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80
교랑의경 380화
마당에 선 고 통사가 허공으로 팔을 뻗자, 매 한 마리가 날개를 쫙 펴고 내려와 앉았다.
“못 고쳤다고?”
고 통사가 고개를 돌리며 뒤에 있던 시종에게 물었다.
“네, 그 낭자의 말이 경왕 전하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고, 아주 건강하시다고 했답니다. 그런 바보의 병은 자신이 병을 고치는 원칙에 부합하지 않아 고칠 수 없다면서요.”
“얼씨구, 진짜로 원칙을 고수했단 말이지?”
고 통사가 웃으며 팔에 앉은 매를 시종에게 건넨 다음, 손을 닦고 걸음을 옮겼다.
“원칙상 고칠 수 없으니까요. 당시 군왕께서는 거의 이성을 잃고 펄펄 뛰다가 그 낭자를 때릴 뻔했답니다. 원칙 때문에 안 고치는 건지 아니면 고칠 수 없는 건지 물으셨는데도, 그 낭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랍니다. 원칙상 고칠 수 없고, 고칠 수 없어 그런 원칙을 만들었다고 하면서요.”
시종이 말을 보태며 보고하자, 고 통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신의니 뭐니 하는 소리도 저 스스로 벗어던진 거겠지. 따지고 보면 일리 있는 일이었어. 원칙을 고수하는 거 좋지, 좋고말고. 그래서 어디로 간다더냐?”
“양주로 간답니다. 누군가를 찾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시종의 대답에 고 통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못마땅한 듯 말을 이었다.
“하여간 말을 안 듣는군. 아직도 제가 어린애인 줄 알지. 정초부터 어딜 싸돌아다니려고. 집에 있기 싫으니까 말썽을 피우는 거 아니냐. 그런 애가 있으면 집안 식구들도 골치깨나 아플 거야.”
시종은 그렇다며 맞장구를 치고 덧붙여 물었다.
“그럼 우리 사람들은······.”
“불러들여라. 우리가 정씨 가문 사람도 아닌데, 그 집 아이를 보살피며 호송할 필요야 없지 않느냐.”
고 통사가 웃으며 말하자 시종이 얼른 알았다고 했다.
“다들 군왕 쪽으로 보내라. 잘 지키라고 해.”
고 통사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 꼴은 보고 싶지 않구나. 폐하와 마마께서 지금도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몰라. 잘들 지켜야 한다. 털끝 하나 상하지 않도록.”
약하고 힘없는 동물을 살뜰히 보살피듯, 힘없는 어린아이에게 그는 언제나 넘치는 사랑을 주었다. 시종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갔다.
고 통사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으며 여유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월 대보름엔 경성만 떠들썩한 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이 떠들썩했다. 작은 마을에서도 등롱을 산 모양으로 커다랗게 만들어 대보름 명절을 즐겼다. 경성에서 본 것만큼 정교하진 않았지만, 저녁이 되어 불을 밝히자 반짝반짝 찬란하게 빛났다.
등롱으로 만든 산을 둘러싼 아이들이 웃고 떠들었다. 진안 군왕의 옆에서 손을 잡고 선 이황자 역시 소리를 지르며 등롱을 향해 달려들려고 했다. 진안 군왕이 이황자를 잡아끌었다. 헤헤 웃으며 등롱으로 만든 산 주변을 돌던 이황자가 갑자기 손을 뻗어 등롱을 잡아떼려고 했다.
근처에 있던 점포의 주인장이 그 모습을 보고 행여 모양이 무너지기라도 할세라 발을 동동 굴렀다. 호위하는 시종들이 많은 걸 보면 두 사람 다 비범한 신분이 틀림없을 터였지만, 주인장은 그래도 다가가 말렸다.
“손님, 저녁에도 써야 하는 거라서요. 여러 사람이 보름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겁니다.”
주인장의 간곡한 말에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황자를 붙잡으며 나지막이 타일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돌아봤다. 비틀비틀 위태로운 걸음걸이와 입가에 흐르는 침, 눈은 웃고 있지만 표정은 멍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서 바보라는 티가 났다. 그런 아이를 열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따뜻하고 극진하게 보살피고 있으니 절로 호기심이 일었다.
“이 아이는······.”
주인장이 입을 열었다.
“이 아이는 바보입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너무나도 솔직한 대답에 주인장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바보고, 내 동생이기도 하죠.”
