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62
162화
의 촬영도 벌써 중후반부에 들어섰다.
“하루 빠진 게 이렇게 차이가 크네.”
“단독분량이 많잖아.”
“그냥 컷이 많은 거지. 나 단독으로 나오는 씬 생각보다 별로 없어.”
“저기요. 율하는 아예 안 나오는 날도 있거든요?”
원래대로라면 어제 11화를 마무리하고 12화 촬영에 들어가야 했지만, 이정이 촬영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후하, 나 롱테이크 씬은 처음이야.”
“카메라 의식 안 하고 대사 실수만 안 하면 돼.”
“그러니까 그게 쉽냐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의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율하와 그런 율하의 기시감을 눈치챘음에도 모르는 척 행동하는 희도.
“회사에서 연극 연습도 해봤다며. 그렇게 따지면 연극은 한 시간짜리 롱테이크야.”
“으으, 그거랑은 뭔가 달라.”
정 PD는 두 사람의 섬세한 표정 연기와 함께 분위기가 조여졌다 풀어지기를 반복해야 하는 이번 씬 특성상 컷 분할이 최대한 적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이정은 이에 동감했다.
자신 없어 하는 보현을 설득한 결과 두 사람은 10분 남짓한 대화를 한 번에 찍기로 촬영하기로 했다.
“11에 4에 1 갈게요!”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소소하게 잡담을 나누던 이정과 보현이 슬레이트가 쳐지기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촬영팀 옮겨 다닐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저거보다 내가 낫겠다 싶은 사람도 있고, 어떨 땐 저게 배우라면 난 죽어도 못하겠다 싶은 사람도 있어.”
“그래서, 지금은 후자라고?”
촬영이 시작되고 붐 마이크에 잡음이 섞이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는 스태프들은 칼같이 집중하는 그들을 보고 작게 떠들었다.
“10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장난치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아예 분위기가 다르다는 게 진짜…. 이쪽 일 5년 차지만 여전히 신기하다니까. 특히 이이정. 쟨 연차로 따지면 아직 신인이나 다름없잖아.”
“신인? 이이정이 몇 년 찬데?”
“이제 겨우 2년 차더라. 작년에 데뷔했어.”
“그거밖에 안 됐어? 왜 난 이렇게 오래된 거 같지?”
이제껏 일 년에 많으면 두 자릿수, 적을 땐 한 자릿수의 현장에서 일하며 수십, 수백 명의 배우를 만나본 스태프의 눈에도 이정은 특이한 배우였다.
“2년 만에 필모가 가득하던데? 드라마, 웹드라마, 영화, 예능에 화보, CF까지 안 한 게 없던데. 나이도 어리더라. 23살.”
“뭐야, 너 이이정 팬이야? 왜 이렇게 빠삭해?”
“어제 과로로 쓰러졌다길래 좀 찾아봤지. 스케줄 다시 짜느라 좀 빡쳤었는데 필모 리스트 보고 입 다물었다. 장난 아니야.”
그리고 그런 대화가 들릴 리 없는 이정은 어제 못한 만큼 빠르게 촬영 분량을 빼기 위해 제대로 집중한 채였다.
“와, 나랑 다른 보호사들이 그 환자 보호자 면담해야 할 거 같다고 건의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본인 머리 뜯기고 나서는 바로 보호자 부르는 거 있지?”
“6층보다 낫겠다 싶었는데 7층도 장난 아니구나.”
점심시간, 같은 병원 동료지만 소속이 달라 이제껏 접점이 없던 율하와 희도는 한 사건을 계기로 급속도로 친해졌다.
“가끔은 정신 멀쩡한 7층이 더하다니까? 상상을 초월해 아주.”
“여기가 말이 요양병원이지 사실은 돈 좀 있는 사람들이 부모 맡기는 실버타운이나 다름없으니까.”
희도는 열불을 토하는 율하의 말에 웃으며 맞장구쳤다.
이름까지 같은 자신과 달리 이름은 다르지만, 예사와 똑 닮은 외모. 그가 미래로 오고 난 뒤 급속도로 친해진 사이. 게다가 이따금 내뱉는 모호한 말들.
이제는 점심 이후 커피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됐지만 가끔씩 입속을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조예서라고…. 알아?’
물론 미친놈 취급받을 것이 뻔하기에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면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응.”
율하를 보는 희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을 때, 그녀가 문득 물었다.
“24년 전 스토킹 살인 사건은 왜 알아보고 있었던 거야? 그 사건 담당 형사가 네가 맡은 김 할머니 아들이라서? 아니면 그 범인 이름이 너랑 같아서?”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갑작스러운 질문에 희도의 눈이 커졌다. 어쩌면 여태 상상했던 것처럼 율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번에 나한테 빌려준 태블릿 PC. 거기에 정리되어 있던데? 일부러 본 거 아니다. PPT 열려고 문서 파일 들어가니까 바로 떴었어.”
“아아.”
“너 미제범죄 이런 거 좋아해? 아, 그건 범인이 잡혔으니까 미제는 아닌가.”
잔뜩 긴장해 있던 희도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스마트폰 조작에도 익숙지 않은 그가 태블릿 PC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냥 어쩌다가 발견했는데 내 이름이랑 똑같아서 읽어봤어. 알고 보니까 김 할머니 보호자가 젊었을 때 맡으셨던 사건이더라고.”
