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36
선족에도 고족에도 속하지 않는 이 힘은 한제의 체내를 순환하더니 우렁찬 목소리가 됐다.
“꺼져라!”
비록 하늘과 땅을 뒤흔들 만큼 우렁찬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한제로부터 고도산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위압감이 발산됐다.
고도산의 위압감은 선강 대륙 최강자인 고도 대천존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니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고도산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부연 먼지가 흩날렸다. 산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진동이었다.
“끄아아아!”
회색 옷의 두 사내가 중첩하며 형성돼 달려들던 손바닥 근처, 회색 안개로 이루어진 머리가 한제 근처에 이른 순간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서 광풍에 휩쓸린 듯 순식간에 허무로 변해버렸고 동시에 손바닥은 뼈와 살이 찢기듯 붕괴했다.
이 엄청난 힘에 충격을 받은 듯 인영은 나가떨어졌고 허공에서 분리되자마자 두 사람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오래된 우물처럼 한없이 잔잔하기만 했던 그들의 얼굴 위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드러났고 무려 1만 척 이상 밀려난 후에야 멈춰 설 수 있었다.
고도산이 진동하던 그때, 정상의 탑에서는 검은색 커다란 손이 나타났다. 눈 깜짝할 사이 1천 척 정도의 크기로 불어난 그 손은 거대한 산처럼 한제를 짓누르려 했다.
이 산과 한제의 고함에 실린 선고력이 형성한 위압감이 고도산 위에서 그대로 충돌했다.
콰르릉!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검은색 손 모양 산은 격렬하게 진동하다가 나가떨어지더니 하늘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사이, 한제의 힘은 그의 체내에서 융합된 상태로부터 분리됐다.
이렇게 분리된 본원과 고족의 힘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며 한제 체내에 있던 한 줄기 선고력은 두 번째 순환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여전히 너무도 느려서 체내를 일순하려면 수십 년이 걸릴 것만 같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현라는 찬 숨을 헉 들이켰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없던 안개 속의 인영이 마침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올라와라. 네가 가진 혼혈을 각성시켜 줄 테니⋯⋯.”
한제는 창백한 얼굴로 말없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렇게 301번째 계단에 오른 순간, 체내의 한 방울의 혼혈은 그대로 녹아내려 사라졌다. 그의 육신에 완벽하게 융합된 것이다.
사실 지금 한제는 고도 대천존의 도움이 없더라도 그 혼혈을 체내에 완벽하게 융합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 혈맥의 유산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상태였다.
황궁의 초대
301번째 계단 위에 선 한제는 조용히 고도산의 정상을 향해 포권을 한 채 절을 올렸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고도 대천존.”
한제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과 고도 대천존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알기기에 상대의 매서운 으름장에도 공손히 작별 인사를 올린 것이다. 더욱이 그의 체내에서 선력과 고족의 힘이 융합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은 어쨌든 고도 대천존의 위압감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도 대천존의 의도와는 무관했을지도 모르나, 어쩌면 그의 암묵적인 도움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선강 대륙 최강자인 고도 대천존에게는 공손할 수밖에 없었다.
“3백 번째 계단에 이르면 떠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이제 가도 좋다.”
꽤나 고민을 한 것일까? 한참 뒤에야 탑 안에서 고도 대천존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제는 말없이 돌아서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라의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는 현라가 주위에 일어난 어렴풋한 파문을 거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만약 고도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공격에 나섰을 것이 분명했다.
“스승님⋯⋯.”
한제가 조용히 상대를 불렀다. 현라의 그러한 행동은 고족에 엄청난 거부감을 느끼게 된 한제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가자.”
현라는 한제를 가만히 보다가 방금 전 느꼈던 충격을 애써 억누르며 소매를 휘둘러 제자를 감싼 채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로 솟아올랐다.
두 사람이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지자 회색 옷을 입은 두 부상자는 기둥 위로 올라갔다. 복잡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던 그들은 곧 눈을 감고 다시 좌선하기 시작했다
정상의 탑에서는 불쑥 한숨이 흘러나왔다.
꼭대기 층, 안개로 모습을 감춘 인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가로 다가와 바깥의 하늘을 내다보았다. 그 시선은 현라와 한제가 떠난 쪽을 향해 있었다.
★ ★ ★
며칠 뒤, 한제와 현라는 도고 일맥의 도고 황성에 이르렀고 도고전이 있는 산 뒤편 나무 오두막에서 지냈다.
고도산에서 보고 겪었던 일들에 대해 현라는 캐묻지 않았고 한제도 설명하지 않았다. 마치 그런 일들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꼬박 한 달을 지나면서 현라의 마음속에서 그 사건은 점차 흐려졌다.
