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29
29. 코모도 (Comodo, 편하게)
예선 결과를 확인한 다음 날.
“…그런데, 우리 1학년 피아노 전공에서도 무려 3명이나 본선 진출자가 나왔어요. 그것도 공동 1등으로 말이죠. 모두 박수!”
오래간만에 피아노 전공생들을 모두 불러모은 선생님이 중간고사와 실기고사 일정에 대해서 변경사항을 말씀하시던 중 그런 말을 해주셨다.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
다시 말하지만 1학년에게 본래 이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무대 경험을 늘리기 위한 하나의 체험 학습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보통은 미향예고 2, 3학년 중에서만 딱 열두 명 뽑히는 본선에 오르는 것이 정상.
그런데, 그 와중에 선배들을 모두 제치고 다른 성인 연주자들까지 이겨버린 비정상의 학생이 셋이나 나와버렸으니···.
이렇게 계속해서 박수를 받을만한 일이긴 했다.
막상 그걸 내가 받고 있으니 좀 어색하고 쑥스러웠지만 말이다.
“그래서 본선 진출자 중에서 미향예고 학생이 8명이나 되는 바람에 7년 만에 학교도 콩쿠르도 조금씩 일정을 조정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여러분에게는 미안하지만, 실기 고사가 좀 앞당겨지게 된 거죠. 다들 이해했나요?”
열두 명의 본선 진출자 중 과반수가 미향예고 학생이라니.
전생에 내가 이 학교에 다니던 동안에 한 번도 없었던 사건이다.
안 그래도 주최자가 미향예고인데 거기서 과반수가 본교 학생이라니, 없던 의심도 돋아날 상황이었다.
허나, 이게 가능했다는 건 정말 누가 들어도 본교의 학생들이 더 수준이 높았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다다음주에 있을 예정이었던 중간고사가 바로 다음주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진행될 겁니다.”
“예?!”
태연한 어조로 폭탄 발언을 하는 모습에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이쪽으로 이목이 쏠렸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뭔가 기이한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왜 중간고사 일정을 전공 선생님이 말해주시지?
설마,
“그리고 5월 초에 예정되어 있던 실기 고사가 중간고사 일정이었던 다다음주로 당겨질 겁니다.”
“네에?”
“예?”
“그게 말이 돼요?”
이번에는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곡소리.
내 설마가 딱 들어맞아 버렸다.
이렇게 굵직굵직한 일정이 두 개나 조정되었다는 건, 아마 예선에서 3인 공동 1등이라는 유례없는 사건을 일으킨 김민호와 최지은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작지 않다는 거겠지.
당장 지금도 예선 결과 하나만으로 벌써 우리를 메인으로 다루는 수많은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중이기도 하고.
“이건 선생님도 놀랐는데 이번 서울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는 국내 대다수 언론사는 물론 외신들까지 주목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젠 학생들과 친해져 말투가 오락가락하시는 선생님.
허나, 훨씬 편해진 어조와 비교해 말의 내용물은 더없이 묵직한 것이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아주 제대로 밀어줄 작정이시랍니다.”
언론, 교장 선생님에다 외신이라니. 대체 고등학생에게 왜 이렇게 관심이 쏠리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를 수준이었다.
“당사자인 세 학생은 무슨 말인지 잘 알겠죠?”
그렇게 말하며 씽긋 웃는 기택 선생님.
이 훤칠하고 잘생긴 훈남의 미소가 이처럼 무서웠던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네. 물론이죠.”
그렇게 내가 얼어있던 와중 먼저 당차게 대답하는 김민호.
그는 이 정도의 관심쯤 익숙하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 하하.”
아무리 내가 김민호를 닮고 싶어 해도 저건 못 따라 하겠다.
나는 결국 기택 선생님이 수업을 끝낼 때까지 계속 헛웃음만 흘려댈 뿐이었다.
***
“성현! 오늘은 내가 왔어요!”