진안 군왕이 담담하게 웃으며 이황자의 손을 잡았다.
“육가아, 우리 저 앞에 가 보자. 저 앞에 더 좋은 거 있어.”
아이는 그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아아야야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비틀비틀 앞으로 걸어갔다.
“바보를 저리 살뜰히 챙기는 건, 살다 살다 처음 보네.”
저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보고 주인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다 보니 금세 한 바퀴를 쭉 돌았다. 이황자는 고단했는지 더 이상 걷지 않고 땅바닥에 털퍼덕 앉았다.
“공자님, 배를 바꿔 탈까요? 아니면 마차로 갈까요?”
시종이 다가와 물었다. 진안 군왕은 앞쪽을 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바닥에 앉은 아이를 보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쪼그리고 앉았다.
“육가아.”
아이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손가락만 갖고 놀았다.
“육가아, 너 지도 보는 거 좋아하지?”
진안 군왕이 아이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 형이 진짜 산하를 보여 줄게, 어때?”
* * *
경성에서는 정월 말에 큰 눈이 내렸다. 풍년이 들 상서로운 징조였다. 이른 아침 거리에 쌓인 눈은 관아에서 나온 인력들이 깔끔하게 치운 후였고, 황성 앞은 더욱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대전에는 어사가 앞쪽에 서 있고, 조정 대신들이 각자 자리에 서서 대기 중이었다. 황제만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저쪽에서 누군가가 나지막이 이야기를 주고받자, 즉시 어사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음악 소리와 함께 시종들과 총관, 환관이 먼저 나타나고 곧이어 황제가 걸어 나왔다. 신하들이 엎드려 절을 올리면서 이번 달 조회가 시작되었다.
진소는 신하들의 대열 속에서 황제의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는 더욱 수척해져 있었다. 전에는 그래도 조회에 참석할 만한 기력이 남아 있었지만, 요즘은 기력이 남아 있는 시늉조차 힘들어 보였다.
조회는 금방 끝났고, 곧이어 상공 대인과 삼사사(三司使), 한림원 관리 등이 정사를 논하기 위해 불려왔다. 이들을 불러올 동안, 대태감이 안쪽에서 황제에게 무어라 말씀을 올렸다. 황제가 노여움이 담긴 목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황실 자제들이 밖을 유랑한다니, 체통을 지켜야지.”
“전하께서 의원을 더 찾아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단 두 마디였지만, 전하와 의원, 밖이라는 단어에서 진소 등 상공들은 경왕을 데리고 의원을 찾아 밖으로 나간 진안 군왕의 이야기인 걸 대번에 눈치챘다.
세밑에도 안 돌아왔다던데, 보아하니 당분간 안 돌아올 모양이군.
문이 열리자 다들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내시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옥좌에 앉은 황제는 평정심을 회복하여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려온 대인들이 정사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서북의 군사 상황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대전 분위기는 곧 경직됐다.
“종승포(鍾承布)는 방탕한 자요. 가세만 믿고 군에서 상관의 말을 거역했으니 자리를 옮겨야 마땅하오.”
“곽 대인, 강문원 한 사람의 주장만 듣고 예단하지 마시오. 주 감사는 종승포가 유능하고 출중한 자라 하였소. 서북으로 간 불과 몇 달 만에 벌써 전공을 세웠다더군.”
서북의 장수들을 놓고 논쟁이 지속되자, 황제는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
“이 일은 추후에 다시 논의하지.”
둘의 말을 끊은 황제가 다른 대신들을 보며 말했다.
“다음.”
회계를 맡은 관리가 앞으로 나섰다.
“풍림이 태창로 전운사의 감찰 결과······.”
탐관오리에 관한 보고가 계속되자, 황제는 이마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조사하시오, 조사해. 전부 다 조사하시오. 어사대도 가고 대리시도 가서,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전부 잡아들이라고.”
황제가 호통을 쳤다. 일이 커질 모양이었다.
진소 등도 이 일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이견이 있다 한들 이런 때에 황제에게 맞서며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대전에는 대답하는 소리와 침묵만이 감돌았다.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자 황제는 한숨을 쉬며 안에 있는 중신들을 쓱 훑어봤다.
“다른 일은 없소?”
