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68
068화
“넌 어떻게 현관 비밀번호를 집 도어락이랑 똑같이 설정해 둘 생각을 하냐? 보안 무슨 일!”
재빠르게 그의 집에 도착한 지원은 오자마자 이정을 타박했다.
“이사한 친구 집에 빈손으로 온 사람한테 잔소리 듣고 싶진 않거든.”
“어휴 저 머저리.”
이정이 이사한 오피스텔은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개별로 설정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별도의 번호를 생각하기 귀찮았던 그가 개인 도어락의 비밀번호와 통일시킨 탓이었다.
“진짜 머저리한테 머저리 소리 들으니까 어이가 없다.”
빈말로도 머리가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정이지만 종종 지원은 이렇게 이정을 머저리 취급하곤 했다. 꼭 지원뿐만 아니더라도 민혁 역시 종종 그랬다.
그들은 대체로 서로를 조금씩 머저리 취급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박민혁이 오피스텔 얻어준다고 하는 거 거절할 땐 언제고 갑자기 무슨 오피스텔이야? 네가 그새 이런 돈이 생겼을 리는 없고.”
“회사 통해서 얻은 거야. 결국에 박민혁 돈이긴 하지만.”
이정은 그간 지원에게 설명하지 못했던 상황들을 설명했다. 루티온이 차리게 될 회사와 먼저 계약하게 된 것부터 주석을 통해 차기작이 될 영화의 대본을 받은 것까지.
“또 주연급이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오디션 보러 다니는데 넌 벌써 캐스팅이다. 이거지?”
“이번 영화 운이 좋았던 거지. 다음부터는 나도 무조건 오디션행이야. 잘못하면 포지션 애매한 신인 돼버린다고.”
이정이 반쯤 진심을 섞어 엄살을 부리자 지원이 재수 없다며 얼굴을 구겼다.
“한주석 선생님이 캐스팅하신 거라며.”
“응.”
“그럼 영화 개봉 안 해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걸? 우리 회사도 조만간 한주석 선생님 영화 들어간다고 깔리겠다.”
“그 정도야?”
“그 정도야.”
회귀 전 주석은 이정의 매니저 생활 2년 차쯤에 음주운전으로 은퇴했다.
“그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네….”
그 탓에 영화계에서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완전히 체감하지 못했던 이정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주석의 영향력에 놀랐다.
“아, 주석 선생님이랑 서 교수님이랑 동창이셔서 가끔 우리 과 애들 뽑아가기도 한다고 하셨어.”
“아, 맞다. 서 교수님 좀 뵈어야 하는데.”
서 교수라는 말에 이정의 머릿속에서 잊고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 종영하면 찾아뵙는다고 해 놓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내가 연락드려봐?”
“돼?”
나중에야 지원을 통해 회사의 연기자문 일을 맡을 정도로 친한 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친분이 어느 정도일지 확신하지 못했던 이정이 그녀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그럼 살짝 연락드려봐. 나는 연락처가 따로 없어서. 인사만 드리자고 연락처 묻는 것도 이상하잖아.”
교수실에 있는 경우가 많다면 그냥 학교로 가 기다리면 되지만 서 교수는 종종 며칠씩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지원이 서 교수에게 문자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변이 도착했다.
“오늘 저녁에 학교 들리실 거래. 그때 보자고 하시는데. 시간 되지?”
“어. 그럼 이따가 찾아뵙는다고 전해줘.”
어차피 대본 연습을 제외하면 반백수나 다름없으니 지금은 남는 게 시간이었다.
“이따 같이 가자. 나도 이번 학기에 서 교수님 수업 없어서 서 교수님 뵌 지 좀 됐어.”
“너네 학과 애들은 서 교수님 되게 어려워하는데 넌 그렇지도 않다?”
“서 교수님 좋아. 진짜 인생의 롤모델이야. 대화하는 것도 즐겁고.”
넉살 좋게 서 교수에게 치근대는 지원의 행동은 낯설지 않았다.
회귀 전에도 지원은 종종 회사에 있는 서 교수를 찾아와 놀다 가곤 했고, 서 교수 역시 항상 그녀를 손녀 보듯 아끼곤 했다.
“여기 있다가 시간 맞춰 나가자. 한 7시쯤 나가면 될 거야.”
“이제 점심시간 막 지났는데 시간 한참 남았네.”
뜻밖의 희소식에 이정이 냉큼 대본을 꺼냈다. 딴 쪽으로 새긴 했지만 본래 그의 목표는 연기 연습이었다.
“야, 그럼 나랑 연습 좀 하자.”
“이게 이번에 들어가는 그 영화야?”
“어. 근데 좀 어려워서 대본 리딩 들어가기 전에 피드백 좀 받아보려고.”
그가 대본을 건네자 지원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 이거 들고 튀어도 돼?”
“유포하면 손해배상 청구해버린다. 영화 내용 스포 당하기 싫으면 그냥 내놔.”
“아 그냥 볼래.”
실없는 대화가 오가고, 이내 지원이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 역시 연기하는 것을 즐기는 배우로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래 뭐. 나도 연습하다 온 거니까. 너 무슨 역할이라고?”
“이수한. 첫 장면부터 나와.”
“오케이.”
잠시 대본을 읽어보겠다고 말한 지원이 조용해졌다. 함께 있으면 늘 시끄럽기 짝이 없었는데 대본을 읽을 때만큼은 퍽 진지한 모습이었다.
‘하여간 집중력은 좋다니까.’
지원은 공부 머리가 부족할 뿐 본인이 원하고, 또 좋아하는 분야에서는 곧잘 집중력을 뽐내는 편이었다.
