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99
약먹는 천재마법사 199화
조력(3)
집으로 돌아온 레녹은 곧바로 가방에 있던 연초들을 연구실 책상 위에 싹 쏟아버렸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단 핸드폰에 남겨진 메시지를 모조리 확인했다.
수십통이 넘는 메시지는 모조리 아리스 리첼렌이 보낸 것이었다.
[아리스 : 레녹. 일단 이번 주 안으로는 꼭 연구실에 나와서 논문에 대해 한번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학회 쪽에서 논문에 대해 문의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저 혼자서는 사실상 감당이 불가능할 지경이에요.] [아리스 : 개인적으로는 논문에 추가적으로 주석을 달고 참고문헌을 좀 세세하게 다듬을 생각인데, 이 작업에 협력할 생각이 있는지도 궁금하군요.] [아리스 : 그리고 이번 논문의 저자를 저로 바꾸겠다는 헛소리는 못들은 걸로 하겠어요. 제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어도 정도가 있지, 이건 도대체 무슨 심보예요?] [아리스 : ……말이 좀 심했네요. 그렇다고 책을 잡을 생각은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그동안 레녹의 연구에 대해서 많이 신경을 써주지 못한 것 같은데 이런 성과를 내다니, 정말 대단하고 또 미안해요.] [아리스 :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어요. 개인적으로는 나와서 얼굴이라도 좀 봤으면 해요.]일정한 시간을 두고 보내진 메시지는 거기서 딱 끊겨 있었다.
“…….”
아리스의 잘못이 아닌데 왜 거기서 그녀가 미안함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레녹의 양지 생활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빚을 느껴야 하는 건 레녹이었다.
그가 철저하게 이득을 따지고 드는 것과는 별개로, 염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이번 일로 인해서 그녀가 하려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뜻하지 않은 주목은 달갑지 않지만, 아직까지는 에반의 신원이 보호받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아리스의 연구실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명의로 제출된 논문이 통과된 이유는 아마 그녀의 이름값에 의한 특권이었을 터.
일단 연구실에 가서 아리스에게 자세한 정황을 듣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대처방안을 세울 필요는 있어 보였다.
레녹은 일단 거기까지 확인한 뒤 휴대폰을 뒤로 밀어놓았다.
아리스의 일은 내일 생각하자. 일단 오늘 저녁에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밖에서는 카르텔과의 갈등으로 바쁘고, 또 논문이 생각보다 너무 주목을 받으면서 신경이 이리저리 분산되기는 했지만
레녹은 그만큼 자치령에서 얻은 성과를 정리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마법적 성취와 다양한 아티팩트들을 제외하더라도, 마약왕의 시체에서 직접 뽑아온 연금술의 정수에 대한 분석 역시 게을리할 수 없었으니.
마약왕은 연금술이라는 술식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 술식을 써먹는 방향성에서 틀리지는 않았다.
연금술이란 기본적으로 다양한 물질을 조합해서 새로운 물건을 연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거기에 엄연히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음에도 연금술이 작동하는 원리는 레녹이 알고 있는 WORLD 1.0과 같았다.
그건 다시 말해서 이 세계의 기본적인 화학법칙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물질이나 약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녹이 과수원에서 가져온 수백종의 약들은 바로 이것을 위한 준비.
연금술의 정수를 이용해서 약재를 혼합, 연성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확인이 끝났다.
이제는 연초에 든 약재성분을 분석, 분해 후 연금술을 조합해서 그 결과를 모조리 기록하고, 레녹의 몸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커스텀한다.
이것이야말로 레녹이 자치령에서 가져온 가장 큰 성과.
“……약에 대한 의존을 벗어날 수 없다면, 약을 직접 만들어서 벗어날 수밖에.”
[툭하면 마법도 만들어서 쓰는 마스터다운 발상이네요.]바로 옆에서 꼬리를 말고 있던 다비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저를 만들어낼 때도 이런 식이었나요?]“비슷하지. 널 통해서 보조마법의 연산에서 사실상 벗어난 것처럼, 이번 연구도 중독이나 의존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니까.”
“과수원의 재수 없는 노인을 뛰어넘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거다.”
야심 찬 포부를 내뱉은 레녹이 나이프를 집어 들고 첫 번째 연초의 겉면을 잘랐다.
연초 안쪽에서 잘게 빻아진 이파리들이 쏟아져나오며 순식간에 연구실을 뒤덮었다.
