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189
189화
‘데뷔 때 생각나네. 그때도 단체 오디션이었는데.’
재민 역의 오디션 날. 이정은 배우 이이정이 아닌 재민 역 후보 12번으로 불렸었다. 물론 그때와 달리 이번 경우는 안 좋은 소문이 나도 할 말 없을 정도로 무례함 그 자체인 행동이었다.
‘감당할 수 있단 뜻이겠지.’
TT E&M은 업계에서 손꼽히는 문어발 기업.
그것도 한 번씩 소속 연예인들과의 소송이나 업계 종사자들을 향한 갑질로 입방아에 오르지만, 여전히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완연한 대기업이었다.
“오디션 연기 순서는 김대원, 이상욱, 태영범 그리고 이이정. 이렇게 할게요.”
들어온 순서대로 오디션이 진행된 덕에 가장 마지막 차례가 된 이정이 여유롭게 오디션장을 훑었다.
감독 오상원
연출 이현음
심사위원석에는 배우만큼이나 굳은 얼굴의 감독과 연출과 달리 편안한 낯짝의 두 남자가 이름표도 없이 앉아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의 옷값을 전부 더해도 넥타이 하나 못 살 것 같은 고급 정장과 확신에 찬 표정, 그리고 이름표도 없이 배우들을 심사할 수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
딱 봐도 주요 투자사인 TT E&M 관계자였다.
‘에 TT E&M이 얼마나 투자한 건지 물어볼 걸 그랬나.’
콧대 높은 꼴을 보아하니 한두 푼 투자한 게 아닌 듯한데, 이것이 태영범 때문인지, 아니면 TT E&M의 자체적인 판단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사는 거…. 아,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단체 오디션이라는 복병에 첫 번째 배우는 굳은 얼굴을 풀지 못하고 대사를 이어나갔다.
“세상에 돈보다 중요…. 아.”
그러나 한번 흐트러진 정신이 단시간 안에 돌아올 리 없었다. 첫 번째 배우는 대본 연기의 첫 번째 대사도 다 치지 못했다.
“됐어요. 자유연기 보여주세요.”
그나마 정해진 순서는 지키려는 듯했지만, 그 성의 없는 태도가 더 배우들의 기분을 망쳤다.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사는 거 차제가 돈인데. 한 번에 저세상 갈 거 아니면 일단 먹고, 자고, 싸고. 여기서 돈 안 들어가는 게 뭔데?”
그나마 좀 더 수월하게 대사를 치는 두 번째 배우. 그 역시 갑작스러운 단체오디션에 꽤나 열 받은 듯했지만, 오히려 그 분노를 대사에 적절하게 섞어냈다.
‘잘하네.’
순간적인 감정을 연기에 이용할 수 있는 건 배우로서 굉장한 메리트였다. 이정이 알고 있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상황만 받쳐준다면 충분히 뜰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어 보였다.
‘태영범은…. 음?’
이 모든 혼란의 원인 태영범을 본 이정이 심사위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여전히 자신만만하고 콧대 높은 TT E&M 관계자와 달리 태영범은 이를 악문 채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상황이야 이건.”
이정이 살짝 당황해 작게 중얼거렸다.
그가 갑작스러운 단체 오디션에도 이토록 느긋했던 이유는 TT E&M이 치졸하게 나올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치졸함에는 태영범이 어느 정도 엮여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태영범은 이 상황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듯했다.
두 번째 배우가 자유연기를 선보이는 동안 TT E&M 측 관계자가 태영범을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반가움보다는 약간의 비웃음, 혹은 경멸이 섞인 듯한 모습이었다.
“저 개새끼…. 어쩐지 너무 쉽게 기회를 준다 했어.”
오디션을 망친 첫 번째 배우는 오른쪽에, 한참 연기 중인 두 번째 배우는 중간에, 그리고 아직 연기하지 못한 이정과 태영범은 오른쪽에 서 있어 태영범의 목소리를 들은 건 오직 이정뿐이었다.
‘TT E&M이랑 무슨 문제가 있나 본데.’
태영범이 그 손 인사를 무시했다. 일반적인 소속사와 배우의 관계로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 감독님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니 애초에 오디션 열렸다는 것도 구라였겠지…. 으으…. 완전히 찍혔겠는데.”
태영범이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 눈치였다.
‘오 감독 팬이라더니 그건 진짠가 보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퍽 복잡해 보이는 관계인데 이 상황에서도 오 감독에게 비호감 살 것을 걱정한다니. 진짜 팬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태영범 씨. 대본 연기 시작하실게요.”
“안녕하십니까. 배우 태영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러다 코가 무릎에 닿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태영범이 연기를 시작했다.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희경이 태영범의 갑작스러운 출몰에 얼굴을 굳힌 이유가 있는 발성이었다.
그 역시 이 오디션이 갑작스럽게 단체오디션이 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듯한데, 그런데도 앞선 두 배우보다 힘 있고 탄탄해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사는 거 차제가 돈인데. 한 번에 저세상 갈 거 아니면 일단 먹고, 자고, 싸고.”
