용양군이 찾아왔다는 건 단순한 방문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어째서 진양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걸까?
어째서 진양이 도와줄 거라고 믿는 걸까?
아무리 녀석들이 자유분방한 단체라고 해도 그렇지.
이런 사건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설령 그것이 개인의 단독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평소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득달같이 달려들면서 정작 손해를 볼 때가 되니 나몰라라 하며 개인의 책임으로 치부하다니.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진양은 금세 이 일에 대해 잊게 되었다.
순방 행사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영제는 이번 순방에 직접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영제를 대신하여 순방에 나설 사람도 정해졌다고 한다.
예상대로 조왕과 주왕 중 그 누구도 먼저 자발적으로 순방에 나서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서로를 칭찬하며 서로를 추천했다.
어떻게든 상대가 이도를 떠나도록 만들 작정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영제는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았다.
영제는 현 정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인 대제희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선택했다.
진양은 마음 같아선 이도로 직접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싶었다.
지난 일쯤이야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었다.
그러나 가희는 아니었다.
편지를 보내는 것마저도 청란이 아닌 내시를 대신 보냈던 것이었다.
듣자 하니 청란은 현재 순천사와 함께 활동을 하고 있는 듯했다.
크게 이상할 건 없다.
애초에 지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건 진양 한 사람뿐이었으니 말이다.
진양은 묵양과 함께 저택을 빠져나와 곧장 동해로 향했다.
장정의는 생각 이상으로 돼지와 잘 어울렸다.
평소 할 일이 없으면 서로 말도 안 되는 허풍을 떨기도 하고, 몰래 진양을 욕하기도 했다.
그러다 장정의는 돼지로부터 어떤 은밀한 정보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 길로 곧장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러다 어느 버려진 유적 안에서 아직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유적을 찾아냈다.
진양은 현재 장정의로부터 소식을 받고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돼지도 함께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차라리 솥에 빠져 돼지 곰탕이 될지언정 그곳은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게 아닌가?
결국 녀석은 집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진양이 탄 비주는 수많은 산을 넘어 어느덧 동해가 있는 동쪽 국경지대에 들어섰다.
순방에 나선 가희의 첫 방문지는 동쪽 국경지대다.
이제 막 시작된 순방에 문제가 생길 일은 크게 없으니, 진양은 이 틈에 재빨리 동해에 다녀오기로 했다.
현경사의 이인자가 남겨둔 보물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현경사는 현 대영 신조의 정천사와 같이 대제의 신임을 받는 단체다.
그만큼 은밀하고 중요한 임무도 많이 도맡아서 했을 것이다.
하나를 알면 열이 보이는 법.
이런 단체의 이인자가 숨겨둔 고대화라니.
아직 아무도 찾지 못했다면 시도해 볼 만했다.
어디에 쓰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손에 넣고 보는 게 우선이다.
직접 쓰기에 부담될 정도로 귀한 물건이어도 상관은 없다.
언젠가 쓸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해안에 처박아두면 그만이니 말이다.
어느덧 공기 중에 바다에서 풍겨오는 특유의 짠 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탁 트인 바다를 볼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휴가를 즐기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진양은 곧바로 돼지가 적어준 자료와 자신이 일전에 찾아둔 자료를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동해로 온 현경사의 이인자가 자리를 잡은 곳은 대영의 동도(東都)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동도는 동해의 한 섬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 이름이다.
비록 사도(四都) 중 한 곳이긴 하지만, 사실상 그건 이름에 불과하다.
그동안 영제가 직접 동도와 서도를 찾은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나마 그것도 순방 행사 때문에 온 것이 전부고, 며칠 머무르지도 않고 곧바로 다음 목적지로 떠나버렸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수도 매우 적었다.
그만큼 정천사의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현경사의 이인자는 상당히 대담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수련 경지를 폐지하고 동도에서 가까운 섬에 숨어드는 행위는 그야말로 큰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시간이 흐르고 가문을 세운 뒤에도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모험에 성공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그건 바로 그녀가 여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현경사의 이인자라고 불릴 만큼 높은 자리에 올랐던 여인이 스스로 범인 여자를 자초하고, 또 아무 힘 없는 범인 농부와 혼인을 한 것이다.
이 점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독한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