이 한 달 동안 한제는 폐관수련을 하듯 나무 오두막에서 좌선을 했다. 고도산에 가기까지 여러 곳을 방문해 본원들을 흡수한 덕에 지금 그의 본원의 힘은 전보다 한층 늘어나 있었고 수준 역시 정진한 상태였다.
체내의 본원과 고족의 힘도 본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본원은 진신으로 응집됐고 고족의 힘은 미간과 두 눈동자에 각각 아홉 개의 반점으로 나타나 있었다. 허나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이 선고의 힘을 순간적으로 융합시킬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힘과 위압감은 고도산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한제의 본원과 수준, 고족의 힘이 늘어남에 따라 융합에 걸리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대신 위력은 더욱 강해졌다. 언젠가 선고의 힘이 완전히 융합되는 날이 오면 한제는 진정으로 고도 대천존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한제는 진중한 표정으로 원통을 하나 소환하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뚜껑을 열었다. 원통에 담긴 많지 않은 액체에서 순수한 나무 본원의 힘이 짙게 풍겼다.
한제는 한 방울만 취해 체내로 스며들게 했다. 이 액체가 흡수된 순간, 한제 체내의 나무 본원은 빠른 속도로 증폭하기 시작했다.
사흘 뒤, 한제는 한 방울을 더 취했다. 체내의 나무 본원은 진신을 향해 더욱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보름이 지났을 때, 원통에 담겨 있던 모든 액체를 흡수한 한제의 몸에서는 오행 진신이 튀어나왔다. 오행 진신은 한제의 다섯 가지 색의 빛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그중 나무와 금속을 의미하는 빛은 다른 것들보다 조금 어두웠다. 하지만 나무의 본원을 의미하는 빛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고 며칠 뒤에는 물과 불, 흙 본원의 빛과 같은 밝기가 됐다.
순간 오행 진신은 몸을 훌쩍 날려 네 갈래의 인영과 한 덩어리의 빛으로 분리됐다. 네 갈래의 인영은 각각 물, 불, 흙 진신 그리고 나무의 진신이었다. 다만 네 개의 진신으로 둘러싸인 금속의 본원은 아직 진신으로 응집되지 못한 상태였다.
한제는 그 금색 빛 덩어리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금색 조각 하나를 소환했다. 선극검의 조각으로 함정에 빠졌던 선족 조성의 긴 거리에서 얻은 것이었다.
이미 제련했지만 완벽하게 융합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몇 달 동안 현라의 지도에 따라 흡수한 금속 본원의 힘을 이것과 엮어 오행 진신을 완성할 생각이었다. 금속의 본원까지 진신으로 응집하면 오행 진신의 위력은 대폭 상승할 것이다.
“이를 통해 수준이 증폭한다면 지금까지의 추측을 확인할 수도 있을 터!”
한제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입을 벌려 한 덩어리 금색 기운을 토해내 선극검 조각을 덮은 뒤 이를 금속 본원의 빛 덩어리에 집어넣었다.
눈 깜짝할 사이 한 달이 지났다.
한제와 현라가 도고 황성으로 돌아온 지도 두 달 반이 지난 상태였다.
그동안 한제는 나무 오두막에 틀어박혀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현라는 두 번을 방문했으나 집 밖에서 한참이나 제자를 살펴보다가 아무런 위험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떠나갔다.
이른 아침, 하늘에서 내려온 첫 번째 햇살이 대지에 떨어지며 검은 장막을 거두고 온기로 이 도원경과 같은 산골짜기를 감쌌을 때, 옥패 하나가 도고전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나무 오두막 주위를 몇 바퀴 돌던 옥패는 이내 문밖 풀밭에 떨어졌다.
잠시 후, 이 옥패는 바르르 진동하다가 한 줄기 빛이 되어 오두막 안으로 날아들더니 덤덤한 얼굴로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제에게로 향했다.
한제는 옥패를 쥐고 신식으로 살폈다. 소리 전달 옥패로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도고 황궁에서 온 옥패로 한제에게 황후 책봉식의 참가를 요청하는 초대장이었다.
“도고 황존이 열흘 뒤 황후 책봉식을 연다?”
한제는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옥패로부터 신식을 거두었다.
“스승님의 허락이 있었으니 온 것일 테지. 그렇다면 이 책봉식은 분명 도고 일맥에 매우 중요한 행사일 터.”
한제가 중얼거렸다.
“도고 황족은 수백 년간 비를 찾아다녔어. 마침내 원하던 사람을 찾은 모양이군. 허나 과연 내가 참가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지금은 금속의 본원을 응집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였기에 한제로서는 가능한 한 참가하고 싶지 않았다.