“쿨럭, 쿨럭!!”
밤새 연구실에서 기침 소리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 * *
“정말 아니라고요?”
“아니라니까요?”
레녹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프리실라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다시 물을게요.”
그녀의 냉엄한 목소리와 함께, 다른 학부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레녹을 향해 집중되었다.
“이번 학술지에서 게시된 논문. 전격계열 마력의 응용을 통한 전자기회로 간섭 가능성. 학회를 뒤집어놓은 이 논문을 에반 조교수님이 쓰신 게 아니라는 말이죠.”
“이미 아리스 교수님에게 언질을 들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레녹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아니라 교수님과 선배 연구원 분께서 함께해 낸 일입니다.”
“…….”
“물론 저도 그 연구실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는 하지만, 제가 직접 논문에 손을 댄 부분은 주석과 참고문헌에 대한 정리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레녹은 꽁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는 프리실라를 보며, 품 안에서 슬쩍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 녀석을 보고 학부생들이 의심을 푸셨으면 좋겠군요. 저는 이 녀석과 함께 정령술식을 연구하는 일만으로도 바쁩니다.”
“오오!!”
“제, 제 머리 위에도 한 번만 올라와 주세요!”
“박수! 박수! 박수!”
다비가 레녹의 품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함께 삽시간에 강의실의 공기가 달아오른다.
학부생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면서 그 열렬한 호응을 만끽하는 다비의 모습.
프리실라를 앞세워 레녹에게 질의를 던지려던 학생들은 다 어디 가고, 전뇌정령에게 뇌까지 해킹당한 듯한 이들만이 가득하다.
레녹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는 사이, 프리실라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녀 역시 다비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다른 학부생들이 열광하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좀 덜한 감이 있었다.
라바테논 대학의 학부생이라고 하더라도 정령을 직접 볼 기회가 많지는 않았을 텐데 상대적으로 이색적인 경험을 많이 해보기라도 한 걸까.
“다들 저렇게 말은 안 해도 알고 있을걸요.”
“무슨 말씀이신지.”
“상식적으로 아리스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이만한 성과가 갑자기 튀어나올 리가 없잖아요. 다비로 얼버무릴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논문의 내용을 읽어보면 논문의 주제가 어디에서 모티브를 얻었는지도 뻔히 보이고요. 특히 다비를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
“그렇게까지 숨길 일은 아니지 않나요?”
프리실라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할 뿐.
결국 에반이라는 연구원이 아리스의 연구실에서 주도적으로 성과를 냈다, 이 정도의 정보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기 학부생들 정도라면 알아서 마법에 관한 논문을 찾아 읽는 것은 기본이고, 재능과 더불어 의욕과 나름의 안목까지도 겸비한 엘리트들이다.
물론 그 재능을 따지자면 아리스의 발끝조차 따라올 수 없겠지만, 적어도 학술지에 실린 논문을 이해하지 못할 수준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 논문에 기여한 것이 지금 여기서 시치미를 떼고 있는 레녹일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도.
“글쎄요.”
뭐, 그렇든 말든 일단 아리스와 기본적으로 합의한 방침은 모른 척이다.
간단하게 안면을 익히고 친분을 다진 학부생들이 입을 꾹 다물어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답변을 거부하고 아리스에게 공을 돌리는 일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라바테논 대학과 연관되어 있는 학회에서 이름을 인정받는 게 아니라, 아리스가 그를 계속 연구실에 데리고 있을 법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니.
열심히 오리발을 내미는 사이 아리스가 강의실로 들어오고 강의가 시작되었다.
늘 그렇듯이 그녀의 금발은 화사하게 빛났고, 피로가 가득한 표정과는 달리 강의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지금까지 배운 이론적인 속성마력의 응용법을 직접 실습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학번 순서대로 나와서 먼저 맨몸으로 시연하고, 장치를 통한 보조로 올바른 방향성을 익히는 것을 기본으로 하죠. 한 명씩 앞으로 나오세요.”
레녹이 맨 뒤에서 딴청을 피우는 사이, 강의 사이에 잠깐 틈이 생겼다.
아리스는 종종 이렇게 강의 시간에 이론을 때려 박는 대신 학부생들에게 직접 마력을 운용할 시간을 주는 것을 선호했다.
