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working billing engineer RAW novel - Chapter 389
열일하는 과금 기사 388화
“그, 아버지가 한번 만나고 싶다던데.”
“회장님이?”
배재석.
34지구 최대 기업인 일성의 회장이자 경천칠색의 권위자다. 게임 마스터 관대하와는 동기동창으로 서로 말을 놓을 정도의 친분을 가졌으며, 어르신들조차 어르신이라 부를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
종말 프로젝트 때부터 인류를 이끈, 그야말로 시대의 거인인 그가 나를 부른 것이다.
‘미묘한 상황이군.’
원래대로라면 어려웠을 상대다.
배재석 회장은 34지구의 모든 존재를 줄 세워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권력자인 데다, 무엇보다 유명한 딸바보이기 때문이다.
예전의 내가 사랑과 이런 관계가 되었다면?
‘죽거나, 아니면 화성쯤으로 쫓겨났을지도 모르지.’
정의신, 진실신, 명예신이 도사리는 34지구지만 충분한 돈과 권력이 있다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내 고등학교 시절 별명이 뭐였던가?
‘일진 사냥꾼.’
사냥꾼이 있으려면 당연히 사냥감도 있어야 한다.
‘아, 돌아보니 정신이 아찔하군. 너무나 유치하고 한심한 짓거리였어…… 의미도 없이 싸움이나 걸고 다닌 셈이야.’
내 딴에는 머리를 굴린다고 굴리고 벌인 짓들이지만 그 시절 내 이성은 그저 욕망과 충동의 시녀였을 따름.
무의미한 싸움, 무의미한 정의로 사고나 치고 다녔을 뿐 제대로 뭔가를 바꾸거나 이뤄 내지 못했다.
“여러 가지 용건으로 할 말이 있다고 하시더라고. 크게 부담 가지지는 말고.”
“부담은.”
배재석이 34지구 제일의 부호이자 권력자라면 나는 우주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 끝내고 시간 남으니 편하신 대로 불러 달라고 해.”
“정말? 괜찮아?”
“물론이지.”
충분한 힘은 그 자체로 격과 권위를 만든다.
귀하게 자란 딸이 비렁뱅이를 데려온다면 뺨을 치고 산탄총도 쏘는 게 딸바보라는 존재지만.
딸이 강대국의 대통령, 독재 정권의 수괴 같은 사람을 데려오면 같은 짓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한번쯤 뵙고 싶었어.”
그리고 그런 이치는.
98지구 출신의 이민자들과의 만남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 * *
나는 98지구의 이민자들 사이에서도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왕족의 피를 이었지만 사생아였고, 98지구의 전통과 권위를 무시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내가 ‘사냥’했던 일진 중 34지구 원주민은 거의 없다.
34지구에 오래 살다 보면 삼신의 존재에 너무 익숙해져 @나쁜짓을 해 봐야 따돌림을 하는 정도지, 누굴 지속적으로 괴롭힌다는 발상 자체를 안 하게 되기 때문이다.
‘34지구에서 이민자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편견을 가지지 않기가 오히려 어렵다. 34지구의 범죄와 폭력 대부분이 그들에게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바로, 너희 같은 녀석들 때문에 말이야.”
“그래도 연장자인데 말이 험하구나. 한재연. 우리가 필요해 왔다고 들었는데.”
다리 한쪽이 훤히 드러나는 치파오를 입은 아리따운 외모의 동양인이 기품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팽팽한 피부와 오똑한 코, 풍만한 몸매와 훤칠한 키는 20대 중후반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녀의 나이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천상회가 작살이 났는데도 이런 녀석이 계속 나오는군. 하긴 98지구 출신 이민자가 억 단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정의 사태.
98지구의 권력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천상회(天上會)가 정의신의 권능을 악용하여 일으켰다 역풍을 맞은 사건을 말한다.
피해자의 이가 어마어마한 데다 천상회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5세의 얼굴에 낙인이 찍히는 것이 공개적으로 방송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내 앞에 있는 여인의 이름은 정성려.
얼굴에 낙인이 없는 걸 보니 정의 사태에서 잘 벗어난 듯하나 그녀 역시 천상회의 지도층 중 하나.
그런 그녀의 옆에는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있다.
“……오랜만이구나. 재연아.”
거기에 어머니가 있다.
내 입장에서 보면 거의 수백 년 만의 재회임에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적당히 고왔지만 대단히 아름다운 것도 아닌, 화장으로 한껏 꾸몄지만 그럼에도 노화를 숨길 수 없는 얼굴.
