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espised Granddaughter of the Powerful Martial Arts Family RAW novel - Chapter (330)
외전24화
* * *
올해 첫눈이 함박눈처럼 펑펑 내리더니 밤새도록 내려 해 뜰 무렵에는 세상이 온통 하얀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아직 대다수가 잠든 시간. 새벽 동이 터 올 무렵.
뽀득, 뽀득.
손을 정답게 맞잡은 두 사람이 순백의 정원에 나란히 발자국을 만들었다.
“조용하고 좋다.”
“그러게.”
남궁류청과 백리연은 도란도란 대화하며 걸음을 옮겼다.
“눈이 쌓이니까 정원의 분위기가 달라졌네.”
“왜 봄에 배꽃이 피었을 때랑 비슷하지 않아?”
“전혀.”
“그러고 보니 너는 백리 세가에서 겨울을 맞은 적이 없었나? 아니, 한 번 있었잖아.”
“그땐 네가 천마와 싸우고 난 후 계속 깨어나지 않을 때였잖아. 정원 구경할 정신이 어딨어”
“그런가.”
남궁류청이 불만스럽게 백리연을 노려보았다.
“그런가아? 그때 내가 얼마나······. 하, 됐다.”
작게 웃은 백리연이 남궁류청의 품을 파고들듯 팔짱을 꼈다.
한쌍의 원앙처럼 꼭 달라붙은 부부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고즈넉한 정원은 적막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고요함 속에서 안온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화아 생의 첫 눈이네. 돌아가면 눈 만져 보도록 해 줘야지.”
“화아가 손 시릴 텐데.”
“촉감 놀이가 두뇌 발달에 중요하댔어. 감각 발달에도 좋고.”
남궁류청은 또 그 이상한 세계의 소리로군, 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백리연이 말을 이었다.
“아, 맞아. 그리고 거기서는 첫 눈이 내릴 때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말이 있어.”
“알아. 저번 겨울에 그 얘기 해줬어.”
“오, 기억하고 있네. 그래서 소원은 빌었어?”
“아니.”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곧장 튀어나온 단호한 대답이었다.
“어? 왜?”
“소원은 누가 대신 이뤄주는 게 아니야. 마 스스로 일궈 나가야지.”
“······.”
백리연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 무슨 낭만이라곤 하나도 없는 자기 계발 서적 문구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때 백리연은 마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의아하게 남궁류청을 바라보자 감정을 담은 짙고 그윽한 눈매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은 다 이뤄서, 이제 더는 원하는 게 없어.”
“······.”
“······.”
‘낭만이 없다는 말 한 사람 누구야!’
남궁류청이 고개를 살짝 틀고 헛기침을 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주제를 돌리듯이 남궁류청이 물었다.
“그럼 너는?”
“응?”
“너는 무슨 소원을 빌었는데?”
“나? 나는······응? 아빠?”
어느새 다시 돌아온 처소 안에 익숙한 기운이 보였다.
사박사박 눈을 밟으며 창가로 다가간 백리연이 창문을 당겨 열었다. 백리의강이 침상 옆에서 세화를 인자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류청이 물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얼마 안 됐다. 너희는 화아를 두고 어디 갔다 온 게냐?”
“아직 이른 새벽이잖아요. 화아가 곤히 자고 있길래 청이랑 잠깐 주변 산책을 했죠. 화아도 벌써 일어났네요.”
창문 너머로 백리연과 남궁류청을 본 세화가 오동통한 손바닥을 쫙 펼쳐 흔들었다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일어난 지 시간이 조금 지났는지 세화의 얼굴에서는 잠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모습이었다.
백리연은 세화의 품 안을 확인하고 놀라서 물었다.
“아빠가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래.”
세화의 품 안에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눈사람이 있었다.
세화는 눈사람을 가지고 놀고 싶었지만 너무 차가운지 쥐었다가 손을 뗐다가 다시 쥐기를 반복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잠시 후, 백리의강이 세화를 안아들고 눈사람을 창가에 올려놓았다.
“이제 그만. 여기까지 놀자꾸나. 손이 벌써 빨개졌구나.”
백리의강이 한 손으로 세화를 안아 들고 다른 손으로 자그마한 세화의 손을 꼭 쥐었다. 백리의강의 커다란 손에 세화의 두 손이 쏙 들어갔다.
이를 흐믓하게 바라보고 있던 백리연은 앙증맞게 홀로 자리한 눈사람을 보고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어디 가?”
남궁류청이 백리연의 뒤를 따르고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창가에 있는 토끼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백리의강이 세화를 안아 든 채 창가로 다가왔다.