몸으로 체감하지 않는 교육은 질이 떨어진다고 했던가. 그녀다운 신조다.
레녹으로서도 다른 학부생들이 어떻게 마력을 다루는지 지켜보기 편한 만큼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런 베이스도 없이 순전히 재능만으로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레녹과는 달리, 라바테논 대학의 학부생들은 거의 전원이 체계적인 마력교육을 받고 입교한 이들이다.
이름난 명가의 자손이나, 마탑에서 촉망받던 학생, 혹은 이미 누군가를 스승으로 두고 충분한 역량을 기른 이들도 수두룩하다.
시정부 직속 대학을 설립하면서 출신과 소속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교육의 기회를 주장한 결과였다.
마탑이나 가문의 입장에서도 학부생들의 소속은 자신들이 쥔 채로, 남는 시간에 시정부의 돈으로 다양한 추가 교육을 시킬 수 있다면 나쁘지는 않다는 입장이었다.
아리스를 비롯한 실력 있는 교수진들의 영향도 적지 않아, 적어도 이 학교 내부에서는 사이가 좋지 않은 후원자들끼리의 직접적인 다툼은 없다.
철저하게 양지의 사업이자, 프로젝트임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그렇게 잘 정돈된 마력의 운용방식이나, 혹은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사소한 버릇에서 역으로 레녹이 배울만한 점도 가끔 있었기 때문에 레녹은 이런 시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예를 들자면, 방금 앞으로 나서서 아리스가 말한 대로 속성마력을 전환시키는 단발머리 여학생.
빙결계열 고유마법을 다루는 마탑 소속으로, 딱 보기에서 빙결과 수속성에 해당하는 마력에는 능숙하지만, 그 이외에는 다소 서투른 모습을 보인다.
마력을 다루는 솜씨 자체는 레녹의 기준으로 간신히 3류에 턱걸이를 하는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빙결계열 마력을 다루는 방식 자체는 볼만한 점이 있다.
예를 들자면, 마력을 순간적으로 동결시킬 때 영역을 확실하게 정해두고, 가장자리부터 단번에 얼려낸다는 점.
그리고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마력의 입자를 일정한 형태로 패턴화시켜서 물체를 얼릴 때 흡착이 빨리 되도록 사전에 준비를 해두고 있다.
이러한 과정들은 아마 저 학생 본인의 재능이나 역량에 의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저 학생이 속한 마탑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고 교육을 통해 학습되는 일이겠지.
‘생각보다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다는 말이지……’
그간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조교수 일에 소홀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쉽게 그만둘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학부생들의 마력을 다루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른 마탑들이 가진 노하우를 쥐도 새도 모르게 빼먹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레녹이 고유마법을 연구하는 방식에 빠른 진전을 보이는 것 역시 여기에 큰 비중이 있었다.
“수업이 지루하지는 않은가요?”
생각에 잠긴 사이 아리스가 슬쩍 레녹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그녀 정도의 외모라면 주위의 시선을 끌지 않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인데, 다른 학부생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기미는 일체 없다.
레녹은 그것이 아리스가 고의적으로 마법을 사용해서 기척을 끊어냈다는 것을 직감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늘 그렇지만 항상 흥미진진합니다. 마력을 각성한 뒤로는 학생들에게도 배울만한 부분이 적지 않거든요.”
“하긴…… 에반의 직관이라면 저 아이들에게서 거꾸로 요령을 배울 수도 있겠어요.”
레녹의 본명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에반으로 바꿔 부르는 것은 그녀의 치밀함이리라.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레녹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레녹은 그제야 이번 실습이, 두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든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반이 정령마법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간과했어요. 공식적으로 학회를 비롯한 학술지에서 에반의 이름과 신분이 새어나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말이 새어나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겠죠.”
레녹이 어깨를 으쓱였다.
“알고 있습니다. 방금 당돌한 학생 하나가 저를 걱정해 줬거든요. 아마 여기 학부생들 중에서도 눈치챈 사람들이 꽤 있겠죠.”
“…….”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당분간은 조교수로서의 업무를 자제하고, 연구원으로 충실할 수밖에 없겠군요.”
“저 역시 같은 생각이에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고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밝은 금발이 그녀의 세련된 눈매를 타고 쏟아져 내렸다.
무심코 시선이 갈만큼 유려한 모습. 주저하던 그녀가 말했다.
“학교에 출근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다시 그 도서관에서 만나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