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39
교랑의경 539화
“거절하고 고 관인한테 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미 초대에 응했는데, 말에 신용이 없으면 안 되죠.”
주 낭자가 뒤지지 않는 기세로 대꾸했다.
“악역은 이 어미가 대신해 줄게. 네가 식언이나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을 게야. 내가 그 정 공자한테 가서, 네 잘못이 아니라고 잘 말해 주마.”
여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하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정 공자의 배짱이 얼마나 두둑한지 내가 한번 봐야겠구나.”
여인이 중얼거리며 방을 나갔다.
덕승루의 별실 안. 젊은 사내 몇 명이 정좌로 앉아 두리번거리며 방 안을 구경했다. 사내들의 얼굴에서는 숨겨지지 않는 기쁨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야, 문유. 자네가 우리를 여기로 초대하다니, 정말 대단한데?”
사내 하나가 정사낭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감탄했다. 정사낭이 어색한 미소를 보이면서 대답했다.
“아니 뭐, 앉아서 이야기도 좀 하고.”
정사낭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덧붙였다.
“칠현금 연주도 듣자고.”
사내들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더욱 기뻐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칠현금을 연주하는 기녀도 하나 부르겠다는 건가?”
덕승루를 방문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덕승루의 기녀들이 경성에서 으뜸이라는 것은 사내들도 소문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덕승루에서는 아무 기녀나 데려와도 그 가무와 칠현금 연주가 사람을 매혹할 정도로 가히 일품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물론, 기녀를 초대하는 비용 또한 그만큼 비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정사낭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대답을 하고는 불안한 기색으로 문가를 쳐다보았다. 긴 기다림 끝에 문이 열리자, 깜짝 놀란 정사낭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어느 분이 정 공자님이실까요?”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방 안으로 들어선 미모의 여인이 웃으면서 물었다.
저 사람이 정사낭이 초대한 기녀인가? 나이가 좀 있어 보이긴 해도, 역시 덕승루의 기녀답게 아름답네.
방 안의 사내들이 한껏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정 공자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젊은 데다, 지방 말씨를 쓰는 것을 보아하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여인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를 어쩐다. 공자님께 죄송해서 어쩌면 좋죠? 공자님이 고르신 주 낭자는 오늘 선약이 있어 여기에 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주 낭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깜짝 놀랐다.
그 유명한 화괴 주 낭자를 말하는 건가?
“이 녀석도 참, 아무나 고르면 될 것이지, 오자마자 무턱대고 귀한 화괴를 부르면 어떡해? 네가 무슨 수로 주 낭자를 초대한다고.”
한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정사낭에게 속삭였다.
정사낭은 그 사내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주 낭자를 초대했을 때는, 선약이 없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주 낭자는 이미 내 초대에 응했습니다.”
사내들은 일제히 경악한 얼굴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제가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죠. 주 낭자는 다른 약속에 가야 해서, 오늘은 도저히 정 공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웃음기를 거두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세상에 그런 도리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먼저 초대를 했고, 주 낭자도 제 초대에 응했다니까요?”
정사낭이 허리를 펴고 목청을 높였다.
얼씨구? 물러설 생각이 없다 이거야?
별실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정사낭을 따라왔던 사내들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정 공자님, 우리 솔직하게 얘기해요. 주 낭자가 공자님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거죠?”
여인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하더니 같잖다는 눈빛으로 정사낭을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설마······.
사내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저 녀석이 주 낭자와 일찍이 알고 있던 사이인가?
“주 낭자가 그 손님을 받고 싶지 않아서, 공자님을 방패막이로 이용하는 거지요?”
여인이 계속해서 물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난 그저 덕승루에 술을 마시러 온 것뿐인데, 왜 내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겁니까? 어서 주 낭자를 이 방으로 데려오면 그만인 것을.”
