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bastard in a fantasy game RAW novel - Chapter 97
97화. Episode. 31 역병의 습격 (3)
검날을 타고 들불 같은 빛이 휘감겼다.
여느 때와 같이 찬란하기만 한 빛깔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쿠구국-!
악을 섬멸하고, 적을 유린하기 위해 벼려진 이빨.
빛으로 짜여진 오러는 몹시 흉흉했다.
찬란하기보다는 두렵다는 말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검이 부르르 떨었다.
검자루를 통해 전해지는 떨림은, 마치 자기에겐 과분한 옷이라 말하는 듯했다.
“…….”
리하르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드워프가 제작했다는 명검인데, 고작 오러 하나를 못 버텨서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괴물들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추악한 본능을 짓누를 정도의 커다란 공포.
그러나 놈들은 역병의 종자였다. 놈들이 살아서 갈 곳은 세상 천지에 없다.
리하르트가 걸음을 내디뎠다.
슥-
하늘을 바라보던 검 끝이 땅을 향했다.
간단하고 느긋한 동작.
한데 그 여파는 간단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았다.
빛이 터진 동시에 땅이 갈려 나갔다.
그 위에 괴물 수십이 동강 난 채 드러누웠다.
“키, 키에에엑!”
연신 뒤로 물러나던 괴물들이 이내 짓쳐들어왔다.
하나 하찮은 발악일 뿐이었다.
조금 전까진 굶주린 맹수같이 흉폭하게 굴던 놈들이, 지금은 궁지에 몰린 쥐새끼와 다르지 않았다.
쾅! 콰앙-!
빛이 거칠게 반짝일 때면 땅에 기다란 상처가 새겨졌다.
그와 동시에 놈들의 흉측한 살덩이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그 핏물이 땅에 내려앉는 일은 없었다.
도처에 깔린 악에 흉성이 도질 대로 도진 오러는, 그 더러운 핏물마저 증발시켰다.
“소드마스터, 그 이상인가……!”
리하르트의 뒷모습을 보던 기드가 침음성을 삼켰다.
마스터급의 강자인 기드로서도, 리하르트의 무력을 쉬이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직은 자신이 위일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건 전부 착각이었던 걸까.
이제야 드러난 리하르트의 전력은 그보다도 높은 곳에 있었다.
일신의 경지는 기껏해야 소드마스터 중하격에 불과한 리하르트였으나, 그 경지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특별했다.
천지 사방을 사각 없이 베어 내는 별은 완숙한 기사의 것보다 매섭고, 전장을 밝히는 빛은 신비 그 자체다.
리하르트라는 무인을 받쳐 주는 요소 중 어느 하나 평범한 게 없었다.
“췩! 대단한 인간 전사만 즐기게 둘 순 없소!”
기드의 곁을 휴거가 스쳐 지났다.
도끼를 쥔 팔이 울끈불끈, 굵은 핏줄이 솟았다.
그런 휴거의 뒤를 따라 템플나이츠의 기사들이 괴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미 승기를 다 잡은 모습이었다.
“안 가십니까?”
가만히 서 있는 기드를 향해 아론이 물었다.
“가야지.”
“서두르지 않으면 상대를 전부 뺏길지도 모릅니다.”
말을 끝마친 그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혹여 제 상대가 없을까 조급한 발걸음이었다.
“…….”
역병이 뭐 귀한 거라고 저러는지.
기드는 손주와 기사들을 보다가 애창을 쥐었다.
늙어 추레해졌던 몸은, 세계수의 열매라는 기연 덕에 전성기 시절 이상의 힘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힘만 돌아온 게 아니라 젊은 혈기도 같이 돌아왔나 보다.
저 앞에서 맹위를 떨치는 리하르트와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휙휙-
그가 창을 휘저었다.
역병에 물든 몸이 삐걱였으나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고개를 끄덕인 노기사가 땅을 박찼다.
푸른빛 오러가 피어난 창이 괴물 대여섯을 한 번에 꿰뚫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수십을 쓰러트린 그가 리하르트의 옆으로 다가갔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삭신 꽤 쑤실 텐데.”