2022년의 유희도가 1998년도 김희도의 사건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지만, 율하 앞에서 티 낼 일은 아니었다.
“하긴. 유명했지. 나중에 가서는 스토킹 범죄의 탄생이라고 불리는 살인 사건이었으니까. 관련 범죄 다큐에서 스토킹 범죄에 대해 설명할 때 꼭 나오잖아. 스토킹 범죄의 시초는 1998년 어쩌고. 범인 어쩌고. 하면서.”
희도는 자신의 누명이 아직도 그렇게 회자되고 있는지 몰랐다. 스토킹이라는 단어 자체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스토킹 범죄….”
이럴 땐 부모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율하의 말대로 비슷한 방송을 할 때마다 그가 언급되었다면 그걸 듣고 있는 부모님께 너무 죄송스러웠으니까.
“줄줄 읊는 게 이런 쪽에 관심 좀 있나 봐?”
“나? 그냥 다큐 같은 거 종종 보는 정도?”
희도는 자연스럽게 옥상 난간에 기대며 반대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지금은 전혀 관계없는 사건이니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지만, 표정이 굳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사건이?”
그동안 율하에게 느껴졌던 기시감은 역시나 착각인가 싶어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 율하가 그를 향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김 할머니 보호자 말이야. 아들이라며?”
“응. 김동철 형사… 과장님. 저번 행사 때 보지 않았어?”
무의식적으로 동철을 형사라고 부를 뻔했던 희도가 겨우 꼬리를 물어 호칭을 덧붙였다.
어색한 호칭에 그가 슬쩍 율하의 눈치를 봤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듯 하늘을 보고 있었다.
“봤지.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둘 다 김 씨잖아. 김 과장님 못해도 50대는 되어 보이던데. 그때 동성동본 결혼이 가능했나?”
“에이, 난 또 뭐라고. 김 씨가 한둘이야? 동성이긴 해도 동본이 아닌가 보지 뭐.”
별것 아니라는 말투와 다르게 희도의 머릿속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동성동본 금혼법이 완전히 폐지된 건 내가 교도소에 있었을 때야. 그전에도 야금야금 고쳤다곤 하지만….“
확실히 최근에는 8촌 이상으로 그 조건이 완화되었지만, 예전엔 아니었다. 어느 정도 완화된 것 역시 1990년대의 일이니 김 형사의 나이와는 약간 괴리감이 있었다.
“그런가? 아, 다 마셨다. 잠깐만 나 이거 좀 버리고 올게.”
“응.”
분명 최근에 그녀의 이름을 본 적 있었다. 율하가 커피컵을 버리러 간 사이 희도는 김순자 할머니의 성씨를 기억해냈다.
“김해 김씨….”
국내에서 가장 흔한 성. 그만큼 동성동본을 만나기도 쉬운 성일 수밖에 없었다.
“김 형사님은 무슨 김 씨지?”
하지만 율하에게 말했던 것처럼 김 씨도 워낙 본적이 많아 단순히 김 씨라는 이유만으로 동성동본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안 나오네. 당연한 건가. 인터넷이 무슨 만능도 아니고.”
일반적인 경찰에 비해 메스컴을 자주 타는 형사과장 특성상 혹시나 싶었던 희도가 급하게 김 형사의 이름을 검색했지만, 나오는 것은 그의 사진과 이름, 직함뿐 그의 한자 이름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잘 생각해 봐.”
커피 컵을 버리고 온다던 율하는 미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희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김 형사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그러나 희도가 생각에 잠겨있을 거라 예상한 율하의 생각과는 달리 희도는 진작부터 그를 관찰하는 율하의 시선을 눈치챈 상태였다.
“김율하….”
희도는 핸드폰 화면을 보는 척 카메라를 켜 율하를 확인했다. 역시나 그녀는 묘한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이상해.”
“오케이 컷!”
“으하! 성공!!”
깔끔하게 원테이크에 성공한 보현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미묘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마지막 즈음에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한 탓이었다.
“거봐, 하면 된다니까.”
반면 이정은 보현과 달리 핸드폰을 들었던 손을 내리는 것이 전부였다.
“와. 그렇게 연기를 잘하면 메소드 연기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컷 하면 켜지고 오케이 하면 꺼져?”
“나는 희도가 아니니까?”
뭔가 억울해진 보현이 이정에게 물었지만, 이정은 오히려 보현에게 반문했다.
“아니 그건 아는데…. 막 감정 동화되거나 그런 거 없어?”
“있었지. 이거 말고 전에.”
수한 역을 할 때. 그중에서도 솔이의 장례식장 씬을 찍을 땐 그 역시 감정에 동화되어 꽤 힘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근데 이 정도는 크게 동화될만한 씬이 아니라서.”
치열하게 형체 없는 신경전이 오갈 뿐, 그때에 비하면 큰 감정을 요구하는 씬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와. 너 대체 연기 어디서 배웠어? 소속사? 학원? 나도 좀 배우고 싶다. 난 씬 길어지면 마지막엔 매번 이런 식이거든.”
감정의 동화가 잦은 보현이 이정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정이 알려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나 연기 배운 적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