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dicate the world to my Russia RAW novel - Chapter (121)
048. 영국, 혐성국이 되다(3)
5.
바그라티온의 말은 제법 그럴듯했다.
하지만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릴지는 의문이었다.
‘청나라가 신장을 집어삼킨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줄까?’
‘어지간히 궁지에 몰리지 않으면 힘들 것 같은데.’
쏟아지는 의문 속.
막심은 대표로 나서서 물음을 던졌다.
“조금 전 말씀해주신 정보만으로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혹 영국 측이 실책을 저지르거나 청나라가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으리란 확신이 있는 겁니까?”
“그래. 폐하께서는 아서 웰즐리를 이용하여 이번 전쟁을 계획하셨으니까.”
“아서 웰즐리? 정치인으로 전향한 전직 원수를 말입니까?”
바그라티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서 웰즐리는 여전히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거다. 만약 나폴레옹이 멀쩡히 살아남아 동방 원정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단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지.”
“아! 그렇다면 직접 전장에 나설 수도 있겠군요.”
“거리도 멀고 당장은 북아메리카 쪽에 신경을 써야 할 테니 섣불리 나설 순 없겠지. 하지만 병력을 투입하는 것만은 적극적으로 강조할 게 분명하다. 그러면 달랑 선발대만 보내놓고 끝날 문제가 아니게 되겠지.”
“허. 추가 병력까지 보내게 만들다니. 그리되면 청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되겠군요.”
아서 웰즐리는 원 역사에서도 아편전쟁에 적극적으로 찬성표를 던진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니콜라이는 적당히 소식을 흘려주는 것만으로도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순간 막심은 뇌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에 흠칫 놀랐다.
‘설마 이때를 위해 일부러 북아메리카 쪽을 정치 기반으로 삼도록 묶어놨단 말인가? 전설의 명장이 참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약 그렇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니콜라이가 바라보는 시야가 남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의미였으므로.
‘즉흥적으로 두는 것처럼 보이던 수들이 얽히고설켜서 새로운 수로 변하다니. 이건 누구도 당할 수밖에 없는 계책이로구나.’
막심은 더욱 발전한 듯한 니콜라이의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스스로 각오를 다졌다.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끊임없이 실력을 갈고닦아야겠어!’
이후 바그라티온과 막심이 이끄는 동방 원정군 6만은 남하를 계속했다.
그러다 신장의 끝자락, 티베트, 청해성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곳까지 도착했을 때.
바그라티온은 병력을 그 자리에 멈춰 세웠다.
“여기에 주둔지를 설치한다. 이주민이 흘러들어오면 보급로를 따라 촘촘하게 마을을 만들어주어라.”
“전투는 아마 항구쪽에서 벌어질 것 같은데. 여기는 거리가 너무 멀지 않습니까?”
어느 장교의 물음에 바그라티온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급할 거 뭐 있나? 보급을 충분하게 받으면서 움직이려면 이 정도가 딱 좋아.”
막심은 바그라티온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청나라를 길들이려는 것이로구나.’
단순히 지원을 요청하는 것과 발등에 불이 떨어져 사정사정하는 것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했다.
‘이번 기회에 청나라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아 놓는다면 소수민족을 회유하거나 반란을 유도하는 것도 한결 수월해지겠지.’
과연 청나라는 영국의 공세로부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좋은 도박 거리가 생각난 막심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장교들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애들아! 좋은 내기 거리가 생겼다. 어서 모여봐라!”
6.
1822년 가을.
신속하게 파병 결정을 내린 영국은 선발대 격으로 군함 두 척을 출항시켰다.
미영전쟁이 마무리된 뒤.
북아메리카 서부를 차지한 러시아와 힘을 합쳐 미국을 견제하는 등 안정세에 접어들었기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갑판에 병사들을 불러 모은 지휘관은 인원을 점검한 뒤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청나라에 억울하게 구금된 자국민을 구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다. 그러니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아, 예.”
“반응이 왜 이래? 다들 정신 안 차려? 기합이라도 받아야 정신 차리겠느냐!”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는 솔직히 높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눈과 귀가 있는 만큼 이번 전쟁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야. 아무리 그래도 마약 밀매상들을 구하러 간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냐? 본토였다면 바로 교수형인 중범죄자들인데.”
