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of living again RAW novel - Chapter 97
97. 리솔루토 (Risoluto, 결연하게)
피아노 치는 파가니니의 독주회.
좀 부끄럽지만, 다시 말해 나의 독주회에 대한 정보는 내가 쓰러져있던 어제부터 매스컴을 타고 사람들 사이로 흘러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라면 내게 먼저 연락을 취하려 했으나, 지은이와 예린이를 통해 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모리스는 어쩔 수 없이 기자들과의 약속 시각에 독주회를 발표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런 모리스 슈만에게 연락을 취해온 것이다.
“…그 사람이 그 유키에 모리씨 라는 거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유키에 모리.
전생과 현생 모두 나와 엮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전생에는 짧게나마 나를 반주자로 크게 성장시킨 사람이었으며, 현생에서는 한 사람의 연주자로 인정해주고 함께 협주를 진행하자 약속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런 게다.”
모리스는 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유키에씨는 모리스 슈만에게 연락을 취해서 부탁했다고 한다.
“독주회가 아니라 협주회로 저만 노선을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는 건가요?”
“그래. 결론만 말하자면 그렇게 되는 게지.”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와의 협주회.
이름값을 드높이기에도 하나의 경력으로 인정받기에도 이보다 좋은 기회는 흔치 않다.
유키에 모리의 인지도와 실력은 굳이 비교하자면 정석 선배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니까.
다만 궁금한 것이 있다.
“어르신은 그걸 받아들이신 거고요?”
왜 모리스는 평소처럼 으름장을 놓고 쫓아내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자신의 주관을 우선시하는 그 괴짜 어르신이 말이다.
그 때문에 이를 부드럽게 돌려서 묻자 모리스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받아들인 게 아니라. 거절하지 못한 게다.”
“거절을 못 해요?”
“그래. 일단 무대의 주인인 네가 의식불명이라는 것도 있었고,”
의식불명이라니···.
누가 들으면 병원에 실려 간 줄 알겠다.
“두 번째 이유는 유키에 그 코흘리개가 하도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너랑 협주를 꼭 해야겠다고 사정사정해대서 일단은 보류하기로 한 게다.”
“유키에씨가요?”
그 강단 있고 카리스마도 있는 분이 사정사정을 했다니 믿기질 않았다.
“그래 이놈아! 넌 대체 예전에 뭔 일을 하고 다녔길래 그래도 나름 음악을 안다는 그 꼬마가 이렇게까지 하는 게냐.”
신기하다는 듯 내게 질문하는 모리스.
글쎄, 하지만 나도 솔직히 그 유키에씨가 나와의 협주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저의를 모르겠다.
그렇게 내가 대답 없이 가만히 있으니 답답했는지 모리스가 먼저 말을 이었다.
“우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고 내도 네게 줄 게 있으니 와보거라.”
“하남이요?”
“에잉! 다 늦은 밤에 만날 셈이냐? 당연히 이번 공연이 진행될 아트홀이지.”
“이번 연주회는 어디서 진행되는데요?”
“듣고 놀라지나 말거라.”
후후, 하며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는 모리스.
아마 나를 놀라게 하려고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 봤자, 지난 생에 오케스트라에 있던 경력 덕분에 그다지 놀랍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어떻게 놀라는 척을 하면 모리스가 만족하려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바로, 충무 아트홀 대극장이다.”
“예에에에?!”
나는 진심으로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충무 아트홀은 그 규모가 1천 석을 넘기는 초대형 무대였다.
이전에 금천문화재단의 김 이사장이 오케스트라를 무려 세 곳이나 불러모은 ‘금천 아트홀’과 동급의 무대라는 말이다.
그때는 연주자의 숫자만 해도 100명을 넘기는 규모였기에 그러려니 했었는데,
“거기서 독주회를 진행하라고요?”
그 넓은 무대에 혼자 올라선다니···.
아니, 애초에 내 무대에 그렇게 많은 관객이 모일 수나 있는 걸까.
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한가지 납득이 가는 것이 있었다.
왠지 모리스라는 이름값에 비교해 너무 결선 무대가 좀 조촐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리스는 그때부터 이미 이 ‘충무 아트홀’ 대관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어르신 정말, 적재적소의 무대를 고를 줄 모르시네······.’
대체 천 명이 넘는 객석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
정작 통화에서 중요하게 언급된 유키에 모리는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내 머릿속에는 그런 고민만 남았다.
***
그날 저녁,
나와 지은이는 먼저 만나 함께 충무 아트홀로 향했다.
“몸은?”
“이제 다 나았어.”
지은이는 그렇게 화가 나진 않았는지.
입술을 평소보다 삐죽 내민 것 말고는 변함없이 나를 대해주었다.
“어제는 고마워.”
“다음부터는 쓰러지기 전에 전화해. 놀라게 하지 말고”
내가 쓰러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안 쓰러지지 않았을까.