“화아야, 이것 보거라. 네 어미가 친구를 만들어 왔구나.”
“으으응, 친구 아니에요.”
“그럼?”
“자, 이 제일 작은 눈사람이 화야야. 그리고 이게 엄마, 이건 아빠, 그리고 이건 할아버지야.”
백리의강은 왠지 모르게 말문이 막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때 남궁류청이 창가를 짚고 있던 손끝이 발갛게 달아오른 백리연의 손을 가져가 감쌌다.
“손 시려 보여서.”
“너도 같이 만들었잖아. 지금 네 손이 더 차가운데?”
“맞아. 그러니까 우리 둘이 맞잡고 있으면 둘 다 따뜻해지겠지?”
“오, 그러게. 똑똑한데. 아, 주방에다가 깨나 콩을 달라고 할까?”
“토끼들 눈 만들려고?”
“응. 그럼 더 귀여울 것 같지 않아?”
“그것도 좋네.”
백리의강은 오순도순 모여 있는 눈사람들과 그 앞의 사랑스러운 딸과 손녀를 눈 안에 새길 듯이 바라보았다.
이보다 더만족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나날 중에서도 백리의강은 이 순간이 영원하길 염원하는 날이 있었다.
* * *
창가의 눈사람 가족이 모두 녹아 사라질 때쯤, 세화의 돌잔치가 열렸다. 시끌벅적하고 요란법석한 것이 연회의 성공 조건이라면 그날의 돌잔치는 대성공이라고 볼 수 있었다.
백리패혁은 세화의 돌잔치를 아주 으리으리하게 하길 원했고 덕분에 손님은 끝없이 몰려왔다.
기린회 일로 무림맹 본단이 있는 무한에 머무르던 서하령과 악중해도 참석하여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와 준 것에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를 안내한 후, 덕담을 나누고 술잔을 교환했다. 백리연은 몸이 좋지 않다고 술을 거절했고 그녀 대신 남궁류청이 두 배로 힘을 써야 했다.
정신없는 손님맞이가 겨우 끝이 나고, 남궁류청은 창백한 안색의 백리연에게 속삭였다.
“몸이 안 좋으면 먼저 들어가 있어.”
“아니야. 그래도 이건 보고 가야지.”
돌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인 돌잡이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준비된 돌잡이 상이 손님들 앞에서 드러나고······.
“으응?”
“저게 대체 뭐요?”
여기 저기서 놀란 듯한 탄성과 의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리연 또한 두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어처구니 없는 낯으로 돌잡이 상을 바라보다가 남궁류청의 귀에 속삭이듯 물었다.
“원래 무가의 돌잡이 상은 이런 거야?”
“······아니.”
붉은 천을 깐 넓은 단상 위에는 창, 검, 도, 활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가득했다. 위험하지 않도록 날 부분은 다 가려두었지만······ 이게 돌잡이 상인지 무기 진열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물론 한쪽 구석에 선심 쓰듯 서적과 벼루, 붓, 연지와 분, 실과 대추 등이 놓여 있긴 했다. 누가 돌잡이 상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따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상석의 백리패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모가 세화를 품에 안고 일어났다.
예쁘게 차려입은 세화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해도 될 정도로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세화를 먼저 본 사람들을 비롯하여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까지 귀엽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화는 모여 있는 사람들이 신기한지 유모 품 안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어느새 돌잡이 상 앞에 도착한 유모가 잡기 쉽게 몸을 살짝 기울여 주며 말했다.
“아기씨, 마음에 드시는 걸 골라 보세요.”
모두가 목을 길게 빼고 흐믓한 표정으로 세화를 지켜보았다.
고르라는 말을 알아듣긴 한 것인지 탁자 위를 살피는 세화의 시선이 제법 진지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세화가 결정했다는 듯이 오동통한 손을 뻗었다.
원하는 물건이 제법 먼 곳에 있는 듯, 유모 품에 안긴 세화가 거의 기어가듯이 왼손으로 탁자를 짚고 오른손을 뻗었다. 그런데도 손이 닿지 않자 세화가 버둥거리다 유모의 품을 빠져나왔다.
날붙이들은 다 안전하게 되어 있었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에 남궁류청과 백리연은 언제든 달려 갈 수 있도록 앉아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렇게 단상 위를 꾸물꾸물 기어간 세화는 손을 뻗었고, 칠현금을 손에 쥐었다.
“어머.”
“아이쿠, 저런.”
“와하하하!”
탄식과 함께 사방에서 웃음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세화는 제가 쥔 것이 마음에 드는 듯 반대 손으로 칠현금 줄을 퉁퉁 내리쳤다.
