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dedicate the world to my Russia RAW novel - Chapter (27)
010. 새로운 도시를 위하여(3)
6.
연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방 안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초대받은 귀족, 관료, 그리고 부유한 시민들은 저마다 똑같은 종이를 들고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봐. 집에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이런 게 놓여있던데.”
“자네도 그랬나?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종이에는 어떠한 신상정보도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도시를 이끌어 나갈지도 쉽고 자세하게 적혀있어 누가 보더라도 한 사람이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니콜라이 황자가 있었던 게 분명하군. 그분이 온 뒤로 도시가 뒤집혀버렸으니.’
‘어쩌면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미래가 이 안에 담겨있을지도 모르겠어.’
그게 진실이든, 황자에 의해 가공된 것이든 상관없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이득을 볼 수 있느냐였으니까.
그리고 니콜라이 황자의 의도를 이해한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떠들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들어오는 원재료를 가공해서 상품으로 만들면 확실히 잘 팔릴 것 같아.”
“판매처라면 이미 많지 않은가? 이번에 병합될 핀란드부터 시작해서 프랑스, 그리고 라인 동맹으로 묶어놓은 속국들까지. 신뢰도 높은 구교도 상인들에게 유통하라고 하면 도중에 문제 생길 일도 적겠지.”
“문제는 얼마나 질 좋은 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일세. 지금이야 대륙봉쇄령 때문에 팔리겠지만 나중에 영국산 제품과도 경쟁할 날이 올 테니까.”
“좋은 지적이네. 그건……”
그렇게 토론의 열기가 점점 더해갈 즈음.
드디어 이번 연회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님이 오셨습니다. 모두 예를 표하시오!”
“황자님을 뵙습니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분위기를 살핀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예상한 대로군.’
도시의 위기를 극복해주었을뿐더러 구교도들을 바탕으로 산업 혁신 도시를 이루어나가겠다는, 그로 인해 콩고물이 많이 떨어질 거라는 얘기에 혹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아, 물론 정교회로서는 여러모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겠지만.
“황자님, 조심하십시오. 정교회에서도 사람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건 좀 의왼데.”
막심이 가리킨 곳을 보자 소갈로프 사제가 이쪽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겁먹어서 성당에 박혀있을 줄로만 알았건만.
생각보다 담력이 있는 자였나 보다.
내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자 주변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교회가 이렇게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을 줄이야. 깜짝 놀랐지 뭔가.”
“아무래도 니즈니 노브고로드 교구는 혁신이 필요하겠어. 이교도들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놔뒀다는 건 심각한 문제 아닌가?”
단순히 문서 하나 가지고 정교회를 뒤집어엎자거나 저들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등의 소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니즈니 노브고로드 교구의 주교와 사제들에게 의문을 품은 것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야 평소에 느끼던 것들을 조목조목 정리해서 적어두었으니 의심이 깊어질 수밖에.’
“이건 모두 날조요! 우리 정교회에서는 이단을 절대 가벼이 보지 않는단 말이오!”
“커흠. 그런 것치고는 너무 봐준 것 같던데……”
“세속적인 것에 신앙마저 팔아넘기겠단 말이오? 당장 참회하시오!”
“어허. 황자님께서 사람마다 믿음의 형태는 다양하다고 하셨거늘. 어찌 그런 단순한 잣대로 바라보는 건가?”
소갈로프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애처롭게 반론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니콜라이가 약속한 미래에 마음이 빼앗겨버린 그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막심은 그 모습에 감탄하고 말았다.
“허. 여론이 완전히 넘어와 버렸군요. 이제 저들이 바뀐 모습을 보이기 전에는 어떠한 권위도 실리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상부에서 성직자들을 갈아치울지도 모르죠.”
러시아 제국은 아직 귀족들의 힘이 강한 나라였다.
특히나 각 지역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려온 지방 호족들의 저력은 결코 무시할 게 못 됐다.
그들의 지지를 받을 수만 있다면 이미 상황은 반 이상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깔끔하게 마무리는 해줘야겠지?’
앞으로 걸음을 옮긴 나는 해맑은 얼굴로 정교회 사제를 반겼다.
“소갈로프. 오랜만일세.”
