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01
교랑의경 101화
마당에 있던 형제들은 전부 대문 밖으로 나갔다.
“새로 이사 왔어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서북 말씨 같네?”
“귀도 참 밝으십니다.”
대문 앞에는 이웃 사람들도 나와 있었다. 잘 모르는 사이긴 했지만 새해 덕담을 나누며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서무수가 맞은편에 앉은 정교랑을 쳐다봤다.
“누이, 무슨 일인지 편히 말해.”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성 밖에 있는, 신선거라는 식당에 좀 다녀와요.”
서무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아마 식당을 내놓을 거예요.”
정교랑의 말에 서무수가 멈칫했다.
“오라버니들이 사들여요.”
서무수가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무언가 숨은 정보를 읽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여인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는 뜻을 전할 때를 제외하면, 늘 표정이 없었다.
“알겠어.”
서무수가 대답했다.
형제들은 정교랑의 마차가 길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은 후에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새해 첫날이 이렇게 지나간 것이다. 형제들이 왁자지껄 밥을 지으러 간 사이, 범강림과 서무수가 단정히 앉았다.
“우리더러 식당을 사라고?”
범강림 역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나서서 식당을 사래요.”
서무수가 말을 고쳐 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범강림은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그냥 누이가 식당을 사려는 거 아닐까요?”
생각에 잠겼던 서무수가 불쑥 말을 내뱉고는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지 웃어 버렸다. 범강림도 머리를 긁적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한가한 정월엔 시간이 빨리 흘렀다. 어느덧 정월 초이레가 다가왔고, 경성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친척들을 보내고 났으니 이제는 지인들과 왕래할 차례였다. 떠들썩한 집들에 비해 객잔에 기거하는 서생들은 쓸쓸한 면이 있었다.
“거리 구경 안 갈래?”
한 동료가 손을 책에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는 추위를 쫓으려는 듯 손을 비비고 발을 굴렀다. 뒤에 있던 한원조와 다른 동료도 책을 내려놓았다.
“어제 구경했잖아. 돌아다녀 봤자 똑같을 텐데, 뭐 돌아다닐 게 있다고.”
한원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그 미인이 또 찾아오길 기다리는 건 아니고?”
동료가 웃으며 놀리자 한원조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긴 하네. 그 미인은 이대로 자취를 감춘 건가?”
옆에 있던 동료가 말했다.
“허튼소리 마, 미인은 무슨 미인. 아마 어르신일 거야. 시녀는 강주 말씨를 썼는데 경성 생활에 익숙했어. 얘기를 들어보니 경성에 있을지 강주로 돌아갈지 아직 모른대. 아마 고향을 그리는 노인일 거야.”
이미 한원조에게 그날 있었던 대화를 자세히 들은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어르신한테 딸이나 손녀가 있을지 모르잖아.”
동료가 웃으며 말했다. 그 농담에 적막했던 방 안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근데 진짜 이상하네. 왜 갑자기 안 오는 거지? 정말 그냥 그 부인을 도우려던 게 전부야?”
한 동료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뭐랬어. 나랑 비슷한 사람이라니까. 자네들이 괜히 일을 삼고 있는 거지.”
한원조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때 문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서 가세. 차정사로 글씨를 보러 가자고.”
같은 객잔에 묵던 다른 서생들이었다. 지루하게 공부에 몰두하고 있던 세 사람은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며 옷을 걸치고 나섰다.
“매화를 보며 시를 감상하는 거 아니었나? 갑자기 글씨라니?”
“소문 못 들었어? 지난 연말에 누가 차정사에 훌륭한 글씨를 남기고 갔대. 아주 독창적인 다섯 종의 서체를 남겼다더군. 장강주 선생까지 직접 보러 갈 정도라네.”
“그랬군. 글씨 보러 갔다가 운 좋으면 장강주 선생과 마주칠 수도 있겠는걸?”