백리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백리패혁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백리패혁의 안색은 초상이라도 치른 듯이 굳어 있었다.
백리패혁의 표정을 본 유모가 눈치 빠르게 아이를 다시 얼러 들었다.
“아가씨, 다시 한 번 해 볼까요?”
하지만 몇 번을 다시 해도 결과는 같았다.
지켜보기 답답했는지 갑자기 백리패혁이 벌떡 일어나 유모에게서 세화를 받아 들었다. 진땀을 흘리고 있던 유모가 재빨리 멀어졌다.
백리패혁은 자기 허리춤의 패검을 들어 아이를 향해 보여 주었다.
“이것 좀 보거라. 예쁘지 않으냐? 응?”
귓가가 붉어진 백리의강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버님, 체통을······.”
남궁류청마저 실소를 터트리고, 백리연은 그 옆에서 웃느라 거의 의자에서 미끄러질 정도였다.
그때 뚱한 얼굴의 세화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
백리연은 웃음을 딱 그쳤다.
굳어 있던 백리패혁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함박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얼마나 좋은지 반달로 휜 눈이 위아래로 붙어서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백리연이 소리쳤다.
“또 할아버지라고! 어째서! 화아야!”
“지, 진정해. 보는 눈이 많아.”
“어떻게 진정해!”
그때 세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의 말은 조금 느렸지만, 발음만큼은 매우 또박또박했다.
“할아버지.”
“오냐. 오냐, 할아버지다, 할아버지!”
“싫어.”
“······!”
“할아버지. 싫어.”
잠시 연회장에 침묵이 흐르고 이내 폭소가 가득 찼다.
바로 옆에서 벼락이 내리쳐도 태연할 천하 강자의 안색은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이보다는 나을 듯 싶었다.
벌떡 일어난 백리연이 후다닥 달려 나가 세화를 향해 애걸했다.
“화아야, 화아야, 다시 말해 봐. 뭐라고? 응?”
하지만 어미의 애걸에도 세화는 뚱한 얼굴로 고개를 팩 돌릴 뿐이었다.
“화아야, 다시 말해 봐. 응?”
충격에 빠져 있던 백리패혁이 눈을 희번덕이며 성을 냈다.
“뭘 다시 말해! 그래! 할아버지는 내가 아니다! 저 녀석을 말한 것이지!”
뜬금없이 손가락질 당한 백리의강은 평소 보기 어려운 억울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1살 된 아이가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를 어떻게 구분해 말합니까. 아직 엄마 아빠도 말 하지 못하는데.”
이번엔 뜬금없이 공격받은 백리연이 비틀거린 후 억울한 눈으로 소리쳤다.
“아빠!”
“흠, 흠.”
“에잇, 둘 다 시끄럽다!”
소리치는 백리패혁을 향해 백리연이 입을 열었다가 갑자기 제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에 백리패혁이 눈써을 치켜들었다.
“왜, 이제 내가 시끄럽다니까 입 틀어막고 시위하는 게야? 어?!”
백리연은 그게 아니라는 듯 다른 쪽 손을 내저었다.
어느새 다가온 남궁류청이 백리연의 어깨를 쥐었고, 백리의강이 걱정스러운 음색으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오늘 몸이 안 좋다더니 그 때문이더냐?”
금세 손을 내린 백리연은 후우 길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니요. 별거 아니었어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 정말 괜찮아요.”
백리연은 저를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걱정 말라는 듯이 빙그레 웃고는 세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화아야, 이리 엄마에게 오······ 우욱. 욱.”
“······.”
“······.”
“······.”
백리연을 둘러싼 세 남성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입을 열지 않아도 셋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연회장 또한 침묵에 잠겼다가 폭발하듯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몇 번 반복한 백리연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아, 이젠 안 되겠네.”
백리의강이 멍한 낯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아니, 안 되겠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그게요······.”
백리연이 애교스럽게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사실 돌잔치가 끝나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요. 음, 저 아이를 가졌어요. 이제 대충 한 달쯤 된 것같은······ 아마 확실할 거예요.”
세 남성은 한동안 똑같이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가장 먼저 백리패혁이 격노하여 펄펄 뛰었다.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하느냐!”
“너 이자식!”
“장인어른, 이거 놓고 말씀하시죠. 의원이 먼저입니다!”
“아, 그래, 의원! 의원 데려와, 당장!”
“정말 아이를 가졌다고?”
“둘째라니! 부인, 축하드려요!”
“아가씨, 축하해요!”
“연아, 축하해!”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봄날, 새로운 인연과 희망찬 미래의 또다른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