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the Despised Granddaughter of the Powerful Martial Arts Family RAW novel - Chapter (8)
8화
* * *
투둑, 툭, 투두둑.
쏴아아.
빗소리에 잠이 깼다.
습하고 텁텁한 대기에 고개를 돌리자 창이 조금 열려 있었다.
몸종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은 좀 닫아 주지.’
수백당에서 석 태의의 진료를 받고 순조롭게 나아 가는가 싶던 몸이 비가 와선지 다시 무거웠다.
침상에서 일어난 내가 낑낑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비가 온 지 시간이 꽤 지났는지 창가의 탁자부터 바닥까지 죄다 젖어 있었다.
‘닦아야 하는데······.’
머리 아파.
전체적으로 몸 상태가 영 별로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물이나 마시려 방 가운데의 원형 탁자로 향했다.
찻주전자를 든 순간 한숨을 내쉬었다.
‘비었잖아.’
어제 새벽에도 비어 있었다.
자는 사람 깨우기 거북해 그냥 참고 잤는데 오늘도 비어 있었다.
‘수백당에 있을 때가 좋았지.’
거기선 찻주전자에 물이 떨어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내가 기척만 내도 대기하던 여종이 들어와 날 보살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처음엔 부담스러웠는데 어느새 수백당 시비들의 살뜰한 보살핌에 익숙해졌다.
난 하품을 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닫은 창 너머로 쨍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탁자는 여전히 축축히 젖어 있었다.
몸은 조금 가벼워졌지만, 아직 머리가 아파 계속 누워 있을 때였다.
처소 창밖으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야아아야, 아! 진짜 짜증 나!
걸을 때마다 아파 죽겠어.”
“당금아! 목소리 낮춰!”
“내가 왜!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지가 정말 백리 세가 사람인 줄 아나 봐. 대체 중앙당이 어딘 줄 알고 찾아가느냐고!”
내 몸종인 당금이 다른 여종과 얘기를 하며 내 방의 창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여종이 속삭이듯 말했다.
“가주님 귀까지 들어갔는데 마님이 어쩌겠어? 춘돌은 곤장 스무 대 맞고 아직도 엎드려 있다더라. 그에 비하면 넌 낫지.”
“뭐가 나아! 그래서 춘돌이는 쉬고 있는 거야?”
“그렇지. 스무 대를 맞았는데 어떻게 일하겠어? 일주일간은 운신도 못할······.”
조금씩 멀어지던 소리가 어느순간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잠시 뒤 거칠게 문이 열렸다.
문발이 크게 펄럭이며 바람이 들이쳤다.
“아기씨! 일어나셨군요.”
당금이었다.
문을 저리 열면 자던 사람도 깨어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난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좀 전에 일어났어. 당금, 찻주전자에 물이 없던데 나 물······”
“아가씨, 이것 봐요. 회초리를 맞아 종아리가 다 터졌어요!”
당금이 내 말을 자르며 호들갑스럽게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불그죽죽 그어진 상처들이 아파 보였다.
“대체 중앙당엔 왜 가신 거예요? 아가씨 때문에 괜히 매 맞았잖아요!”
“······.”
당금이 게으름은 피워도 찻주전자를 채우는 것과 세숫대야를 가져오는 정도는 제때 했다.
거의 유일하게 그녀가 하던 일이었는데, 그나마 하던 일마저 팽개친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나보다.
난 머리를 짚던 손을 내리며 말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네가 게으름 피운 탓이지.”
“뭐, 뭐라고요?”
당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간 백리연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어색하게 웃는 낯으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어차피 직계라고 해 봤자 가주님 눈 밖에 난 짐 덩어리.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던 부랑아 주제에 주인 노릇이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심지어 친부인 백리의강은 평소 백리 세가에 잘 머물지도 않았다.
딸리 있다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
백리연이 의지할 사람이라곤 자신밖에 없었고, 당금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이용했다.
위해 주는 척하면서 몇 번 큰소리로 나무라며 백리연의 기를 죽여 놓았다.
그 뒤로는 편한 날들이 이어졌다.
도련님, 백리의강에게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 됐다.
그날도 평소처럼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마님의 시녀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날벼락이 떨어진 게 아닌가!
당금은 기가 차 소리쳤다.
“아가씨!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으세요? 아가씨가 이렇게 배려 없으신 걸 알면 4공자님이 얼마나 실망하시겠어요!”
“하아, 알겠어. 찻주전자만 채우고 가서 쉬어.”
“찻주전자 정도는 이제 혼자 채우실 나이 아니에요? 뭐, 알겠어요.”
입을 삐죽인 당금이 내가 말을 바꿀까 서둘러 찻주전자를 들고 나갔다.
‘회초리를 맞고도 변함이 없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려나?
당금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를 알았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는 거지.’
어쩌다 보니 재수없게 할아버지 귀에 들어가 벌을 받았지만, 나 같은 천덕꾸러기를 진심으로 신경 쓸 리 없다고 여기는 거다.
‘다른 하인들도 똑같을 테고.’
한동안 눈치는 보겠지만 곧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겨우겨우 세안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였다.
여종 한 명이 소란을 피우며 방에 들어왔다.
“아기씨, 아기씨! 고 총관께서 오셨어요!”
“응?”
