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sorry I went to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27
영원한 겨울의 도시 (5)
주랑에 늘어선 흉상이 보내는 시선이 일행을 향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흑과 백, 바둑판 모양으로 짜 맞춰진 바닥은 겉으로 보이는 건물 크기를 훨씬 초과하여 길게 늘어졌다.
세 사람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야 했다.
계단 앞에 늘어선 신상들 역시 가만히 고개만 돌려 침입자들을 쳐다보았다. 적의에 찬 눈빛이었다.
한 칸 한 칸, 2층을 향해 층계를 오르는 걸음마다 공기 중의 긴장이 진해졌다.
장엄하고 호화로운 계단을 두 번을 꺾고 휘돌아 계단참에 다다랐을 때, 천장화에서 첫 번째 공격이 쏘아져 왔다.
파슷!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두 개의 창을, 주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베어냈다.
그림 속에서 쏘아져 나온 무기는 거의 소리도 없이 먼지로 흩어졌다.
클레이오는 열심히 마법식을 재시동시켜 가며 두 명의 검사 뒤를 간신히 따라붙었다.
계단참의 공격을 이겨내고 나자, 계단은 등 뒤에서 박빙처럼 녹아내렸다. 지나쳐온 길들은 사라졌다. 퇴로의 차단이었다.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거로군.’
클레이오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마침내 2층이었다.
아서는 클레이오가 그려주었던 평면도를 머릿속에 완전히 집어넣고 있었는지, 계단을 오르자마자 곧바로 계단 왼쪽에 위치한 장군의 방을 향해 방향을 꺾으려 했다.
하지만 그 앞은 완전히 무너져 길이 꽉 막혀 있었다.
건물의 잔해는 ‘하늘의 귀족’이 흩뿌린 푸른 불이 미술관 전체로 번지는 걸 막고 있었다.
아서가 말했다.
“어, 여기론 못 가겠어.”
숨을 헥헥대던 클레이오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 그런 것 같다.”
ㅁ자 형태 건물의 오른쪽 끝 꼭짓점, 사각형의 북동쪽이 세 사람의 위치였다.
현 위치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마스터 클락이 보관된 소 에르미타주 건물로 넘어갈 수 있건만, 거긴 길이 막혔다.
이래서야 건물 전체를 빙빙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약속’의 「기억」이 띄워준 원고에선 아서 일행이 최단 거리로 이동할 수 있었다.
현실은 달랐다.
또 상황이 나빠졌다.
속으로 무사 여신을 향해 욕을 중얼거린 클레이오는 「지각」을 넓게 펼쳤다.
건물의 북쪽 사면, 강 방향은 무사했다.
‘하지만 그쪽은 원고에서 안 나온 경로인데. 가면 뭐가 나올는지. 츳.’
그렇지만 길은 거기뿐이다.
완드를 꺼내 [방어] 마법을 펼친 클레이오는 아이들보다 앞장서서 북쪽 전실의 문을 열었다.
“이쪽으론 아직 지나갈 수 있어. 가 보자.”
달칵.
클레이오를 뒤따라 방에 들어선 아서가 휘이~ 휘파람을 불었다.
“와우, 풍경 좋은데.”
전실의 오른편 창밖으로는 얼어붙은 네바강이 펼쳐졌다.
백야의 하늘은 희었다.
사납게 일렁이는 ‘혹한’을 머금은 강이 ‘하늘의 귀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걸음을 서둘러야 함을 아는데도, 클레이오 역시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와, 괴수 영화의 한 장면 같네….’
마지막으로 전실에 들어선 이시엘이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이 방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정말 복도가 길군.”
“힘내 보라고 레이.”
세 사람은 또다시 달렸다.
본래라면 그렇게 기나길 수 없는 홀이 또 끝도 없이 길어져, 클레이오에겐 체력장에 임하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제힘으로 뛰는 건 아니고 마법으로 [도약]하는 거지만, 근육과 뼈가 그 속도를 이겨내지 못해 삐걱대는 것이다.