“다 읽으면 불러.”
“일단 대충 내용만 훑을게.”
지원의 대답에 이정 역시 핸드폰으로 찍어 둔 대본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잠시간의 정적 후, 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이거 되게 어렵다.”
“그치?”
대본을 건너 뛰어가며 읽은 지원이 혀를 내둘렀다.
“첫 영화인데 대본이 너무 빡센 거 아니야? 결말까지 생각하면 연기 짜임새 엄청 탄탄해야겠는데?”
“그래서 너 부른 거잖아.”
“네가 제일 힘든 부분이 어딘데?”
“솔이 죽었을 때랑 수한이 정체 드러나는 부분. 감정처리가 너무 까다로워. 거기 초록색 플래그 붙여둔 곳.”
이정이 스티커를 붙여둔 곳을 다시 한번 확인한 지원이 그럴 만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안 그래도 이 부분이 제일 까다롭겠더라. 앞에 감정 쌓아도 잘못하면 그냥 이중인격자 되겠던데.”
“그러니까.”
“소시오패스 설정이지?”
“직접 언급은 안 되어있지만, 더 뒤에 대사 보면 그렇지 않을까 싶어. 일단 이중인격은 아니야.”
의 비밀이자 반전. 그것은 전담팀에 소속되어 재한과 함께 A의 뒤를 쫓던 수한이 바로 A라는 것.
“중간중간 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거까진 알겠는데, 너무 싸하면 반전이 너무 뻔해서 지루하고, 그렇다고 너무 티가 안 나면 이중인격자 같고 그렇잖아.”
내부자가 곧 범인, 혹은 배신자라는 내용의 영화는 꽤 흔하지만 수한은 전담 A팀의 실질적인 리더였기에 그 간극을 잘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범죄조직의 수장과 진급은 느려도 평판 좋은 형사. 자칫 이중인격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수한의 모습을 하나로 잘 섞어야 했다.
“일단 여태 캐릭터 짜놨던 걸로 한 번 해 봐.”
“그러자.”
이정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지원 주변을 걸었다. 수한으로 몰입하기 위함이었다.
“재한아. 솔이가…솔이가 죽었다.”
이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부고를 전하는 자 특유의 음울한 목소리가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에 짙게 깔렸다.
“뭐?”
지원이 가볍게 대사를 던지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이정이 별안간 몸을 확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이가 우리 막내! 솔이가 죽었다고!”
동료를 잃은 형사의 울부짖음. 대본을 읽어 막내 솔이를 죽인 것이 다름 아닌 수한 본인임을 알고 있는 지원도 순간 섬찟함을 느낄 정도로 애달픈 목소리였다.
“솔이가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처음 보는 대본을 읽으며 지원은 팔에 오소소 돋는 소름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미친 새끼. 더 나아졌잖아?’
이정의 연기를 직접 보는 것은 작년 10월, 이정이 처음 그녀의 촬영장에 방문한 날. 미친놈처럼 손을 벌벌 떨며 연기해 보자고 재촉했던 그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니까! 이수한!”
처음 이정이 연기하는 것을 봤을 땐 신기했다.
“조금 전에 강력계 오 형사한테 전화가 왔어.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는데 이름이랑 옷차림새가 우리 팀 막내 같다고, 맞는지 확인 좀 해 달라고.”
연기에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그가 이렇게 몰입도 있는 연기를 펼친다는 것이.
그런데 지금은 무서웠다.
“지금 확인하고 오는 길이다. 우리 솔이…. 맞아.”
대사를 내뱉는 이정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얼굴을 감싼 두 손에 핏줄이 잔뜩 올라왔다. 정말 가족처럼 지내던 이의 직접 확인한 사람처럼 수한의 분위기는 점점 더 극에 달했다.
“그럴 리가 없어. 솔이가 왜? 건물 확인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는데? 재한, 초점 나간 얼굴로 급하게 전담팀을 나선다.”
재한이 나가고 전담 A팀 사무실에 혼자 남은 수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끅끅거리던 손이 점점 내려갔다.
손을 내린 수한의 눈가는 여전히 눈물과 울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슴 찢어지게 오열하던 그의 표정이 점점 알 수 없게 변해갔다.
슬픈 감정을 담아 축 처져 있던 눈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피날 듯 짓씹었던 마른 입술을 문질러 구겨졌던 주름을 핀다.
마치 얼굴을 조종하듯 이목구비 하나하나 만져가며 표정을 꾸며낸 수한은 마치 슬퍼하던 것이 거짓이란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맞아. 건물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지.”
“이때 들어오는 동료 형사. 이수한! 너희 막내!”
그러자 섬찟했던 이정의 표정은 또다시 처음과 같은 슬픔으로 물들었다. 순간 제 눈을 의심했던 동료 형사도 곧 오열하는 수한의 모습에 그를 달래느라 그 이상한 모습을 새까맣게 잊을 정도로.
‘이 새끼는 어디가 힘들다는 거야.’
바로 눈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지원의 평가였다.
“야! 너 연기 잘한다고 자랑하려고 불렀냐?”
“괜찮았어?”
이쯤 되면 왜 자신을 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 지금 방금 딱 그거 같았어. 우리 애들 다 시험 망해서 빌빌거리고 있는데 너만 성적 좋았던 그 모평 때.”
“무슨 소리야?”
“재수 없다고!”
이정이 연기한 수한은 자신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꺼내쓰는 사이코 그 자체였다.
이중인격?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수한의 행동이 소름 끼치게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