당일 오후 전공시간이 끝나고 내가 연습실 뒷정리를 하고 있자 휭 하고 나타난 엘리나가 나를 불렀다.
“어, 왔어? 잠깐만 나 이것만 정리하고.”
내가 서둘러 피아노 주변을 닦으며 걸레를 정리하는데 나를 마중 온 그녀를 보며 한승우가 방정을 떨었다.
“뭐야! 쟤 바이올린 수석 엘리나 아냐? 둘이 맨날 붙어 다닌다는 소문이 진짜였어?!”
그 말에 대꾸하는 것도 귀찮아 봉투를 정리하는데 반대쪽에 있던 예린이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성현이랑 엘리나 같이 공부한다고 했었어.”
“공부? 사귀는 게 아니라?”
“성현이가 넌 줄 아니?”
성현이 정신없이 쏘다니는 동안 예린과 승우는 좀 친해졌는지 이런 식으로 핀잔을 넣기도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성현아! 진짜 공부하는 거면 나도 좀 끼워주면 안 돼?”
게다가 거리낌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그런 부탁을 해오는 한승우.
나는 작게 한숨을 픽 내쉰 뒤 말했다.
“갑자기 왜. 너 성적 신경 안 쓴다면서.”
“그건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50점 도 안 나왔다간 집에서 잔소리할 테니까 말이야.”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부러 더 바보 같은 언행을 보이는 한승우.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긴장을 풀고 허물없는 태도를 보이도록 유도하는 것이 이 녀석의 특기였다.
실제 그 소심한 예린이가 한승우에게만큼은 툭툭 쏘는 말투를 사용하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음··· 엘리나가 허락해주면.”
“성현! 나는 좋아요!”
꽤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내 말이 들렸는지 바로 허락해주는 엘리나.
“진짜? 그럼 나 기숙사에 있는 교과서 좀 가지고 올게!”
교과서가 왜 학교가 아니라 기숙사에 있는···. 아니, 그건 내가 상관할 건 아니고.
잽싸게 튀어나가려는 한승우에게 쓰레기봉투를 쥐여주는 나.
녀석은 훅 나가버렸고 나도 가방을 메고는 엘리나에게 다가갔다.
“가자.”
“네!”
그렇게 오늘의 마무리 당번인 예린이에게 연습실 키를 주고 가려는데, 그녀는 갑자기 버려진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저어, 서, 성현아. 그 공부하는 거. 있잖아. 같이 해도 되는 거였어?”
“응. 엘리나만 허락한다면.”
“그럼! 그럼 나도 같이해도 될까? 나 모르는 것도 많고 물어보고 싶은 것도 진짜 많아서···.”
“음, 괜찮아?”
나는 어차피 엘리나가 활짝 웃으며 긍정할 거라 예상했기에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음···.”
그런데 한승우 때와 달리 잠시 입을 꾹 다물고 고민하는 엘리나.
그 의외의 모습에 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엘리나는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대답했다.
“좋아요.”
평소처럼 쾌활한 어조는 아니었지만, 긍정을 표하는 그녀. 왠지 방금 내 눈치를 본 것 같은데 아닌가?
“다, 다행이다.”
무슨 면접이라도 통과한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예린.
음, 아마 그녀도 성적을 높여야 할 이유가 있는 듯했다.
아무리 미향예고에서 성적을 신경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아도, 10일 뒤였던 중간고사를 3일 뒤로 바꾸는 건 솔직히 좀 심했지.
그것 때문에 이예린도 나처럼 불안했을 것이다.
“그럼 도와줄 테니까 쓰레기 한 번에 버리고 얼른 교실로 가자.”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나눠 들고 서둘러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
지은은 드물게 연습실도 기숙사도 아닌, 미향예고 본관 중앙에 있는 작은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던 중이었다.
그녀는 사실 예선의 순번이 가장 마지막쯤이었기에 화장실을 핑계로 로비에 나가서 작게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성현의 연주를 들었었다.