“군인이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냐.”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와중.
영국군은 어느새 홍콩 인근까지 다다랐다.
“목표물 발견!”
“섣불리 공격하지 마라. 일단 명분을 쌓아야 할 게 아니냐?”
해안 가까이 다가간 영국 군함은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위협 사격을 가했다.
그와 동시에 뻔뻔스러운 소리를 지껄여댔다.
“우리는 그저 영국인을 구하러 왔을 뿐이다!”
“얌전히 넘겨주기만 하면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
그 소식을 들은 임칙서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약아상. 그 녀석의 말이 맞았군. 이렇게 저열한 시비를 벌여올 줄이야!’
명분쯤이야 없으면 만들면 된다.
계속해서 얼쩡거리다 보면 참다못한 누군가가 먼저 선을 넘어올 테니까.
그리고 그 끝에는……
‘처절하리만큼 잔혹한 대가가 기다리고 있겠지.’
이를 악문 임칙서는 광동과 광서를 총괄하는 양광 총독에게 엄중히 명을 내렸다.
“본국을 위협하는 영국군을 철저히 응징하도록 하시오. 반드시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외다!”
흠차대신에게 주어진 전권의 힘은 가히 도광제의 것과 맞먹었다.
그래서 엉덩이가 무거운 총독 역시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만 했다.
하지만 오래된 평화에 젖어 지나치게 방심한 탓일까.
청나라 수군은 기강이 한껏 해이해져 있었다.
“장장 50척이나 되는 전투선이라면 고작 2척밖에 안 되는 군함쯤이야 가볍게 격파할 것이오.”
“그 말이 옳소! 이건 조선의 이순신이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할 것이외다.”
“이번에 양놈들의 수급을 베어 전공을 세워봅시다!”
청나라 진영은 벌써 승리하기라도 한 듯 축제 분위기였다.
가뜩이나 진급이 어려웠던 판에 도광제의 눈에 들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막상 적군을 마주한 순간.
그들의 표정은 경직되고 말았다.
“저건 도대체 뭣이냐?”
“배에 기둥이 박혀있고 연기까지 뿜어나오는데요?”
러시아 제국이 유럽 전역의 인재를 끌어모아 본격적으로 연구 개발을 추진하는 동안.
영국 내부에서도 경각심이 피어올랐다.
‘이거 너무 빨리 발전하는 거 아냐?’
‘적어도 쟤들이 하는 것만큼은 따라 해야지!’
영국은 산업혁명의 종주국이자 미국의 조상답게 훌륭한 발상을 가진 인재들이 수두룩했다.
개중 대부분은 러시아 자본을 받아들여 합작회사를 차렸으나 영국도 일부나마 성과를 주워 먹을 수 있었다.
개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증기선이었다.
콰앙! 콰과광!
영국군의 포격이 시작되고 배가 하나둘씩 침몰해나갈 무렵.
가만히 당할 수 없던 청나라군도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일본이 조선을 침공했던 임진왜란이나 조선의 남한산성을 공략하던 병자호란 시절 사용하던 무기로는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장군! 사거리가 도저히 닿지 않습니다!”
“이익! 그렇다고 저항 한번 못해본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쏴라! 어서 쏘란 말이다!”
지휘관은 열심히 병사들을 다그쳤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공포에 전염된 병사 몇몇은 배에서 뛰어 내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병신아! 너 그러다 죽어!”
“포탄에 맞아 죽든, 물에 빠져 죽든 어차피 똑같잖아! 다만 나는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쪽을 택하는 거다!”
“어? 그런가……”
마음이 흔들린 병사들이 하나둘씩 탈주할 즈음.
조준을 마친 영국 군함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포격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콰과앙! 콰아앙!
허공을 가르고 날아드는 쇳덩이는 놀랍도록 정확하게 날아들어 나무로 만들어진 갑판과 용골을 부수고 폭삭 주저앉게 했다.
적으면 한 발, 많으면 두세 발 만에 완파되는 모습을 보자 병사들의 사기는 말 그대로 바닥을 쳤다.
“이건 말도 안 돼!”
“하늘이 노하셔서 재앙이 내렸도다!”
그리고 잠시 후.