“이 모든 걸 황자님이 꾸미셨습니까? 수많은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신 죄는 언제고 반드시 되돌아올 겁니다!”
소갈로프는 더 이상 체면이고 뭐고 따지지 않겠다는 듯 다짜고짜 물음을 던져왔다.
그에 대한 내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허례허식과 제도에 빌붙어 살아가는 그대들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저 모두가 구원에 이르기를 바랐을 따름이다.”
“이익!”
정교회의 사제에게 교리를 논하다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갈로프는 도와줄 이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모두가 외면할 따름이었다.
분위기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꽁지 만 개처럼 느껴져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흐흐. 정교회여, 부디 현명하게 행동하길 바라네. 내가 다스릴 러시아에서 천수를 누리고 싶다면 말이야.’
불청객이 사라지고 나니 모두의 이목이 내게로 집중됐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막심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 그러면 축배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황자님.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막심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잔을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앞으로 이곳은 개혁의 선봉에 설 것이며 더없이 번창할 것이다. 새로운 도시를 위하여!”
“위하여!”
7.
연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며칠간 성에 머물며 뒤처리를 한 나는 드디어 니즈니 노브고로드를 떠났다.
“황자님 만세!”
“만세!”
귀족과 관료뿐만 아니라 이 근방의 모든 사람이 몰려와 열렬한 배웅을 해주니 가슴이 절로 벅차올랐다.
‘크으. 이 맛에 황제를 하는 건가?’
권력을 잡은 놈들이 죽어도 놓지 않으려는 이유를 좀 알겠네.
단순히 돈이나 지위로는 얻을 수 없는 쾌감이 아주 죽여준다니까.
비록 지금은 일개 도시일지 몰라도 나중에는 전 국토에서 칭송받는 위대한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이 피어올랐다.
‘그러기 위해선 더욱더 훌륭한 성과를 내야겠지. 예정된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원 역사에서 니콜라이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철저히 억압하는 역대급 반동 군주였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도 모자라 비밀경찰까지 동원하여 자신에 대한 불만을 억눌렀으니까.
오죽했으면 유럽의 헌병이라고 불렸겠나.
‘그로 인해 수많은 이들로부터 원망과 저주를 받았지. 온통 다 틀어막기만 했으니 개혁은커녕 기존의 문제점조차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이러니 찐따, 겁쟁이, 소인배 같은 니콜라이의 말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에 두들겨 맞은 뒤에는 폐렴에 걸려도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치료를 거부했다지?
‘하지만 나는 다를 것이다. 지금처럼 하나하나씩 올바른 수를 놓아간다면. 언젠가 운명을 바꿀 날이 찾아오겠지.’
그렇게 결의에 찬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볼 즈음.
마부와 얘기하던 막심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은 수도로 가겠습니다. 따로 생각해두신 일이 있다면 언제든 얘기해주십쇼.”
“음.”
따로 생각해둔 일이라.
나는 러시아 역사 수업에서 배웠던 연대표를 되짚어보았다.
‘지금이 1809년 5월 정도니까.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가?’
전쟁 자체는 9월 초에 끝나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조약이 체결되니 그때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
하지만 수도에 머물며 알렉산드르 1세가 찾아오기만을 넋 놓고 기다리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끼어들어야지. 그래야 조금이라도 활약할 수 있지 않겠어?’
한참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
알렉산드르 1세는 포르부에서 핀란드 대공국이라는 이름의 자치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러시아가 너무 퍼주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성난 민심을 다독이면서도 러시아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수정해야지. 그리고 겸사겸사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할 간부들도 선별하고 말이야.’
러시아 원정, 혹은 조국 전쟁이라 불리는 프랑스와의 한판 승부!
거기서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똥별들을 최대한 걸러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뜬금없이 튀어나온 황자가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해봤자 먹힐 리가 없을 테니 지금부터라도 두루두루 얼굴을 각인시켜놔야 했다.
그리고 내게는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위험천만한 전쟁터에 가는 것도 불사하는 황자라니! 이 얼마나 극적인 장면인가!’
흔들리는 마차 속.
나는 펜을 들어 열심히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막심은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꾸미시려는 거지? 이번엔 좀 살살해주셨으면 좋겠는데.’
더 이상 니콜라이의 기행이 남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 자의 하소연이었다.
