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6
창백한 얼굴의 장호는 구슬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감격한 듯 한제를 바라보다가 얼른 유 사형 앞에서 빠져나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겁한 유 사형은 곧 기를 쓰고 발버둥을 쳤다. 한제의 이마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신호였다. 인력술로 살아 있는 사람을 붙들어 맨 것은 처음이었고 상대가 맹렬하게 발버둥을 치고 있어 더욱 힘들었다. 한제의 몸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장호의 몸에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한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놓여서일까? 그 순간 인력술이 약간 풀렸고 속박에서 금방이라도 벗어날 것 같은 유 사형의 모습에 장호의 얼굴은 다시 굳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장작을 패던 도끼를 집어 들고는 유 사형의 앞에 섰다.
그러자 유 사형은 두려운 눈빛을 하더니 더욱 거세게 발버둥을 쳤다.
장호는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핍박한 걸로도 부족해 감히 내 가족들까지 죽이겠다고? 나를 이리 독하게 만든 건 네놈의 그 악독함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장호야, 안 돼!”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상한 한제는 다시 마음이 흐트러졌다. 그러자 인력술의 효과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허나 유 사형이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도끼가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렇게 수박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유 사형의 몸이 몇 번 경련하더니 이내 움직임이 멎었다.
장호의 손에 들려 있던 도끼가 바닥에 떨어졌다. 피가 낭자한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복잡했다.
한제 역시 멍하니 서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된 시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참 뒤에야 그는 깔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장호야, 너⋯⋯.”
고개를 들어 한제를 바라보던 장호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제야, 너도 봤지?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게 아니야. 만약 네가 아니었다면 난 벌써 저 사람에게 죽었을 거라고! 이건 저 자가 나를 핍박했기 때문이야!”
한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던 장호가 무언가 결심한 눈빛으로 유 사형의 시체 옆으로 다가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곧 작은 꾸러미를 발견했고 그것을 꺼내서 열었다. 안에는 수백 장의 부적과 한 권의 책등이 끈으로 튼튼하게 묶인 책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장호는 그것을 한 번 훑어본 뒤 품 안에 챙겨 넣었다. 이어 방을 구석구석 뒤지더니 침상 밑에서 비밀 격벽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노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한제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제야, 오늘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나는 이제 대산파에 머물지 못할 거야. 저 자가 이 부적을 받았다는 사실을 장로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려고 나와 가족까지 죽이겠다고 한 걸 보면 아마 엄청난 보물일 거야. 내가 지금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구나.”
말을 마친 장호는 노란색 종이를 건넸다. 하지만 한제는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어? 지금 넌 사형을⋯⋯.”
장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지 마. 지난 몇 년 동안 난 참을 만큼 참았어. 네가 내 친구라면 이 부적을 받아줘!”
한제는 괴로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파에서도 유 사형을 죽인 게 나라는 걸 금방 알게 될 테니까 너에게는 피해가 없을 거야. 난 빨리 대산파를 떠나야겠지. 사실 이 넓은 천하에서 평생 수련생으로만 살기도 싫었어.”
장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방을 둘러본 뒤, 한참 후에야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 ★ ★
한제는 장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장호는 대산파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그런 친구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이 부적이 사고의 근원이야!”
그런데 손에 들린 노란색 종이를 바라보던 한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는 이 부적이 예사롭지 않음을 깨달았다. 생김새는 천리부와 다르지 않았으나, 훨씬 강력한 영기와 함께 약간의 위험한 기운도 느껴졌다. 보고 있노라니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떤 물건인지는 모르겠으나 보물은 아닐 듯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한제는 부적을 챙기고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를 처리하지 않으면 장호는 금방 붙잡힐 것이었다.
다행히 저물대는 시체 한 구가 충분히 들어갈 정도로 컸다. 한제는 방 구석구석 혈흔을 닦아낸 뒤, 깊은 산 속 계곡 아래로 시체를 던져버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방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지만 애써 생각을 접고는 그 노란색 종이를 꺼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부적은 재질도 달랐다.
한제는 잠시 망설였다. 이 부적의 정확한 용도가 궁금했으나, 무분별하게 이슬을 마셨다가 죽을 뻔했던 경험 이후로는 선인들의 물건에 대한 경계심이 커진 상태였다. 무엇이든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이 부적에서 은근히 흘러나오는 위험한 기운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망설이던 한제는 나중에 다시 연구해보기로 하고는, 일단 부적을 저물대에 넣었다. 그리고 석주를 꺼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모든 기운을 호흡하는 데만 쓰지 않고 약간의 짬을 내어 인력술을 훈련했다. 실제로 인력술을 사용해본 후 그 실용성을 깨달은 한제는 이 법술을 좀 더 열심히 연마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우선 멀리 떨어진 조롱박을 인력술로 들어보았다. 처음에 조롱박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이렇게 가벼운 조롱박은 몇 차례 연습만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한제는 한 번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했다.
