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act, it's a different world RAW novel - Chapter 8
008화
집으로 돌아온 이정이 노트를 꺼냈다. 대충 처박아 둔 노트에는 첫날의 어지러운 마음을 보여 주는 단어들이 정신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어디 보자….”
구시대적인 발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정은 여전히 생각을 정리할 때에는 쓰는 것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어지러운 단어들 사이로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정리를 좀 해 볼까?”
트라우마를 무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긴 해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능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단순하게 환상이라고 치고.”
일단 그는 이 기적 같은 일을 ‘환상’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전을 좀 뒤져 보면 좀 더 멋들어진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정은 작명 센스가 썩 좋지 않았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둘째로는 환상이 나타나는 조건이었다.
첫 구절만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동화책의 구절을 읊어봐도 환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동화책 내용처럼 산골로 바뀌지도, 눈앞에 떡을 든 상대 역이 나타나지도 않는, 원룸 그대로였다.
“일단 아무거나 되는 건 아니라는 건데….”
처음에도, 두 번째에도 모두 준비된 대본을 읽었다. ‘대본’에 환상이 생긴다는 건 확실했지만, 그 외에도 다른 조건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나 곁에 두는 것보다 아무도 곁에 두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몰라.”
스치듯 들었던 어느 드라마의 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화책과는 다르게 그가 제대로 된 대사라고 생각하고 있어도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오디션장에는 어떨지 모르겠단 말이지….’
완전한 세트장과 달리 녹화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오디션장에서 트라우마가 터질 일은 없다 해도 이정은 내심 조마조마했다. 학습된 불안감이었다.
‘혹시라도 쓰러진다면….’
지원의 촬영장에서 그랬듯 따라 주지 않는 몸 때문에 오디션을 망치게 되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아무리 서 교수의 추천이라도 오디션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배우를 쓸 사람은 없을 테니까.
“됐다, 지금 생각해서 뭐하냐.”
억지로 걱정을 털어낸 그가 종이를 찢어버리고 받아 온 대본을 읽었다.
‘나머지는 차차 알아봐야지.’
조금 유치한 제목처럼 재벌 남주인공, 캔디형 여주인공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전형적인 한국형 드라마.
“모르는 드라만데.”
아무리 이 시기의 이정이 관심이 없었어도 전국적으로 히트 친 드라마의 제목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 낯선 제목을 보니 크게 관심받지 못하고 끝난 드라마인 듯했다.
“내 역할은….”
포스트잇을 확인한 이정이 헛웃음을 지었다. 서 교수가 쥐여준 역할이 생각보다 큰 역할인 탓이었다.
“서브 남주라니. 서 교수님도 진짜.”
여자 주인공의 상사이자 서브 여자 주인공의 전 약혼자.
서브 여자 주인공에 비하면 형편없는 분량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세울 경력 하나 없는 초짜에게 줄 법한 역할은 아니었다.
“정재민.”
꽤 자리 잡은 스타트업 회사의 대표인 그는 팀원들의 반대에도 여주인공 수현을 최종면접까지 올린다. 이후 당연하게도 합격한 수현과 그런 그녀와 자꾸 마주치게 되면서 반하게 되는 아주 흔한 패턴이었다.
“이수현 씨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스펙이 떨어지는데, 우리 회사 면접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재민의 첫 등장 씬, 대사를 내뱉고 눈을 깜빡이자 6평짜리 원룸은 사라지고 면접실이 펼쳐졌다.
‘좀 더 사람 같았으면 좋겠는데….’
손으로 만져지지 않을 뿐 현실과 차이가 없는 사무실과 달리 상대 역은 여전히 유령 같았다. 그 점이 못내 아쉬웠던 이정이 속으로 중얼거리자 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눈앞의 형상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신선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꿈틀거리던 형상은 금세 사람이 되어 또랑또랑하게 수현의 대사를 내뱉었다. 때와 같은 반투명한 유령이 아니라, 어디선가 본 듯,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어어어?”
그 모습에 놀란 이정이 대사를 놓치자 환상이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바보처럼 서 있던 이정은 더 놀랄 게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헛웃음 쳤다.
“와… 진짜…….”
트라우마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인 줄만 알았는데 그 기능이 상상을 초월했다. 양손으로 제 뺨을 친 이정이 다시 집중했다. 부담 없는 24시간 상대 역, 현장 경험이 적은 그에게는 최적의 옵션이었다.
“이수현 씨는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스펙이 떨어지는데, 우리 회사 면접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신선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연기하자마자 자연스럽게 펼쳐진 배경과 상대 역, 그리고 대사까지. 자칫 촬영 현장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신선함이요?”