서생들은 웃고 떠들며 문을 나섰다. 거리는 인파로 떠들썩했고 이따금 폭죽 소리가 들렸다. 두봉을 단단히 여미고 나서던 한원조가 동쪽 거리를 힐끔거렸다. 정말, 그뿐이었을까?
“원조 형.”
누군가가 소리쳐 부르는 소리에 한원조는 얼른 동료들과 함께 서쪽으로 걸어갔다.
같은 시각 정교랑은 진씨 저택의 문을 나서고 있었다.
“새해인데 식사라도 하고 가죠.”
직접 배웅을 나온 진 부인이 정교랑을 붙잡았다. 정교랑은 말없이 예를 표하는 것으로 완곡하게 거절했다. 주육낭이 마차를 몰고 오자 진씨 가문 자매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며 수군거렸다. 진씨 가문 여인들은 마차가 골목을 벗어난 후에야 몸을 돌렸다.
“어머니, 정 언니가 입은 옷 말이에요. 어머니가 보내 주신 거죠?”
진단랑이 신이 나서 물었다. 정교랑이 진씨 저택 문 안으로 들어올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보내 준 선물을 직접 입고 나타난 것은 최고의 답례였다. 진 부인의 얼굴에 웃음이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 정 낭자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니?”
진단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예뻐요. 정 언니는 뭘 입어도 예쁘잖아요.”
진단랑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뒤에 있던 언니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십팔랑이 입은 건 정 언니 것만큼 안 예쁘지만.”
자매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십구랑, 다시 말해 봐. 새로 지은 옷, 너는 안 줄 줄 알아.”
진십팔랑이 짐짓 화난 척 소리쳤다. 진단랑은 언니가 무섭지 않은지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았다.
“어머니, 어머니가 만들어 주세요.”
자식들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진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남편의 벼슬길도 순조롭고 시부의 병환도 완쾌된 후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한 새해였다.
마차가 대문으로 들어서자 주육낭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리면서 들고 있던 채찍을 휙 던지고 가 버렸다. 정교랑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 손님이 많이 오셨네요.”
저쪽에 세워져 있는 마차들을 보며 시녀가 말했다.
“매일 그래. 새해잖아.”
여종은 웃으며 은근히 뻐기듯 대꾸했다. 정교랑은 여종을 힐끔 본 후, 고개를 돌려 시녀를 쳐다봤다.
“돌아왔으니, 부인을 뵈어야겠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한 후 여종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길을 안내해 줘요.”
부인을 뵙는다고? 밖에 나갔던 자식들이 집에 돌아오면 부인을 뵙고 문후부터 올리는 게 도리긴 했다. 하지만 정 낭자는 지금껏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갑자기 가겠다니. 여종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기쁜 일 아닌가. 여종은 반색을 했다. 이래서 식구는 식구라니까. 서먹할 게 뭐 있어. 처음엔 낯설어도 차차 익숙해지는 거지.
“아씨, 이쪽으로 가세요.”
여종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 주씨 가문은 예년보다 더욱 떠들썩했고, 찾아오는 이가 특히 많았다. 아랫것들이야 영문을 몰랐지만 주 노야 내외는 뻔히 알고 있었다.
“백모님, 집에 새로 온 동생이 있다던데 왜 안 보이죠?”
이런저런 얘기 끝에 젊은 여인 하나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맞아요. 새해인데 같이 얘기하면 좋잖아요.”
옆에 있던 부인도 거들고 나섰다. 요 며칠 주 부인은 똑같은 말을 하도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집에 없어. 출타했거든.”
주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경성에 지인도 있어요?”
부인이 의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진씨 댁 있잖아.”
주 부인이 웃으며 대꾸했다. 웃는 얼굴이 다소 경직되어 있긴 했지만. 지난번엔 몸이 안 좋아서 잔다고 했고 이번엔 진씨 댁에 갔다고 했다지만, 다음엔? 차일피일 미루면서 이 부인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분명 눈치를 챌 텐데. 아니나 다를까 부인 하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도 참. 그 보물덩어리를 꼭꼭 숨긴 건 아니고요? 우린 진 상공 댁만 못하니, 그 보물을 볼 수 없단 거잖아요.”