힐끔 그를 본 리하르트가 너스레를 떨었다.
“끌끌, 성자님께만 부담을 지워 드릴 순 없지요.”
둘이 피식 웃음을 주고받더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빛의 오러가 붉은 살덩이들을 가르고, 푸른 오러가 커다란 구멍을 뻥뻥 뚫어 냈다.
처음엔 합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했던 협력은, 어느새 누가 더 활약하느냐로 경쟁이 붙어 버렸다.
마스터급 이상의 초강자들이 기승을 부리니, 남아나지 않는 것은 괴물들이었다.
그러나 놈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성자님! 지원 나왔습니다!”
리오 성에서 쏟아져 나온 기사들이 괴물의 뒤통수에 검을 꽂아 넣었다.
괴물들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었고, 어쩔 도리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다 죽여! 한 놈도 남기지 마!”
지휘관들이 달아오른 몸으로 소리쳤다.
콰앙-!
연신 쏟아지는 마법도, 적재적소에 솟구치는 나무줄기도 적들에겐 재앙이었다.
“호-르!”
◈ ◈ ◈
우웅, 검이 떨었다.
그 앞에 목 달아난 괴물이 허물어졌다.
더 이상 살아 있는 괴물은 없었다.
“후…….”
나는 힘을 갈무리하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은 피에 젖어 질퍽했고, 곳곳엔 붉은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쿨럭!”
나와 함께 싸우던 기사들이 하나둘 피를 토했다.
강인하던 무릎이 휘청이다 땅을 찧었다.
전투 내내 꾹 참아 왔던 역병의 고통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그에 대비한답시고 성유를 덕지덕지 발랐던 몸엔 역병을 품은 피만 흥건한 채였다.
이따위 꼴을 하고선 오염되지 않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다.
저기 성벽 위의 병력들도 별반 다르진 않을 게 뻔했다.
“이거 완전 병자 기사단…… 쿨럭!”
딴엔 분위기를 환기하겠다고 입을 열었는데,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버렸다.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입가를 닦았다.
“이 중에서 가장 병든 건 성자님인데요.”
아론이 다가와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게 영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가장 앞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웠으니, 아마 뼛속까지 역병에 물들었겠지.
“…….”
격전 후의 가벼운 몇 마디를 주고받는 템플나이츠와는 달리, 리오 성에서 뛰쳐나왔던 사내들은 말이 없었다.
승전의 포효도, 고통의 신음도 전부 입 안으로 삼켜 낸 듯했다.
“……정말 방도가 있는 것 맞습니까?”
그중 왕실 기사단장이자 왕실 지원군의 총사령관이라던 자가 다가와 물었다.
이름이 마틴 가스타인이라 했던가.
난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기사들에게 말했다.
“가자. 병사들 다 죽겠다.”
템플나이츠를 이끌고 비척비척 성을 향해 걸어갔다.
연합의 기사들이 눈을 빛내며 그 뒤를 따랐다.
오직 왕실의 기사들만이 우물쭈물,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을 내 보이고 있었다.
“저들은 아직 믿음이 부족한가 봅니다.”
언제 온 것인지 아발트가 바짝 붙어서 속닥거렸다.
역시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는 둥, 곧 호르의 기적에 놀라서 오줌을 지릴 거라는 둥.
제 몸 죽어 가는 건 신경도 안 쓰고 나불대기 바빴다.
“시끄러워. 너 입냄새 나.”
“억!”
들러붙는 아발트를 팔꿈치로 밀어 냈다.
구내까지 역병이 퍼진 건지 입냄새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흐흐! 그러니까 어서 호르의 기적을 보여 주십쇼.”
그는 뒤로 물러나면서도 능청을 떨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인데.
매일같이 이뤄진 회의 때,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개떼같이 몰려 올 괴물들을 저지하는 건 리오 성이다.]그 말대로 리오 성은 훌륭히 방어했다.
다만 놈들이 품은 역병까지 막아 내진 못했다.
이대로 두면 승리했으되 승리한 것이 아니게 될 터.