정사낭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여인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공자님, 제가 여기서 공자님 같은 분을 몇 명이나 봤을까요? 여인의 미소 한 번을 얻기 위해서 영웅이 미인을 구하는 연극을 펼치는 걸 셀 수도 없이 많이 봤어요. 잠깐 사내의 피가 끓을 때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답니다. 피가 끓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떨 땐 그 잠깐의 충동이, 평생 감당하지 못할 후환을 초래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덕승루에 처음 온 사내들은 여기까지의 대화를 듣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네. 정사낭 저 녀석이 기루에서 다른 사람과 화괴 다툼을 할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나?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화괴가 다른 사람보다 정사낭에게 더욱 마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농담을 하는 거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당최 못 알아듣겠으니, 어서 주 낭자나 빨리 내 앞으로 데려오란 말입니다.”
정사낭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강경하게 대답했다.
저 시골 촌뜨기 놈이!
여인은 화괴 출신인지라 젊은 시절부터 항상 사내들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왔다. 그러던 것이 나이가 들고 그 미모가 차츰 퇴색되자, 교방사로 들어와 기녀들의 교습을 담당하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내에게 무시당해 본 일이 없던 여인이었는데, 어디서 굴러들어온 새파랗게 젊은 시골 촌뜨기 하나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하며 입을 아프게 하자, 여인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공자님이 정 그렇게 제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겠다면,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여인이 돌연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앞으로 다시는 우리 주 낭자를 찾아오지 마세요!”
그러자 문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정사낭의 사환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감히 우리 관인께 말버릇이 그게 뭐요!”
관인?
여인이 정사낭을 쳐다보자 사환이 우쭐대면서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 우리 도련님이 이제는 나랏일을 하는 관인이다! 너같이 보잘것없는 늙은 교방사 기생 어미 따위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여인이 눈썹을 으쓱하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관인, 저희 덕승루에는 관인이 차고 넘쳐서, 굳이 관직을 들먹이면서까지 저를 겁주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정말로 겁을 주려거든, 자신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부터 잘 돌아보셔야지요.”
“어이, 우리 관인이 어떤 분인 줄 알아?”
사환이 머쓱해하며 화를 버럭 냈다.
같은 시간 호화스러운 상등 별실 안. 미인의 품에 기대어 있던 뚱뚱한 사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사내가 눈을 뜨자, 별실 안의 연주 소리가 뚝 끊겼다. 동시에 상석을 중심으로 양쪽에 나눠 앉아 장난을 치며 술을 마시던 사내와 기녀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어 별실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별실 안의 모든 이목이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은 어린 몸종에게 집중되었다.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주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 관인께 아뢰옵니다. 저, 저희 아씨께서는 이미 정 관인의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춘령이 불안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정 관인?”
사내가 하하 웃음을 터트리자, 다른 사람들도 그를 따라 웃었다.
“어느 정 관인 말이냐? 얼마나 대단한 사내길래 주 낭자의 선택을 받은 것이야? 나는 벌써 서너 번이나 주 낭자를 초대했는데, 어쩜 한 번을 오지도 않고?”
사내가 자신 앞에 놓인 술에 절인 과일 하나를 집어 들고는 손끝으로 과일을 으스러트렸다. 사내의 두꺼운 손가락 사이로 으깨진 과일의 즙이 뚝뚝 흘러내렸다.
어느 정 관인이냐고?
이번 과거에서 진사 급제한 강주 정씨, 정문유 말이다. 물론 그가 어느 가문 출신이고, 어떤 관직인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중요한 건 그의 성씨가 강주 정씨라는 사실이지. 그의 누이가 바로 강주 낭자라는 호칭을 가진 정 낭자고. 도교 이 진인의 수제자이자, 장강주와 같은 선상에서 언급되는, 귀판관마저 사지로 몰아 지방으로 좌천시킨 그 강주 정씨 여인 말이야.
춘령이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굳이 이런 말을 해 줄 필요는 없지.