한바탕 포성이 울려 퍼지던 바다 위에는 시체와 부서진 배의 잔해들만이 남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모든 게 청나라가 영국인 마약 밀매상을 잡아들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7.
홍콩 방면에서 장차 천비 해전이라 명명될 전투가 벌어진 뒤.
따로 심어놓은 끄나풀로부터 전황을 보고받은 임칙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소린가? 일부러 내 사람을 보내놓았으니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일 터인데.’
서구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소리는 많이 들어왔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러웠으나 수많은 전쟁을 벌이다 안정을 되찾은 이후론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던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배 2척으로 50척이나 되는 전투선을 어떠한 피해도 없이 침몰시켜버리다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일어난 게 분명하구나.’
전투 결과도 기가 막혔으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주변국들의 반응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고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면…… 어쩌면 청나라는 이번 대에서 끝장날지도 모른다.’
자국을 지키지도 못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단 말인가!
이 틈을 노려 군신 관계를 맺고 조공무역을 해오던 국가들이 반기를 든다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독립투사와 강도가 들끓게 된다면.
국론은 분열되고 나라는 갈기갈기 찢길 게 불 보듯 뻔했다.
‘아!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단순히 탐관오리를 때려잡고 민생을 살피는 것만으론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건가?
사고가 터진 뒤 수습하는 식의 점진적인 개혁으로는 한계가 온 건가?
수많은 의문이 피어올라 임칙서를 괴롭게 하던 와중.
가장 힘겨운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과연 폐하께서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필요할지가 문제로구나. 최소한 팔기군과 녹영군이 무너져 내려야 다른 방도를 생각해볼 터이니. 하지만 그리되면 이미 모든 게 끝나버린 뒤 아닌가!’
그가 고뇌에 찬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을 때.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근심이 많아 보이는군요. 영국군과의 전투가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았나 봅니다?”
입 한번 잘 털어댄 공으로 하급 무관의 지위를 얻은 뮈라는 제법 그럴듯한 비단옷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허울에 불과할 뿐, 앞으로 실질적인 권위만큼은 흠차대신인 임칙서조차 능가하게 되리라.
‘조정에서 서구의 침략에 대항할 방법을 알고 있는 자는 이 녀석밖에 없을 테니까.’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임칙서는 체면 따위는 전부 집어치우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약아상. 네가 원수로 있던 법국은 오래전부터 영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왔다고 들었다. 그만큼 저들의 전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터. 현 상황에서 본국이 어떤 선택을 내려야겠느냐?”
그러자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뮈라의 입에서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동인도회사 군대라면 모를까. 영국군이 나선 이상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산업혁명의 종주국답게 철로 된 대포와 발전된 총기로 무장한 그들은 구식 병기론 상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그렇다면 이대로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냐?”
임칙서의 얼굴에 노기가 어릴 무렵.
뮈라는 능구렁이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자고로 오랑캐는 오랑캐로 상대하라고 했습니다. 신장을 차지한 아라사와 협약을 맺고 영국을 밀어내는 것만이 최선이라 보입니다.”
“……”
임칙서는 판단 능력이 뛰어나고 사고가 깨어있는 자였다.
그래서 15만의 민병대를 물리친 4만의 러시아군이 보통내기가 아니란 사실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심지어 서역을 오가던 상인들까지도 유럽 최강국이라 치켜세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꾸 이 녀석의 말대로 끌려가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선택지가 없었다.
이대로 시간을 질질 끌다가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내가 곧 서신을 써줄 터이니 그것을 번역해 나파륜에게 전해라. 비록 껄끄러운 사이라 하나 편지를 보내는 것 정도는 문제없겠지?”
“물론이옵니다.”
세상을 구할 나라, 러시아.
혐오스러운 인성의 나라, 영국.
나폴레옹 전쟁을 능가할 두 제국 간의 역대급 승부가 성사되다니.
뮈라는 자꾸만 입가가 씰룩거리는 탓에 황급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역시 니콜라이로군. 계획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 과연 이번에는 어떤 전략과 무기로 영국군을 박살 내줄지 궁금하구나.’
적이었을 때는 그토록 두려웠건만 같은 편이라 생각하니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뮈라는 벌써부터 그 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