지독스런 병균이 온 성을 집어삼켰으니, 다음엔 왕국의 연약한 속살이 괴물들을 맞이하리라.
그건 절대 두고 볼 순 없는 일이었다.
이 나라가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될 건데.
[역병을 불사르는 건 호르께서 하실 것이다.]그러니 이젠 내가 내뱉은 말을 지킬 차례였다.
“여기서 대기해.”
성 앞에 멈춰 선 나는, 별을 꺼내 들었다.
◈ ◈ ◈
한밤중에 시작된 전투는 해가 뜨고, 또다시 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고된 싸움이 승리로 끝맺음되었으나, 기쁨의 함성을 내지르는 이는 없었다.
사투에 사투를 거듭했던 병사들이 털썩 주저앉았다.
지독스런 고통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허탈하네…….”
활을 내팽개친 궁병이 중얼거렸다.
검게 물들어가는 손등이 야속했고, 어둑해진 하늘은 더욱 야속했다.
기껏 성을 지켰는데, 정작 제 몸을 지킨 이는 없었다.
나름 눈이 좋다 자부하던 궁병이 성을 훑어보았지만, 살색 멀쩡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나 저기 성벽 너머, 질퍽한 땅 위에 선 기사들은 살아 있는 게 이상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그렇다고 성벽 위의 병력은 괜찮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육신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아무도 피해 가지 못했다.
성유란 것이 역병을 막아 주리라 믿었건만, 이제 보니 죄 부질없는 짓이었다.
“컥!”
토기가 왈칵 치솟고, 코피가 흘러내렸다.
병사들은 승전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고통에 몸부림쳐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
죽기 직전엔 되려 초연해진다더니, 그게 정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성은 누가 지킬 건데. 이렇게 다 뒤지면 왕국은 누가 지켜!”
역병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앞으로 괴물들은 계속 들이닥칠 텐데, 놈들을 막아야 할 리오 성엔 망자들만 가득 차게 생겼다.
그렇게 되면 오늘의 승리가 무의미해진다.
왕국을 지키기 위해 죽어라 싸웠던 이들은 한낱 개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여겨질 터였다.
병사들은 그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
부아가 치밀 정도로 억울해서, 참다못한 병사 하나가 하늘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그 하늘엔 별이 떠올라 있었다.
“헉!”
병사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별 위에 올라 탄 성자가 성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쭈.”
난데없이 엿을 먹게 된 성자가 입매를 비틀었다.
“죽기 전이라고 배짱이 커진 건가.”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감히 성자님께 불경한 짓을 하다니, 역병에 문드러지기 전에 아주 경을 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살려 달라 난리 칠 줄 알았더니만. 이 와중에 왕국 걱정이나 하고 있었단 말이지.”
기꺼운 듯한 음성.
한차례 턱을 긁적인 성자가 피식 웃었다.
고난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더니, 병사들이 제법 사람 구실을 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더더욱 죽게 둘 순 없지-
그의 몸에서 신앙의 빛이 피어올랐다.
“너희에게 묻는다.”
척. 그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 위를 가리켰다.
성벽 위 병력도, 성벽 앞에 도열한 기사들도, 전부 하늘을 바라보았다.
“호르께서 함께하실진대, 그깟 역병이 그리도 무섭더냐?”
위를 바라보던 사내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무언가, 무척 커다랗고 압도적인 것이 이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분의 빛이 역병에 가려질 것 같더냐?”
밤하늘이 점차 밝아져 갔다.
그것은 백야(白夜)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곧 너희 호르의 현현인 것을. 그렇다면, 내가 못 미더운 것이더냐?”
성자가 치켜 든 손가락을 내려 땅을 가리켰다.
“우리는 호르께서 지켜주신다.”
리오 성 전역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일천만의 신앙.
하늘을 가득 메운 빛의 덩어리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광경이 어찌나 압도적이던지, 흡사 태양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쿠우웅-!
이내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성에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다.
땅도, 성벽도, 오염된 육신도 전부 제 색을 되찾고 있었다.
“신도들이여! 호르의 은혜에 경배하라!”
기적.
다른 이들에겐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