혹시 모르지. 정사낭의 정체를 그쪽한테 알려 줘도, 정사낭 쪽에서 그쪽 기세에 눌려서 도망칠 수도 있잖아. 그럼 연극은 시작되지도 않을 거고, 나 또한 헛수고만 하게 될 뿐이야.
“그러게, 정 관인이라는 자가 누구길래 그렇게 대단해?”
별실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비아냥대면서 소리쳤다. 우수수 쏟아지는 질문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춘령의 몸이 떨리는 듯했다.
“소, 소인은 잘 몰라요.”
춘령이 말을 더듬으면서 고개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무튼, 아씨께서는 그분이 대단한 분이라고만 하셨습니다.”
‘대단한 분’이라는 칭찬은, 여인이 사내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상찬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내 앞에서,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여인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모욕적인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별실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단해?”
고 관인이 웃음을 멈추고 하인을 향해 손짓했다.
“내 명첩을 들고 가서 그 대단하신 정 공자님께 전하거라. 오늘 밤에, 내가 그의 주 낭자를 잠시 빌려 가겠노라고.”
“제가 이부(吏部) 관리도 아니고, 공자님의 장모도 아닌데, 공자님의 관직이 뭐든 제 알 바 아니잖아요.”
눈에 뵈는 게 없는 듯한 사환 때문에 부아가 치밀어오른 교방사 기생 어미가 눈썹을 높이 치켜뜨고 소리쳤다.
“저희 덕승루가 매일 접대하는 사람들이 바로 댁 같은 관인 나리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협박이 두려울 리 있겠어요?”
여인이 정사낭에게 삿대질을 하며 마지막 한마디를 날렸다.
“우리 덕승루는 댁 같은 관인을 접대할 수 없으니, 그만 나가고 다른 곳을 찾아보시지요!”
한낱 기생 어미한테 내쫓기다니!
별실 안에 있던 사내들은 귀까지 새빨개진 채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사낭, 사낭, 어서 가자. 역시 이런 곳은 오지 말았어야 해.”
사내들의 말을 들은 여인이 사내들의 차림새를 대충 훑어보았다. 가난하고 궁상맞아 보이는 사내들의 모습에, 그녀는 턱을 더욱 높이 치켜들고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러게요. 저희 덕승루가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죠. 아, 미리 물어보질 못했는데, 당신, 우리 아형을 초대할 돈은 있어요?”
여인이 냉소를 지었다.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개진 정사낭이 이를 악물며 좌불안석했다. 그때 갑자기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활짝 열렸다.
별실 안에 있던 사내들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문 앞에 선 여인은 가히 만개한 모란, 또는 흐드러지게 핀 작약에 비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화려한 색의 비단 치마를 입고,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장신구를 한 주 낭자의 모습은 인간계에 내려온 선녀와도 같았다.
“아형이 정 공자님의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오늘은 제게 선약이 있는지라 다른 날에 공자님을 즐겁게 해 드릴게요.”
주 낭자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더욱 다급해진 기색의 정사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답례했다.
“아, 그, 그게 아니라······.”
정사낭이 말을 더듬는 사이,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를 내며 문 앞에 멈춰 섰다.
별실 안의 사람들이 시선을 돌리자, 거만한 표정의 가노 한 명과 그의 뒤로 서 있는 어린 몸종이 보였다. 그 뒤에 선 춘령은 몹시 겁먹은 얼굴이었다.
여인은 가노를 보자마자, 냉소와 비아냥으로 가득 차 있던 표정을 싹 바꾸고 아첨의 미소를 보이면서 그를 맞이했다. 별실 안의 사람들을 쓱 훑어보던 가노가 한쪽에 서 있는 주 낭자를 발견했다. 일순간 그의 거만한 표정에 분노가 더해졌다.
“언니.”
춘령이 주 낭자 옆으로 달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주 낭자, 역시 여기에 있었군요.”
가노가 콧방귀를 뀌며 주 낭자에게 말했다. 주 낭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 했다.
“어느 분이 정 공자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