내막이야 어떠하든 세 사람은 날 듯이 홀을 가로질렀다.
천장과 벽감으로부터 달려드는 사소한 공격은 쳐 내고, 피해 가며 달린 결과, 마침내 북측 사면의 끝으로 접어들었다.
새로운 문을 열자 나온 곳은 괴괴한 초록빛 기둥이 황금장식을 이고 늘어선 호화로운 방.
클레이오는 이 장소를 알았다.
겨울 궁전이 황정의 지배를 벗어나던 1917년 혁명의 밤, 게렌스키가 도주해버린 게렌스키 내각의 각료들이 모여 불안에 시달리던 곳.
말라카이트의 방이었다.
터엉.
황금빛 문은 불길한 울림을 남기며 등 뒤에서 닫혔다.
공기가 납을 머금은 듯 무거워졌다.
검사들은 감이 좋다. 두 검사는 더 나아가지 않고 우뚝 멈춰 섰다
여전히 숨이 차서 등을 들썩이던 클레이오는 뭔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방어] 마법을 펼쳤다.
그는 두 팔 너비로 펼친 서클 안에 친구들을 바짝 끌어당겼다.
“독이야!”
방 한가운데, 두터운 말라카이트 식탁의 상판을 받치고 있던 세 명의 여신 조각이 진득한 초록빛 액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클레이오의 금빛 방어벽을 초록빛 액체가 타고 오르며 무시무시한 증기를 내뱉었다. 방어막이 막아주고 있는데도 숨을 쉴 수 없었다.
펼쳐져 있던 「지각」이 강도를 더하며 ‘약속’이 끼인 손가락을 달궜다.
클레이오는 금세 마수의 핵을 파악했다.
“여신상이 아니라 여신들 등 뒤의 달걀 모양 둥근 장식이 핵이야! 저길 깨야 해!”
파아앗!
이번에는 아서보다 이시엘이 더 빨랐다.
번개처럼 빠른 [진격의 원]이었다.
콰아앙!
콰지직.
한 번처럼 보이는 검격이었는데 단숨에 3연타가 들어가, 식탁 아래의 핵을 쩌적 갈랐다.
곧 방안을 가득 채웠던 독액의 연무가 완전히 가셨다.
“와오! [진격의 원]!”
“너무 늦게 성취하여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아서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동안 무뚝뚝한 겸양의 말만 남긴 이시엘은, 별 표정변화 없이 마석을 수거해 왔다.
“넣어라, 클레이오.”
“헛… 고마워.”
탁자와 똑같은 재질의 초록빛. 말라카이트일 것이다.
클레이오는 마석의 정확한 정보가 뜨길 기다렸다.
[수호의 말라카이트.: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 액과 부정을 쫓는다.]
순간 머릿속에 전구가 파팟, 켜지는 것 같았다.
‘이거 땜에 길을 둘러오게 한 건가?’
이전에 ‘전광의 밤’ 던전에서 나온 ‘박편의 이창’을 아슬란 놈 줬다고 무사 여신을 얼마나 욕했던가.
클레이오는 흐뭇한 얼굴이 되어 터지려 하는 아공간 지갑에 마석을 쑤셔 넣었다.
“아서, 넌 이걸 구해다 준 이시엘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엥, 나? 그게 뭔데?”
“나중에 알려줄 테니 일단 가자.”
다시금 앞장선 클레이오가 방의 끝에 닫혀 있는 황금 문을 밀어 열었다. 이번엔 불안보단 기대에 가까운 마음을 품고서였다.
‘여기 알고 보면 보물창고였던 거 아닐까?’
주인이 사라진 옛 차르의 궁전, 이제는 화마에 휩싸인 미술관 가운데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정말로 마석의 보고였다.
방 한 칸을 열면 등 뒤의 문이 닫히고, 칸 안의 마수를 다 해치울 때까지 다음 칸이 열리지 않는 구조였기에 오히려 역습 걱정 없이 마수들을 각개격파해가기 쉬웠다.