태영범이 마지막 세 단어에 강세를 주며 단어를 강조했다. 다음 대사까지 한꺼번에 내뱉은 다른 배우들과 차별화되는 모습이었다.
“여기서 돈 안 들어가는 게 뭔데?”
마지막까지 깔끔하지만, 다른 두 사람의 연기를 업그레이드한 것과 다름없는 연기였다.
‘역시 내가 생각하는 인진호 캐릭터랑은 다르네.’
“자유연기 시작해 주세요.”
“야, 이 개새끼야.”
험악한 욕설에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오 감독의 눈이 태영범에게 집중되었다.
“도와주기 싫으면 말로 하던가. 왜 남의 이미지를 깎아 먹고 지랄이야. 내가 언제 너한테 도와달라고 한 적 있냐? 여태 그랬던 것처럼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내면 그만이지 여섯 살짜리 네 아들놈보다도 유치한 수작에 아주 내가 기가 찬다 기가 차. 너랑 같은 아버지를 둔 내가 쪽팔린다. 세상 사람들은 네가 이렇게 병신인 거 아나 몰라? 아. 모르겠지. 알면 큰일 나지.”
언제 인상을 찌푸리고 독설을 퍼부었냐는 듯 멀쩡해진 낯에 오 감독과 이 연출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상입니다.”
“아, 방금 그게 자유연기?”
“네.”
다시 오 감독에게는 저자세가 된 태영범이 머쓱하게 웃었다.
“나한테 욕하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제가 어떻게 감히 오 감독님께….”
한편 이정은 태영범이 자유연기를 ‘야, 이 개새끼야’로 시작한 순간부터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앙물었다.
‘저거 분명히 진심이다. 100% 진심이야.’
그도 그럴 것이 태영범은 처음부터 그를 향해 쏘아붙였고, 그러자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TT E&M 관계자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태영범이 TT 쪽 사람이란 건 나도 몰랐는데…. 덕분에 별걸 다 알게 되네.’
다들 태영범의 폭언에 놀라 TT E&M 관계자의 얼굴을 본 것이 이정과 측근으로 보이는 다른 관계자뿐이라는 게 한스러울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이이정 씨. 대본 연기 시작해 주세요.”
대놓고 웃을 뻔한 위기를 넘긴 이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남은 웃음기를 전부 빼냈다.
영화 시나리오의 시작은 인진호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 나아갈 진에 클 호 자로 큰 세상으로 나아가 큰 역할을 하라는 의미를 가진 내 이름. ―
이게 실제로 나레이션이 될지, 아니면 자막으로 대체될지 모르겠지만, 이정은 이 짧은 문장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생각했다.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사는 거 차제가 돈인데.”
진호가 누군가를 향해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다는 듯 냉소적인 말투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 말을 하는 진호의 분위기는 가벼웠다.
분노, 혹은 짜증이 섞여 있던 다른 배우들의 대사와는 확연히 분위기가 달랐다.
“한 번에 저세상 갈 거 아니면 일단 먹고, 자고, 싸고.”
손바닥을 들어 올린 진호가 마지막 세 단어를 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굽혔다. 엄지, 검지, 그리고 약지.
“여기서 돈 안 들어가는 게 뭔데?”
그가 새끼손가락을 접으며 아직 접히지 않은 가운뎃손가락과 함께 손을 뒤집어 앞으로 내밀었다. 상스러운 욕.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까지 졸업했음에도 여전히 사춘기 고등학생과 다를 바 없는 언행.
그것이 이정이 생각하는 진호였다.
“이상입니다.”
손가락을 곱게 접은 이정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이어서 자유연기 볼게요.”
그리고 이어진 자유연기. 준비해온 자유연기 대신 배다른 형에게 폭언을 빙자한 연기를 한 태영범만큼의 임팩트가 필요했다.
“…….”
“이이정 씨?”
“…….”
“이이정 씨. 자유연기 안 하세요?”
스태프의 부름에도 이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 감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인진호.”
“아 뭐야. 너냐? 깜짝 놀랐네.”
대본에 없는 자유연기지만 분명히 의 인진호였다.
“야. 너 숙제 했냐? 수학 숙제 안 하면 일주일 내내 지랄하는데.”
그것도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 인진호의 고등학생 생활. 숨어서 몰래 담배를 피던 그가 발로 꽁초를 밟으며 말했다.
“아씨, 베꼈으면 진작에 보여줘야 될 거 아니야.”
허공의 누군가를 향해 헤드록을 걸던 진호가 킬킬거리다 이내 손을 풀었다.
“아오, 이제 여기도 털렸냐. 선생들 죄다 수업은 안 하고 불쌍한 학생들 안식처나 털러 다니나. 야, 담임이다. 튀자.”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몇 발자국 걸어 나온 그가 재빨리 뛰었다. 크지 않은 오디션장 거의 끝까지 갔던 그가 다시 돌아와서는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