“우린 진씨 가문만 못하니, 만나지도 못한단 거예요?”
다른 부인도 웃으며 거들었다.
이거 봐, 이거 봐. 괜히 욕먹을 줄 알았다니까. 주 부인의 웃는 얼굴이 더욱 경직됐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알다시피 진 노태야께서 이제 막 쾌차하셨잖아요. 마음이 안 놓이니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죠.”
주 부인이 말했다.
“그럼 나중에 돌아오거든 꼭 우리 집에도 데려와야 해요.”
부인은 웃는 듯 아닌 듯한 얼굴로 끝까지 확답을 받아내려 했다.
“알았어요. 부인이 귀찮아하지 않는다면요.”
주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여종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
“부인, 사촌 아씨께서 돌아오셨어요.”
주 부인의 얼굴은 대번에 굳어졌지만 그 부인은 반색했다.
“어머나, 너무 잘됐다. 어서 모셔 와.”
그 부인의 말이었다.
아이고, 왜 하필 지금 돌아와. 왔으면 온 거지, 이 눈치 없는 건 왜 이리 달려와 고하고 난리야! 그 계집의 성격이 괴팍한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오기 싫다고 하면 때려서 데려와야 하나? 괜히 망신살만 뻗치는 꼴이잖아!
주 부인은 마음이 급해졌다.
“사촌 아씨께서 부인께 문후 올리러 오신대요.”
부인의 표정을 못 본 여종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 부인의 표정은 편해지기는커녕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귀신에 씌었나,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다른 여인들은 주 부인처럼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젊은 여인과 색시들은 바깥쪽을 두리번거렸고, 나이가 있는 부인들도 호기심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문밖에서 여인 하나가 천천히 걸어왔다. 밝고 아름다운 옷차림에 멋스러운 행동거지, 오목조목한 얼굴을 가진 여인이었다. 표정이 없고 두 눈에 생기가 없긴 했지만. 여인들은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찬란한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잊히고 오싹함이 느껴지는 서늘한 두 눈만이 인상에 남았다.
전에 바보였다더니 아직 그게 남아 있네. 고운 얼굴이 아깝구먼.
“외숙모님.”
정교랑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목소리도 이상하네. 자리에 있던 젊은 여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안타까워했다. 반면 나이든 부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여전히 놀란 주 부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정 낭자, 듣자니 진 노태야를 고쳤다던데 정말 대단하네요.”
주 부인은 남몰래 이를 악물었다.
“교교, 힘들지? 우선 가서 쉬어. 넌 몸도 안 좋잖니.”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싸늘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에이, 이렇게 만났는데 웃어른이란 사람이 선물 하나도 안 주면 내가 뭐가 돼요.”
한 부인이 정교랑을 손짓해 부르며 손에 차고 있던 금팔찌를 풀었다. 정교랑이 미동도 하지 않아 그 부인의 행동만 머쓱해졌지만.
거봐, 얘는 최소한의 예의도 안 통한다니까. 주 부인은 속으로 외쳤다.
“정 낭자, 듣자니 병을 고칠 줄 안다면서요. 우리도 좀 부탁해도 될까요?”
다른 부인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주 부인은 숨이 턱 막혔다. 예의를 모르는 건 이 바보만이 아니었네.
“물론, 되죠.”
정교랑이 그 부인을 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 부인은 경악했다. 된다고? 전에는 안 된다고 했잖아? 주 부인이 바라고 또 바라던 말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여기서 듣게 되다니. 그것도 갖은 핑계를 대며 둘러댄 직후에.
문안 인사를 와야 할 땐 안 오고, 안 와도 될 땐 온다. 수락해야 할 땐 안 하고, 수락을 안 해도 될 땐 한다. 얘는 참, 어쩜 이렇게 말썽이야. 일부러 이러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