성려와 함께 앉아 있으니 어미와 딸로 보일 정도였다.
나는 웃었다.
“반가워요. 이렇게 꾸민 건 처음 봐서 신기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어머니를 본 심정은 표현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소소했다.
반갑지도, 그립지도, 밉지도, 슬프지도 않다.
어머니는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신왕가에 충성해야 한다고 교육받았고, 사랑하지 않아도 자신을 범하는 왕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그 사고방식을 볼 때는 그녀가 미친 게 아닌가 싶었을 정도.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리 신기하지도 않다.
아르데니아에서는 흔해 빠진 인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녀가 선택한 삶일 뿐이지.’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어머니가 고개를 숙인다.
“보고 싶었단다. 사과하고 싶었어. 비범한 피를 타고 났더라도 초월자조차 뛰어넘는 초월자가 되었다는 건 너도 고민이 많았다는 말이겠지. 정말 미안하다.”
마음고생이 많았던 듯 퀭한 눈에 맺히는 눈물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럼 찾아와 그렇게 하셨으면 됐을 텐데.”
나는 철저하게 어머니를 찾지 않았다. 언론이나 일부 단체 등에서 ‘잔인한 아들’이라던가 ‘천륜(天倫)에마저 초탈’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직접 나를 찾아왔다면 달랐을 것이다.
그녀가 나를 만나 사과하거나, 화를 냈다면.
그랬다면, 그녀가 자주 얼굴을 마주하고 나와 시간을 보냈다면…… 어쩌면 난 다시 그녀의 아들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수없이 내게 연락하고 말을 전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끼고 있었다.
“네, 네가 큰일을 하는데 어찌 그러겠니.”
“그리고 저 여자와 만나는 자리에 동행하지도 않았을 테고요.”
“재연아, 여황님은 멸망의 시대에 정 황실을 이끌던 마지막 황족이셨단다. 저 여자라니. 얼른 사과드리렴.”
“그럴 것 없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제국 그 이상의 힘을 얻어 낸 위인이자 영웅이야. 심지어 그로테스크에게 점령당했던 98지구를 혼자 힘으로 수복했다 하니…… 그저 혈통을 이었을 뿐인 내가 우습기도 하겠지.”
나를 치켜세우며 동시에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그녀의 모습에 어머니가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러나 나는 당연히 그러지 않았다. 실제로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래. 거기에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 98지구로 돌아갈 생각이 있니?”
“우리가 왜? 34지구야말로 우주의 낙원이라 불리는 곳인데. 34지구에 이민 오고 싶어 고생하는 타 문명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나?”
맞는 말이다. 수많은 문명의 수많은 종족이, 심지어 드래곤이나 프라야나 같은 초월종 중에도 34지구에 오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으니까.
그녀의 말에 작은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고자 하는 이들이 있겠지?”
“…….”
34지구는 흔히 낙원이라 불리는 곳이며, 어느 정도 그 말은 사실이다. 완벽에 가까운 복지, 정의신·진실신·명예신의 신앙 아래 안전과 평화를 누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34지구는 고정된 세계다.
‘세상 모두가 행복한 낙원 따위 있을 수 없으니까.’
가진 것이 개뿔 없을 때에는 세금 10억 내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도 정말로 10억을 세금으로 내야 하면 죽을 만큼 억울해하기 마련이다.
재벌이 양도세를 적게 내려고 하면 손가락질하며 죽일 놈 취급하지만, 그건 남에게만 들이댈 수 있는 잣대일 뿐.
사실 누구나 자신이 번 돈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며, 이것을 악이라 평가하기는 어렵다.
정의신의 [정의]를 규정하는 건 결국 거기에 포함된 구성원들이고.
이는 정의신이 시스템이 충분히 훌륭하나 완벽할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지의 베일]을 뒤집어쓴 판결은 공정에 한없이 가깝지만 점점 관대해지기 마련이지. 왜냐하면 대상이 나일 수도 있으니까.’
결과적으로 34지구는 계층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구조가 되었으며.
평범하게 사회의 일원이 되어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만인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욕심과 야망이 있는 자들에게 감옥 같은 곳이 된다.
그뿐이 아니다.
포악한 기질을 가진 자, 탐욕스러운 자, 34지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낙오된 자.
삼신의 통치를 억압으로 느끼고 자유를 갈망하는 이는 얼마든지 있다.
“……그래. 이곳에서의 삶은 평화롭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노예라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34지구 사람들이 노예라고?”