건물의 남쪽 사면을 지나칠 즈음엔, 아공간 지갑의 용량이 초과해버려서 더 이상 똑딱단추가 잠기지 않았다.
마법사는 좀 행복해졌다.
그들의 마법사가 행복해서 검사들 역시 행복했다.
.
.
.
이 던전이 어디를 배경으로 하는지 알았을 때부터 반쯤 기대하고, 또 반쯤은 포기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엄청난 소장 목록을 자랑하는 미술관은 꽤 비틀린 형태이긴 해도 기본적으론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마련된 생생한 4D프로젝션이 허망하게도 전설적인 명화들을 구경할 기회는 없었다.
전시실의 벽은 대부분 프레임의 흔적만을 남기고 텅 비었다. 전쟁 중의 미술관에서 미술품은 숨겨졌다.
지금 여기엔 벨라스케스도, 다 빈치도, 라파엘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것까지 정확하게 따라 해 줄 필요는 없었는데.’
물론 그림이 없었기에 치명적인 마수가 안 나오기도 했다. 그림에서 아킬레우스나 다윗 튀어나와도 곤란하니까.
그림이 치워진 탓에, 지금껏 나온 마수는 기껏해야 잔챙이들이었다.
벽감에 부조로 새겨진 단검이나 화살이 날아오거나 기둥에 조각된 쌍두 독수리들이 까악거리는 정도였다.
그 덕에 건물을 휘돌아오는 여정은 두 검사의 수련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숙련도 3배 적립식 수련.
꿰에에에엑!
방 안에서 홰치던 쌍두 독수리를 아서가 단칼에 꿰었다. 이 방에 있던 마지막 마수였다.
아서는 독수리로부터 나온 토파즈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휙 낚아채며 말했다.
“여긴 벽이나 기둥 장식으로 머리 두 개인 독수리가 많네.”
클레이오는 아서의 말을 듣고서 아이러니를 느끼며 웃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상징이면 뭐할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놈들은 머리 나쁜 괴조에 불과한데.
‘저자가 참고 자료로 삼았던 이전 세상에선 여기서 끌려나간 황제랑 섬나라 왕족이 사촌인데….’
이 세상에선 클레이오 본인과, 언젠가 깨어난다면 이스토리아 대주교 정도나 이해할 수 있을 아이러니였다.
이시엘은 마지막으로 방 안을 살핀 후 아서에게 대답했다.
“사납게 생긴 것 치고는 핵을 꿰기 쉬워 다행이었습니다.”
“그렇지? 움직임이 단순해서. 그냥 둥그렇게 돌면서 같은 각도로 공격해 오니까.”
“여기까진 운이 좋았지만 이 앞부턴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야.”
“에이~, 여기까지도 정신 빼놓고 온 건 아니었다구, 레이.”
그야 저렇게 헐레벌레한 게 겉모습뿐인 건 클레이오도 잘 알았다.
자다가도 바깥의 발걸음 소리에 잠이 깨는 놈인데, 검을 쥐고 있을 땐 오죽할까.
그런데도 당부를 덧붙이는 건 클레이오의 정신적 나이가 슬슬 중년에 다다르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아니. 전생까지 쳐서 머리가 늙는 건 그렇다 쳐. 근데 왜 스무 살도 안 된 몸뚱이는 이렇게 아픈 건지.’
이전 세상에서 이 나이 땐 마법 없이도 하룻밤 새는 건 끄떡없었고, 오래달리기 기록도 좋았다.
고작 하룻밤 한데서 자고 좀 뛰었다고 이렇게 죽을 맛이라니.
튼튼하고 잘 아프지 않는 게 장점인 몸으로 살아본 그로선, 운동을 해도 특별히 더 좋아지지 않고 잘 챙겨 먹어도 근손실의 연속인 육신을 건사하기가 참으로 지난했다.