8.
핀란드의 어느 이름 모를 영주가 머물던 집무실 안.
알렉산드르 1세는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말했다.
“여봐라. 다음 서류를 들여보내라.”
“예, 폐하.”
비록 전쟁터였으나 알렉산드르 1세는 수도로부터 주기적으로 소식을 전달받기를 원했다.
때로는 이렇게 직접 정무를 수행하며 밀린 업무를 조금이나마 처리하기도 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시종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 몸을 살피셔야지요. 지나친 업무는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후우. 전쟁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놔야지.”
전쟁을 벌인지도 어느덧 1년 3개월째.
스웨덴군과 러시아군은 최후의 일전에 대비해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여유조차도 누리지 않으시다니.
시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면서도 내심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많이 좋아지셔서 다행입니다.’
과거 알렉산드르 1세는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무엇을 하든 쫓기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니콜라이 황자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알게 모르게 여유가 생겼다.
이건 그처럼 가까이에서 황제를 모시는 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지극히 섬세한 변화였다.
그러다 알렉산드르 1세에게 전달할 편지를 추리던 도중.
니콜라이라는 이름을 발견한 시종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니콜라이 황자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그래? 저번에 보고받기로는 공장에 문제가 생겨 니즈니 노브고로드에 갔다고 하던데.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구나.”
밀봉된 편지를 뜯고 내용을 살피던 알렉산드르 1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스웨덴을 침공한 뒤로는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대체 얼마나 흥미로운 내용이 들어있는 거지?’
시종은 알렉산드르 1세의 입이 다시 열리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호기심을 해결하는 건 잠시 미뤄두어야 했다.
“어서 콘스탄틴을 불러오거라. 너는 잠시 물러가 있어도 좋다.”
“알겠습니다.”
마침 근처에서 전략회의를 주관하던 콘스탄틴은 알렉산드르 1세의 부름에 황급히 달려왔다.
“폐하, 찾으셨습니까?
“이걸 한번 읽어보거라. 글쎄 니콜라이가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구교도를 제국의 편으로 끌어들였다더구나.”
“구교도들을 말입니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시초회귀파라는 이단을 토벌하고 귀족과 구교도에게 공업화의 기반을 자발적으로 닦도록 만들었다더군. 그러니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고 봐도 되겠지.”
“허.”
콘스탄틴은 서신을 읽으면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그동안 수많은 정책을 펼쳤으나 어느 하나 효과를 본 게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신기할 따름이지. 그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자치 구역을 약속했다곤 하는데. 고작 황자란 신분으로 어떻게 설득할 수 있었는지 그 내막이 참으로 궁금하구나.”
영악한 니콜라이는 구체적인 내용은 일부러 조금씩 누락시키는 등 보고 받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도록 써놓았다.
아마 그 의도는 직접 불러다 놓고 얘기를 들으라는 뜻이리라.
‘고얀 것. 감히 이따위로 보고를 올려?’
하지만 워낙 큰 선물을 안겨준 탓인지 밉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록 니즈니 노브고로드에 한정되었다고는 하나 이걸 확대해나갈 수만 있다면.
‘제국을 좀먹는 암 덩어리 중 하나를 제거하는 것도 가능할 테니까.’
이렇게까지 역량을 보여주었다면 더는 관청에 놔둘 필요가 없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콘스탄틴에게 명을 내렸다.
“녀석을 핀란드로 불러오거라.”
그 말에 콘스탄틴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곳으로 말입니까?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러시아가 승기를 잡았다고는 하나 아직 수시로 전쟁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더구나 점령지의 민심은 아직 온전히 러시아의 편이 아니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르 1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쯤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니콜라이의 말이 정말로 실현 가능한지 확인해봐야지.”
콘스탄틴은 무언가를 직감한 듯 흠칫 몸을 떨었다.
“설마 그 말씀은……!”
“그래. 나는 녀석이 정말로 위대한 러시아, 통합된 러시아를 만들 수 있는지 시험을 내리고자 한다. 제 입으로 뱉은 말이니 분명 방도가 있다는 것 아니겠느냐?”
어느새 알렉산드르 1세의 머릿속에는 핀란드를 통치하는 니콜라이의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그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