황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못 하고 있는데, 내시 하나가 들어와 고 통사가 알현을 청한다고 아뢰었다. 관직도 낮고 아직 지제고(知制誥) 직함도 받지 못한 고 통사는 진소 등처럼 부름이 없어도 안으로 들어와 정사를 논의할 자격이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고 통사를 기다리게 했겠지만, 마침 속이 답답하던 터라 황제가 고 통사를 안으로 들였다. 어쩌면 답답하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으로 들라는 내시의 통보 소리가 전해지자, 내시 하나가 고 통사에게 속삭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무어라 나지막이 속삭인 내시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숙고하십시오, 대인.”
고 통사는 손에 든 상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상소를 챙겼다. 지금 이런 때에 이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폐하를 기쁘게 해 드려야 하나? 무엇보다도 요즘엔 기뻐할 만한 큰일이 없는데. 큰일이 아니면, 작은 일이라도······.
걸음을 옮기며 미간을 찌푸리던 고 통사는 무언가 떠오른 듯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작은 일이긴 하지만 경사가 있긴 하지. 폐하께선 지금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신경 안 쓰실 거야. 좋은 일이기만 하면 돼.
고 통사는 심호흡을 하고 짐짓 기쁜 표정을 지었다.
“폐하, 좋은 소식이옵니다.”
고 통사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진소 등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용상에 앉은 황제는 표정이 밝아졌다.
“군목사(群牧司)에서 온 희소식이옵니다.”
고 통사의 말에 대신들이 실소를 터트렸다.
“군목사에서 올해도 말똥을 팔아 거금을 벌어들였나 봅니다?”
누군가가 비웃는 투로 진소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진소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고 통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진소는 황제가 고 통사를 안으로 들인 일에 더 관심이 갔다. 예전이었다면 안으로 들이지 않고, 최소한 정사에 관한 논의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게 했을 터였다.
고 통사가 곧 원대로 지제고에 봉해지겠군. 결코 좋은 일이 아니야. 이런 외척은 내쫓아야 마땅하거늘. 이런 자들을 경성에 두는 것만으로도 화근의 싹이 될 터인데, 조정 일에 참여할 명분까지 주려 하다니, 폐하께서 아둔해지신 건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진소의 귀에 고 통사의 말이 조금씩 들려왔다.
“······서북 군마의 손실이 다소 줄었습니다.”
군마? 다소?
진소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게 무슨 희소식이라고.”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표정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폐하, 아직은 얼마 안 됩니다만, 새로 채택한 방안이 검증을 거쳤단 뜻이 아니옵니까. 본디 목감에서 매년 군마 삼백 필밖에 공급하지 못하는 데다, 군마의 손실이 크다 보니 늘 모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손실을 줄일 수 있다면, 군마 공급량에 변함이 없어도 전체적인 수는 늘어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서북의 기마병 역시 늘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폐하.”
고 통사가 말했다.
기마병!
군에 있는 장수들은 기마병을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에 능한 기마병이 워낙 적었고, 말이 귀하다 보니 더욱 그러했다.
서쪽 오랑캐의 기마병이 대단한 건 말 때문이었다. 오랑캐는 기마병 한 사람당 말을 서너 필 갖고 있는데, 이들은 한 필씩만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말만 충분히 공급된다면, 더 이상 서북 오랑캐가 우쭐댈 일이 없을 터였다.
군마 손실을 피할 방법을 찾았다니, 경사 중의 경사로다!
황제는 자세를 바로 했고, 진소 등도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물건이 무엇이오?”
황제의 하문에 고 통사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우연히 생각해 낸 거라 아직 정식 이름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군목사에 이름을 하사해 주시옵소서.”
대전에 있던 이들은 그 말에 속으로 욕을 해댔다.
정식 이름이 없긴, 기억이 안 나는 거겠지.
동시에 대신들은 고 통사가 본디 이 일을 아뢰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현을 청하고 난 후에야 황제가 기분이 안 좋은 걸 알고 임시방편으로 다른 일을 고한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말발굽에 편자를 댔으니 말편자라고 하면 되겠군.”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말편자 덕분에 정사를 논하는 회의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득의양양한 얼굴의 관원들이 고 통사를 에워쌌다. 진소가 삼사사를 불러 세웠다.
“군목사의 일을 삼사에서 왜 몰랐소? 저런 소인배가 아뢸 기회를 가로채게 하다니.”
진소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군목사에서 말똥 파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해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삼사사가 속으로 대꾸했다.
“가서 조사해 보겠습니다.”
지금 안다 해도 늦은 건 아니었다. 아뢸 기회는 고 통사에게 빼앗겼지만, 다른 공까지 선점하게 둘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