아니, 여기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간 지은이가 정말 삐질 것 같으니 나는 순수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 말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어깨가 맞닿는 2인석에 앉아 버스를 타는 우리.
어제 내가 쳤던 짓궂은 장난 때문에 버스에서 1시간 동안 입도 뻥긋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지은이는 내가 하는 말에 곧잘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면 지은이 넌 어제 모리스의 전화를 받았던 거야?”
“응. 우리가 충무 아트홀에서 공연하는 거랑 오늘 일정, 그리고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는 말은 들었어.”
아마 지은이가 말하는 그 골치 아픈 일이 유키에 모리를 말하는 거겠지.
근데 그것보다, 나는 솔직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무대가 충무 아트홀 대극장이라는 걸 알고도 이렇게 담담하다니.
내가 아는 지은이 맞나?
“저기 지은아.”
“응?”
“우리 무대가 너무 크다는 생각 안 들어?”
내가 놀란 얼굴로 묻자 지은이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했다.
“결선 때랑 비슷하잖아.”
“결선?”
이번 모리스 슈만 콩쿠르의 결선 무대는 대략 320석.
지은이에게는 천 석과 320석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걸까.
역시 한번 날아오르더니 담도 커지고 훨씬 대담해진 것 같았다.
“왜, 왜 그렇게 봐?”
내가 감탄한 표정으로 지은이를 뚫어지라 보고 있으니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대단해서.”
“뭐가?”
“아, 생각해보니 너는 오케 경연 때 천석 규모의 무대에서 혼자 연주를 해본 적이 있었지?”
오케 경연 때 내가 트리오를 이룬 것과 별개로 지은이와 민호는 혼자 오케스트라 무대 앞의 작은 간이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었다.
나는 거대한 압박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벌써 긴장되는데, 역시 두 사람은 대단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는데 지은이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무, 무슨 소리야? 객석이 천 석이라니. 당연히 중극장 블랙에서 연주하는 거 아니었어?”
나를 응시하며 제정신이냐는 듯 인상을 찌푸린 지은이.
“어제 모리스 선생님이 직접 그러시던데? 대극장이라고.”
“대, 대극장?!”
지은이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자 버스의 이목이 한순간에 이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뒤늦게 이를 인지하고 지은이는 새빨개진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장난치는 거 아니고?”
“응. 진짜로.”
그제야 오전의 나처럼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는 지은이.
크게 성장한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보다.
아니, 생각해보면 큰 성장을 했다고 해서 독주회에 천명 규모의 객석은 도저히 익숙해지려야, 익숙해질 수 없는 크기이긴 했다.
그 정도로 대극장에서 독주회를 한다는 건 큰일이었던 것이다.
“서, 선생님이··· 혹시···. 치매?”
옆에서 들려온 아주 작은 실언은 못들은 걸로 하기로 했다.
***
“파가니니!”
그런데 아트홀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리자마자 그런 외침이 들려왔다.
“진짜잖아!”
“파가니니다!”
나와 지은이가 있은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란 얼굴을 하는 사람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내가 모리스 슈만 콩쿠르 우승자라는 것이 그다지 실감 나지 않았었는데,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일반 대중이 아니라 이쪽 업계의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에 오자 확 티가 났다.
“오오!”
“무슨 일이래? 파가니니가 여길 오고”
“사인 좀 해줘요!”
큼직큼직한 덩치의 어른들이 버스정류장에서 아트홀로 향하는 사이에 주변을 둘러싼 것이다.
“와···. 와우.”
“인기 많네.”
연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만 반복하며 열심히 걸어가던 도중, 지은이는 살짝 토라진 투로 내게 말했는데, 어쩐지 좀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솔직히 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계속 앞길을 막아대는 터라···.
아마 내가 그녀보다 더 인지도를 쌓게 된 계기는 모리스가 방송에서 내 사진과 이름을 그대로 보여줘 버렸기 때문이겠지.
아트홀은 거대했다.
단순히 입구에서부터 대극장으로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10분은 족히 걸릴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우리 둘은 팬을 자칭하는 분들에게 시달리다 보니 대략 두 배인 20분이 넘어서야 대극장 바로 옆에 있는 휴게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온 게냐?”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그렇게 담백한 질문을 건네주시는 모리스 슈만.
하지만 표정이 싱글벙글한 걸 보면 나와 지은이가 몇 걸음 걷다가 멈추기를 보고 있던 눈치였다.
“하핫, 지각이라니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그렇지?”
“잘 지내셨어요?”
“뭘 나흘 만에 봐놓고는 그런 말투인 게냐. 앉거라.”
우리는 모리스의 휠체어를 마주 보듯 앉았다. 이미 그 기다란 의자에 앉아있던 이재상.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평소처럼 소름끼치는 눈초리로 나를 보며 웃는 대신 고개를 휙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럼, 이번 독주회의 정확한 날짜와 프로그램 북을 적어 제출하거라. 당연히 미리 준비해왔겠지?”