지갑은 두둑해서 좋았지만 한계치 이상으로 굴린 육신은 「이격」으로도 무마가 안 될 만큼 쑤시고 결려 왔다.
‘그래도 마지막 스테이지가 코앞이니까. 저녁은 집에 가서 먹고 싶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클레이오가 아이들의 주의를 모았다.
“알겠으니까 더 바짝 정신 차리라고. 들어 봐. 문을 열면 좌우 양측, 그리고 전면에서 바로 원거리 공격이 들어올 거야. 저 마수의 무기는 창이야. 이쪽에 넷, 반대편에 넷. 들었지?”
클레이오는 그냥 코앞에다 8교 원고를 띄워놓고 애들에게 읽어 줬다.
피곤에 전 탓에 이능을 숨기려는 노력이 바닥을 치는 중이었다.
“어어. 듣고 있다니까.”
아서는 여전히 보기 좋게 눈가를 휘며 싱글싱글 웃는 중이고 이시엘은 표정 변화가 없기 때문에 티가 나지 않을 뿐, 두 군신은 클레이오가 또다시 예언을 한다고 생각했다.
신의 말을.
두 사람이 독수리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클레이오가 짓던 오묘한 표정은, 그것의 역사와 연원을 아나 설명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럴 때의 클레이오는 아무리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들의 가장 소중한 친구, 그러나 그에 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친구.
마법사 클레이오 아세르는 친구들이 획득해야 할 앎과 이해에 올바른 때와 장소가 있는 것마냥 굴었다.
역사의 집행자이자 주재자처럼.
몸이 약하고, 달리기를 못 하고, 추위를 타고, 지저분한 걸 싫어하고, 맛이 없는 음식은 한 입도 먹지 않고, 고양이를 지극히 사랑하고, 술을 좋아한다는 걸 알지만….
아서는 생각한다.
그건 클레이오 아세르의 전체가 아니다.
‘하지만 부분인들 어때.’
저토록 열렬하게 우리를 살리고 싶어 하는데.
콰앙!
새하얗고 높은 문을 열어젖히자, 황금 기둥들 가운데 서 있던 석고상 전사들이 일제히 창을 내리꽂았다.
클레이오의 말 그대로였다.
아서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다.
왕자는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투구를 쓴 전사 넷의 목이 동시에 바닥을 굴렀다. 썩은 풀냄새가 공중으로 퍼졌다.
몸을 낮춰 창을 피한 이시엘이 나머지 두 전사의 머리를 부쉈다.
파가각!
주종의 검에 각기 서린 에테르가 찬연한 잔상을 남겼다.
환상적으로 손발이 맞는 아서와 이시엘은 거의 동시에 [진격의 원]을 날려, 반대편 문을 지키던 전사들도 순식간에 박살 냈다. 마수의 하얀 몸이 부서져 사라진 자리에 작은 마노 조각이 생겼다.
아서는 숙련된 솜씨로 마석을 회수한 뒤, 곧바로 오른편의 붉은 문을 걷어찼다.
문 너머는 붉은 벽.
이 곳은 1812 갤러리.
원래대로라면 전쟁 영웅들의 초상화들이 가득 차 있어야 했을 갤러리의 벽 역시 프레임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안쪽을 훑던 클레이오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림은 모두 소개되지 않았다.
급히 떼어낸 모양으로 문 옆에 세워진 초상화 가 한 장 있었다.
그림 속의 쿠투초프 장군은 들어 올렸던 오른팔을 내렸다.
그는 음산하게 고개를 틀었다.
조국을 침공한 나폴레옹과 맞섰던 장군의 유령이 침입자들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유화 물감이 재현한 죽은 자의 눈으로.
그러자 좁다란 회랑이 반투명해지면서 그 뒤로 널따란 구릉지가 겹쳐졌다.
머리 위로 둥글게 나 있던 천창(天窓)은 곧 석양의 하늘이 되어 벽지보다 붉은빛으로 들판을 물들였다.
어느새 그림에서 빠져나온 장군이 천창 아래 공중에서 현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