고 총관은 백리 세가 내에서 재정을 관리하는, 그러니까 나랑은 마주할 일이 없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백리 세가에 오랫동안 봉사하며 할아버지께 신임을 받는 측근이었다.
큰아버지나 고모도 감히 오라가라 할 수 없었다.
“고 총관님이 여길 왜 오셨지? 들은 거 없어?”
“저도 잘 몰라요. ······아기씨께서 부르신 거 아니에요?”
“내가? 아니야.”
여종은 또 무슨 문제가 생겼나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할머니 몸종이 몰려와 한바탕 치도곤 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또 높은 사람이 오자 지레 겁먹은 모양새였다.
이제 와 다시 보니 아까 당금과 떠들며 지나가던 그 여종이었다.
‘진짜 내가 목적인가?’
아버지를 뵈러 왔다면 굳이 나를 부를 리가 없었다.
난 서둘러 채비했다.
옷도 갈아입지 않았었으니 빠르게 준비했음에도 내가 방을 나서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날 마주한 고 총관은 얼마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환한 낯이었다.
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연 아기씨를 뵙습니다.
고 총관입니다. 이렇게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군요.”
난 아버지 처소를 힐끗 보았다.
소란에 하인들마저 우르르 나와 있는데, 아버지가 나오지 않으신 걸 보면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아직 몸이 편찮으시다 들었습니다. 여봐라.”
고 총관의 손짓에 고 총관 옆에 하인이 어디선가 바람같이 의자를 가지고 나타났다.
하인이 날 들어 푹신한 의자에 앉히기까지 하자 난 더 영문을 알 수 없어졌다.
그리고 체격 좋은 두 하인이 어디선가 커다란 나무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내가 들어가 눕고도 남을 것 같은 크기의 거대한 상자는 심지어 세 개나 됐다.
‘대관절 이게 무슨 상황이야?’
고 총관이 상자 하나를 보며 고갯짓했다.
“열어라.”
난 살짝 긴장했다.
곧이어 상자가 열리고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주변 하인들의 표정 또한 나와 다를 것 없었다.
반지르르 고운 색의 능라 주단, 두꺼비 옥장식, 황금패 목걸이, 연꽃 상감의 다기세트, 피처럼 붉은 홍옥등······.
값을 따지기 어려운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건 무엇이고 저건 어디서 난거고······고 총관의 설명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게 다 뭔가요?”
“가주님께서 아기씨께 주신 겁니다.”
“네?”
“가주님은 원래 유람 후에 가족분들에게 이렇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가족 부분에 특히 힘을 준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난 기가 질린 채 늘어놓은 물건들을 훑다 문뜩 고개를 들었다.
수군거리는 하인들의 모습.
언제 왔는지 당금도 하인들 사이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아, 그렇군.’
이건 할아버지의 선포였다.
내가 여기로 쫓아낸 건 맞지만, 너희들은 제대로 모셔야 할 직계라고.
‘이렇게까지 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적당히 하인들 처벌하는 선에서 그칠 줄 알았다. 고 총관이 웃는 낯으로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흰 털가죽을 들어보였다.
“이 흰 담비 털가죽은 특히 질이 좋으니 최대한 손대지 않고 목도리로 만드시는 걸 추천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고 총관, 오래간만입니다.”
“오셨군요. 4공자님.”
어느새 다가온 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있던 날 달랑 안아 들었다.
“앗!”
아버지가 내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확인한 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곧장 고 총관을 돌아보았다.
“소자가 불효하여 죄송하다고, 그리고 은혜에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렇게 귀한 것들을 받기엔 연이의 나이가 너무 어립니다.”
아버지?
나는 안겨 있지만 않았다면 펄쩍 뛸 뻔했다.
‘이걸 거절하면 안 되지!’
이건 나름 할아버지가 내민 화해의 손길이기도 했다.
당황한 나와 달리 고 총관은 아버지가 거절할 걸 미리 짐작하고 있었는지 매끄럽게 답했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른 분들께도 모두 나눠 주고 오는 길입니다. 리 아가씨까지 받으셨거늘 연 아기씨가 받지 못하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백리리는 나와 동갑인 사촌으로 큰아버지의 딸이었다.
고 총관이 말을 이어갔다.
“그보다 공자님, 이쪽을 한번 보십시오. 약재입니다. 약방에서도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 정도지요. 이건 50년 묵은 하수오, 이건 산삼······.”
멈칫한 아버지가 저도 모르게 약재를 향해 다가갔다.
고 총관의 말솜씨는 현란했고, 한참을 갈등하던 아버지는 결국 감사히 받기로 했다. 내게 필요한 약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고 총관께서 저를 너무 잘 아시는군요.”
“제가 4공자님을 갓난아이 시절부터 보았는데요. 당연하지요. 아참, 이걸 잊어버릴 뻔했군요.”
흐뭇하게 웃던 고 총관이 이번에는 직접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조심스러운 몸짓이 아주 귀한 물건을 다루는 듯했다.
‘왠지 상자가 익숙한데?’
······에이 설마, 상자 생긴 거야 다 거기서 거기지.
착각이겠지 싶어 그 감을 무시했다.
고 총관이 공손히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가주님께서 보내신 천명금혼단입니다.”
“······ !”
“아기씨 마음대로 하시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