초대장 옥패를 내려놓은 한제는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는 도고 황존의 황후 책봉식보다 수련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금속 본원의 진신은 며칠 안에 응집될 것이다.”
한제의 두 눈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어려 있었다. 추측과 달리 오행 진신이 완성된 후에도 자신의 수준이 여전히 공겁기 후기에 머물러 있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그럴 경우 당분간은 나머지 본원을 진신으로 응집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삶과 죽음, 원인과 결과 진실과 거짓에 이은 네 번째 허상의 본원을 깨달아야만 했다.
허나 허상의 본원이란 원체 모호하고 흐릿해 운과 깨달음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 기회를 얻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수천 년이 지나도 단서조차 잡지 못할지도 모른다. 금색 안개로 휩싸인 빛 덩어리를 바라보는 한제의 눈에 기대감과 함께 걱정이 어려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참 뒤, 작게 한숨을 내쉰 한제는 금빛 덩어리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이미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들인 상태였다. 수준이 높아질지 아닐지는 곧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나 나무 오두막 바닥에서 번득이는 빛과 함께 진이 하나 나타나 가동됐다. 허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빛 역시 밖으로는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는 한 걸음 내딛어 진 안으로 사라졌다.
이 진은 나무 오두막으로부터 10만 척 아래의 지하와 연결되어 있었다. 진흙으로 가득한 지하에는 거대한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한제가 나무 오두막에서 폐관수련을 시작한 지 닷새째 되는 날 만든 것이었다.
폭이 수천 척에 달하는 거대한 동굴은 흑백의 빛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흑백의 태양 하나가 떠 있었다. 윤곽만 존재할 뿐이었지만 분명 한제의 대천존 태양이었다.
이 태양 아래에는 두 귀를 잃고 정수리에 한 줄기 깊은 균열이 있는, 길이가 1백 척 정도 되는 거대한 머리가 있었다. 선조의 머리였다.
동굴 사방은 한제가 배치해둔 수많은 금제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제의 금제는 더없이 강력해 약천존조차 감지할 수 없었고 대천존이라 해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한제 체내의 선고력으로 형성한 금제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대천존 태양을 자양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한제는 대천존 태양이 선조의 머리를 완전히 녹여내 흡수한다면 윤곽만 존재하는 현재 상태를 벗어나 단단히 굳어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선조의 머리 앞에 가부좌를 튼 한제는 한 줄기 푸른색 기운을 토해냈다. 이 기운은 곧장 돌진해 거대한 머리의 칠규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선조의 머리는 바르르 진동하면서 대량의 금빛을 발산했다. 금빛은 곧장 대천존 태양에 흡수됐다.
근 3개월 동안 이러한 흡수가 계속됐지만 선조의 머리는 녹여내기가 쉽지 않아 아직도 완전히 융합되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 후, 가부좌를 튼 한제가 두 눈을 번쩍 뜨며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허약한 영혼 한 줄기가 깃든 어두운 금색 빛이 그의 손바닥에서 확산됐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한제의 손에 꽉 붙들려 있는 영혼은 침착해 보였지만 바짝 졸아든 두 눈에는 신중한 빛이 어려 있었다.
선황 연도진의 영혼이었다.
선황의 영혼은 한제의 손바닥 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감긴 눈을 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그 영혼에서는 어마어마한 선기가 맴돌았고 대천존의 위압감을 발산했다.
하지만 이 영혼을 맴도는 선기는 순수하지 않았고 어둡기까지 했다. 두 눈을 꼭 감은 영혼이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끼고 있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강력한 위력의 저술이로군.”
한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선황의 영혼에 끊임없이 봉인을 쏟아 부으면서 자신의 수준과 선황 영혼의 힘까지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술의 위력을 몰아낼 수는 없었다. 다만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해 영혼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본래 이 영혼의 위압감으로 내 체내 선고의 힘을 강화할 생각이었으나 이제 보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허나 이 영혼은 꽤나 쓸모가 있겠어.”
한제는 안타깝다는 듯 대천존 태양을 바라보았다.
“저술의 힘이 너무 강해 아쉬울 따름이야. 저술을 완전히 제거할 수만 있다면 선황의 영혼을 대천존 태양에 녹여 넣고 그 영혼으로 선조의 머리를 삼키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왼손으로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이내 눈을 번득이더니 결인을 그린 왼손으로 선황의 영혼을 가리켰다. 그러자 선황의 영혼은 바르르 떨다가 입을 쩍 벌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 순간, 동굴 안의 금제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