“지나치게 높은 스펙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천편일률적인 타 지원자들과 달리 새로운 모습이나 창의성을 보여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그 옆의 다른 면접관들도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이수현 씨 옆에 계신 다른 지원자분들은 이수현 씨에 비해 신선함도, 창의성도 부족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어, 그건…….”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 수현이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정리되지 않은 문장, 명시해 둔 복장조차 지키지 않은 허술함 최종 면접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준비가 덜 된 사람이었다.
“수현 양의 신선함이 다른 지원자들의 능력을 뛰어넘을 정도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정의 눈으로 바라본 수현은 부족한 환경에서도 지나치게 해맑게 자란 티 없이 자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타인을 불쾌하게 만드는 소위 ‘넌씨눈’ 캐릭터였지만 지금 그는 이정이 아닌 재민이었다.
“어, 저는 그러니까…….”
“뭐, 좋습니다. 신입의 열정이 때론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풀어주는 법이죠.”
대본에 따르면 재민은 횡설수설하는 수현을 보고 웃는다. 2화의 대본에서는 그 이유가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지정연기를 위해 받은 쪽대본에서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어. 난 처음부터 수현 씨를 본 게 아니라 수현 씨에게서 너를 본 거라는걸.”
지정 연기 장면은 아마도 결말에 가까운 부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감정의 대사였다. 예림과 재민의 대화.
몇몇 대사를 제외하면 지문에 적힌 짧은 설명이나 대사만을 가지고 그들이 가진 감정을 파악해야 한다.
배우마다 다르지만, 이정은 서 교수가 주로 쓰는 방법을 애용했다. 강의 준비를 자주 돕다 보니 매번 그녀가 준비한 자료들을 분석하며 이런 것까지 닮게 되었지만, 이건 미래의 서 교수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림과 재민이 파혼하게 된 건 재민의 일방적인 파혼 통보 때문인데 왜 미련이 남은 것처럼 행동할까?’
본인이 연기할 캐릭터 위에 설정을 덧씌우는 것. 대본에 나와 있는 설정 외에 또 다른 설정을 가지고 조금 더 완전한 캐릭터를 빚어내는 것이었다.
‘재민은 수현의 어떤 부분에서 예림을 본 거지?’
오디션에 합격해서 완전한 대본을 받게 된다면 새롭게 채우거나 생각했던 내용을 바꿔야 할 부분까지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엔 그만의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다. 이정은 완성도를 높여 가는 것을 좋아했다.
‘어렵네.’
혼자 캐릭터를 분석하고 꾸민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건 처음이었다.
“흐음….”
구시렁거리며 생각 없이 대본을 팔락거리던 이정이 대본 첫 페이지에서 아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이름을 발견했다.
“이수희 작가?”
이 시기의 드라마에 관심 없었던 게 잘못이었다. 제목을 보고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로코의 탈을 쓰고 막장 드라마의 퀸을 탄생시키는 반석이 되어 주었다.
“아예 막장을 노린 것도 아니고, 아예 로코를 노린 것도 아니여서 더 욕먹었지 아마?”
끔찍한 혼종, 그것이야말로 을 부르기 적합한 말이었다.
뼈대는 분명 로코물인데 결말은 완전 막장 드라마. 조금 유치하긴 해도 설레는 연애물을 생각하던 시청자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작가가 말하기를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작가는 이 드라마를 시작으로 막장 드라마의 일인자로 자리 잡는다.
“서 교수님도 모르셨겠지?”
그녀가 의도하고 골라 준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모로 헛웃음이 나왔다.
소소한 로코물만 쓰던 이수희 작가가 한 드라마에서 막장으로 노선을 바꾼 뒤 그 길로 자리 잡았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게 이정의 손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내용이었더라.”
어떤 작가인지 아는 것과 별개로 기억나는 것은 로코물의 탈을 쓴 막장 드라마라는 것뿐.
“전혀 기억 안 나네.”
이정은 제 기억을 헤집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 껍데기만큼은 평범한 로코물이니 분명 여기에 힌트가 있을 터였다.
조금 전 고민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처음부터 수현이 아니라 예림을 본 거라고….”
주어진 대본에서 몇 개 안 되는 대사를 훑던 이정이 한 대목을 손으로 쓸었다. 그러고 보니 지정 연기 대본에는 ‘짜증스럽게’, ‘귀찮은 듯이’ 등으로 안내를 해 주던 지문이 없었다.
“만약 처음부터 서브 남주가 아니라 서브 커플이라면?”
전해 받은 인물 소개에는 분명 서브 남주인공이라고 돼 있지만, 이수희 작가의 첫 막장 드라마였다. 일반적인 로코라면 얼토당토않은 소리여도 이 드라마에선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정은 일부러 지정 연기 대본과 대비되는 씬을 골랐다. 만약 처음부터 이 둘을 이어줄 생각이었다면, 그렇게 의도한 작가의 눈에 띌 수 있도록.
오디션에 이수희 작가가 참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도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