평소 성현의 연주는 진한 다크 초콜릿을 듬뿍 올린 케이크처럼 짙고, 무거운 감정이 주를 이뤘었다.
같은 나이의 지은으로서는 따라 할 수도 하물며 이해할 수도 없을 만큼의 깊이.
다만 확실한 것은, 성현이 연주에 담는 감정은 대부분 어두운 계열의 것들이란 것이다.
이해할 수 없음에도 감정은 확실히 알 수 있게 피아노를 친다.
피아노로 노래를 한다기보다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그런 연주가 성현의 장점이자 단점인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 예선에서 그가 들려준 피아노는 달랐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 곡의 이름을 모르고 들었다 해도 ‘봄’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만큼 성현의 연주는 화려하고 또, 화사했다.
다양한 반짝임이 뒤엉켜 더 밝은 빛을 내는 그런 연주가 다름 아닌 성현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연주에 감정을 담는다는 건, 정말이지 많은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현실은 드라마나 영화처럼 낭만적이지 않기 때문에 연주자의 기분이 변했다고 해서 연주의 분위기까지 휙휙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은과 함께 연습한 지 고작 2주 안 되는 시간 만에 성현은 그걸 해냈다.
화사한 봄임에도 어딘가 슬픈 어조가 감돌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을 아주 완벽한 광택으로, 자신의 기쁨으로 물들인 것이다.
“대체···.”
결과는 공동 1등이었지만, 냉정하게 자신을 돌이켜본 지은은 확신했다.
지은의 봄은 성현의 연주보다 아름답지 못했다.
지은에게 ‘질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건 김민호를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헌데, 그녀는 어릴 적만큼 분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말 그대로 피가 날 정도로 매일 연습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자신의 단점을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찾고,
그걸 또 라이벌인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으며 상담을 요청하기도 하고,
항상 먼저 말을 걸어주고,
함께 연습하자며 권해주는 것이 성현이었기에···.
그녀는 왜인지 성현의 실력이 더 향상됐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그래서일까.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어쭙잖은 농담을 하며 알사탕을 건네 성현의 긴장을 풀어줬던 일도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잘해주는 라이벌 관계는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지은은 마음을 터놓고 이것저것을 성현에게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용기를 내어 성현에게 같이 연습할 것을 권해봤는데···.
“어, 미안! 다음 주에 중간고사 끝나면 하자.”
성현은 지은의 권유를 단박에 차버리고 엘리나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버렸다.
그가 엘리나와 빈 교실에서 교과목을 공부한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교과목 공부가 피아노 연습마저 제쳐놓고 공부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인 건가?
지금껏 평생을 음악 특기생으로 살아온 최지은에게 성현의 그러한 태도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설마···.”
그러다 보니, 그녀의 발상은 영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시험공부에서 연주에 대한 힌트를···.”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지은은 전신에 소름이 쫙 돋,
“에이, 말도 안 되지.”
으려다 말고 벤치에서 땠던 다시 궁둥이를 붙였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무슨 시험공부에서 연주를, 다시 생각해도 바보 같네. 하. 참.”
***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아나고, 순식간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나도 할래.”
그 원인이라 한다면 단연, 내 앞에 교과서를 무더기로 들고 나타난 최지은 때문이었다.
“뭐?”
나와 엘리나, 한승우 그리고 이예린이 일제히 갑자기 나타난 최지은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도 공부··· 한다고···.”
그런 시선을 받자 순식간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된 최지은은 그렇게 말한 뒤, 그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음에도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나와 이예린 사이에 냅다 앉아버렸다.
뭐지,
나는 갑자기 등장한 최지은의 행동에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수업도 똑바로 안 들으면서 학년 등수에서 30위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 실기가 아니라 필기를 말이다.
그만큼 머리가 비상한 그녀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공부하겠다며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혹시 얘도 종합 성적 1위를 노리는 건가! 왜?’
그 순간, 최지은에 향한 내 경계심이 수직으로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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