나와 지은이가 착석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독주회 이야기를 진행하는 모리스.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의자에 앉아있던 셋은 거의 동시에 메모지 따위를 꺼냈다.
그가 미리 공지해준 독주회의 정보는 간단했다.
연주시간은 2시간 반. 두 번의 인터미션을 거쳐 약 세 시간 동안 진행되는 것이다.
적절한 시간에 맞출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곡을 어떻게 배치해도 좋다고 모리스는 게시글에 적어두었다.
따라서 내가 전생에서부터 꿈꾸던 그 독주회의 프로그램 북을 그대로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정말,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내가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흥미롭다는 듯한 모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차례로 이재상, 지은이 그리고 내 메모지를 검토하던 모리스는 정확히 마지막이던 내 프로그램 북을 보며 그렇게 반응한 것이다.
“성현아. 이 프로그램 북이 정말 네가 직접 생각한 결과물이라는 게냐?”
“네.”
아마 유키에 모리 때문에 뭐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게 전생에서부터 지금의 생을 살아가며 완성한 내 꿈의 프로그램 북이었다.
그리고 모리스 슈만은 그것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며 흥미진진하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더니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재미있구나. 꼭, 두 사람이 만든 프로그램 북 같아서 더 재미있어.”
“…!”
모리스의 말에 나는 정말 놀랐다.
방금 보여준 프로그램 북은 정말로 전생의 내가 정해둔 목록을 현재의 내가 바꾼 것이었으니 두 사람이 만들었다는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 그래. 너희들의 의견은 잘 알겠다. 하지만, 성현아. 알고 있겠지?”
“네···.”
그는 그 프로그램 북에 충분히 흥미를 보였으나 안타깝다는 듯 내게 말했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의아한 표정의 이재상과 지은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한숨의 원인이 되는 존재가 이곳에 나타났다.
드르륵,
문을 열고 한걸음에 회의실에 가까운 휴게실로 들어온 큰 체구의 여성.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녀가 바로 유키에 모리였다.
다시 보는 건 대략 석 달만이던가.
유키에 모리는 휴게실을 쭉 훑어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눈빛만으로도 아주 반갑다는 의중을 추측할 수 있을 만큼 환하게 웃더니 곧바로 모리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리스 슈만.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억지란 억지는 이미 다 부려놓고 이제 와서 이쁘게 말해봤자 아무것도 안 나온다 요놈아! 얼른 성현이하고 직접 얘기해서 얼른 담판을 짓던가 해!”
통화하면서 무슨 말다툼이라도 벌인 것인지 모리스는 유키에 모리에게 대놓고 불편함을 팍팍 드러냈다.
그리고 그 반응에 유키에는 쓴웃음을 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향해 몸를 돌리고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성현 학생 아니, 이제는 피아니스트 이성현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요?”
나름의 유머를 겸비해 나를 치켜세워주는 깔끔한 말투가 특히 돋보였다.
그녀는 이 시기, 연주자로서보다는 젊은 교수로서 더 왕성한 활동을 하던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한을 하게 된 계기도 자신이 가르치던 대학생 바이올리니스트들의 프로 콩쿠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어렵지 않게 추측해낼 수 있었다.
그래도 반년 넘게 일본에서 매일 본 사이니 당연했다.
“안녕하세요.”
이젠 반주자로 키워보고 싶은 학생도 아니고, 자신 전용의 반주 로봇으로 날 바라보지 않는 유키에에게 나는 최대한 신사적인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받았다.
세계적으로도 적잖은 인지도가 있는 그녀가 나를 인정해준 만큼, 그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성현, 모리스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아무래도 다른 일정이 있는지 급하게 일정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유키에.
그녀와 한 무대에 서서 협주회를 연다면 그건 물론 좋은 경력이 되리라.
현재 내가 목표로 하는 백건오 한국 종합 콩쿠르에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이며, 나 자신이 훗날 해외에 나갔을 때도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내가 그녀와의 협주를 거부하는 것자체가 손해인 것이다.
오히려 유키에가 왜 내게 이렇게까지 협주를 제안하려고 하는지. 그 지점을 궁금해하는 것이 응당 이치에 맞는 행동이겠지.
나는 결심한 듯 입을 때고 함께 ‘협주를 해주겠느냐’고 질문한 유키에 모리를 향해 말했다.
“싫습니다.”
예전에 미향예고에서 유키에를 만났을 때랑 어쩐지 말과 상황이 겹쳐 보이지만, 우연은 아니었다.
유키에 모리라는 사람은 원래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고, 예전에도 같은 이유로 서둘러 나를 찾아왔다가 거절을 당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에, 에에?”
유키에 모리는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소를 짓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만 있었으나, 설마 거절이 나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랴.
난 처음에 모리스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내 독주회를 갑자기 협주회로 바꿀 맘은 없었는걸.
“저는 독주회를 하고 싶어요.”
나는 갑자기 나타난 유키에를 향해 당당한 태도로 그리 말했고, 그녀의 눈동자는 더더욱 짙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