“억압받고 자유를 잃어버린 이들이니 노예지! 배부르고 등 따뜻하다고 만족하는 이들은 축사에서 뒹굴거리는 돼지나 다름없다!”
정성려와 만난 장소는 대형 아울렛의 위치한 식당이었기에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웃었다.
“사람들도 거기에 동의하나?”
척!
그때 주변을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춘다.
그렇다.
아울렛을 가득 채운 수십,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위협을 느낄 만한 광경이다.
‘그래. 이게 너희의 방식이지.’
정의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34지구라 해도 사람을 괴롭힐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 한 마디의 비난을 하고 지나간다고 생각해 보자. 이것이 정의신의 심판을 받을까?
‘받지 않지. 별문제 아니니까.’
그러나 10명, 100명이 한 명에 같은 짓을 하게 된다면.
그건 충분한 괴롭힘이나 압력이 될 수 있다.
이쪽의 수가 많다면 가벼운 육체적 접촉. SNS의 메시지나 댓글. 평판 공격만으로 사람을 위협하고, 몰아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이걸로 나를 협박한다는 건 당연히 아니다.
‘일종의 퍼포먼스인가.’
절로 헛웃음이 나왔지만 성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는 많고, 또 단결되어 있다. 네가 우리를 필요로 한다면, 반드시 맹세해야 할 것이다.”
“무슨 맹세?”
“자유, 우리에게 그 어떤 간섭도 없는 자유를 허락하겠노라고.”
“맹세하지.”
“……?”
순순히 답하자 그녀의 눈이 가라앉는다.
“맹세한다고.”
“……정의신과 진실신 최상급 사제의 공증이 필요하다.”
“하지.”
“…….”
“시간 길게 쓰기 아깝군. 나는 그저 98지구의 정명자가 있으면 그만이다. 계획을 잡고 일정을 잡아 줘. 98지구까지 가는 방법은 내가 마련하지.”
“잠깐, 너.”
약간 당황한 기색의 성려가 나를 붙잡으려 손을 내민다.
그뿐이 아니다.
주변에 서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길을 막는다. 온몸에 힘을 주고 단단히 서 있는 그들의 의사에 반해 길을 뚫어 내려면 반드시 [폭행]에 준하는 힘을 휘둘러야만 하겠지.
34지구가 초월자도 경찰에 잡혀 가는 세상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제법 까다로운 방식이지만.
‘이 녀석들…… 정말 황제 클래스의 힘을 전혀 실감 못 하고 있군.’
어이없어하며 기세를 개방한다.
–!
현상은 없다. 기파가 뿜어지거나 무슨 소리가 나거나 하지 않는다. 뭔가 힘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그저 숨겨 두고 있던 것을 풀어놓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 어? 이게 무슨.”
“빛? 지금 머리 뒤로 뭔가.”
“맙소사…….”
그러나 그것만으로 압도된다.
상위의 존재가 하위의 존재에게 가하는 영적인 압력(靈壓). 우주 연합에서 불법으로 규정하기까지 한 영적인 폭력이다.
저벅. 저벅.
멈춰 선 사람들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온다.
그러며.
어머니를 생각했다.
“끝까지…… 자신의 뜻이란 게 없으신가.”
천상회가 노예고 자유고 떠드는 소리가 허망한 이유다.
그들에게 있어 자유란 저들만의 자유.
34지구를 축사라 비웃지만, 그들은 그저 축사의 주인이고 싶을 뿐,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추구하는 이들이 아니다.
“뭐, 그래도 결국 오겠지.”
저렇게 재고 조건을 걸었지만 그들은 결국 98지구로 올 것이다. 본인들은 물론이고 자신들을 추앙하는 멍청이들 역시 데리고 올 것이다.
정의신과 진실신의 사제의 공증이라면 충분히 믿을 만하고, 무엇보다 나라고 하는 [영웅]이 약속을 어길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참나.’
돌아보면 신기한 일이다. 누구보다 정의신의 규칙을 곡해하고 뒤틀던 녀석들이 나는 안 그럴 거라고 확신하다니?
마치 인질을 잡은 악당과 같다. 자기는 타인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면서 영웅은 인질의 목숨을 아낄 것이라 믿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 누구보다 영웅을 신뢰하는 건 악당이군.”
그러나 나는 영웅이 아니라 황제이며, 권력자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거짓을 말하는 존재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신이라 부르지만 그들이 정말 신인 건 아니지.’
그렇다.
애초에 정의, 진실, 명예의 격(格)은.
황제 클래스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