잡무
한제는 인력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기로 했다. 아무리 그 위력이 대단하다 한들, 결정적인 순간에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한참을 훈련하자 열 번의 시도 끝에 서너 번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 정도로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훈련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몸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잠시의 시간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한제는 눈을 뜨자마자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켜 영기를 충전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깊은 숨을 내쉬며 머릿속으로 의 내용을 되뇌었다.
에는 단계마다 굉장히 중요한 두 줄의 구결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곧 그 단계를 정복하는 관건이었다. 응기에는 총 15개의 단계가 있는데 자연적으로 단련되는 1단계를 제외한 나머지 14단계를 여는 구결들이 적혀 있었다. 1단계 수련을 다 마치고 2단계 수련 내용을 다 파악하고 있다 해도 2단계를 여는 구결을 현실에서 가동시키지 않는다면 1단계에 머물 뿐이었다.
속으로 묵묵히 구결을 외자 온몸의 영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변화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영기는 강렬해지더니 결국에는 끓는 물처럼 한제의 온몸을 빠르게 맴돌았다.
그러다 영기가 바닥나면서 서서히 온몸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림, 저림, 간지러움, 아픔 등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전신이 만신창이가 됐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 모든 상황은 바로 영력 때문이었다.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각 단계를 여는 구결이 항상 성공적으로 발동되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자질과 영기, 운 등등이 모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어떤 사람은 한 번에 성공하지만 어떤 사람은 수십 차례, 수백 차례 시도해도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한참 뒤에야 여러 느낌들이 천천히 흩어져 사라졌고 한제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 무렵 체내의 영기는 남김없이 다 빠져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한제는 을 통해 영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좌선 한 번이면 금방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2단계를 여는 데 실패했지만 한제는 낙심하지 않았다. 그저 한 번의 시도에 불과했다. 현재 자신의 체내에 있는 영기로 2단계에 진입하는 것이 역부족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1단계의 수련에 막 성공한 상태였다. 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한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에 매진했고 그러자 그의 체내에는 영기가 조금씩 쌓여갔다. 인력술의 성공률 역시 조금씩 높아졌다.
그러는 동안 2단계를 여는 구결도 여러 차례 시도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보름이 지난 어느 날, 한제는 꿈속으로 들어가기 전 약간의 여유가 생긴 틈을 타 다시 한 번 2단계로 진입을 시도했다. 몇 번째 시도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한 시진 뒤, 체내의 영기를 모두 소진한 한제는 피곤한 표정으로 눈을 뜨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또 실패구나. 2단계로 진입하기는 너무 어려워!”
그 순간, 한제는 밖에서 기척을 느꼈다.
“이 사제, 나와 보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검은색 옷을 입은 냉담한 표정의 스물 후반 정도 나이의 청년이 서 있었다. 그리고 상대의 얼굴과 옷을 확인한 한제는 깜짝 놀랐다.
‘검은색 옷!’
그는 대산파 입문 시험이 있던 날 자신을 데려온 사람이자 낭떠러지에 떨어진 자신을 찾아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당시 그는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몇 개월 만에 본 청년은 검은색 옷을 입을 수 있는 단계로 승급한 것이었다.
★ ★ ★
제자들이 입는 자주색, 검은색, 흰색, 붉은색 옷 중 검은색은 가장 높은 수준을 의미했다. 그의 수준이 정확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검은색 옷을 입은 자였기에 한제는 예를 갖추었다.
“수련생 이한제가 장 사형을 뵙습니다. 승급을 축하드립니다.”
장 사형은 한제를 힐끗 쳐다보더니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달에 응기 5단계에 진입했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네 도움도 있었다. 만약 너를 발견했을 때 봤던 그 낭떠러지의 구멍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빨리 승급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흠칫 놀란 한제가 물었다.
“낭떠러지의 그 바람을 빨아들이는 구멍이 수련에 도움이 된 겁니까?”
장 사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응기 4단계의 끄트머리에 이르면 그곳에 가 보거라. 때가 되면 자연히 그 효과를 알게 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제, 네 타고난 자질이 평범한 것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하지만 이미 대산파의 정식 제자가 되었으니,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이다. 지금 체내에 영기가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응기 1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모양이군. 현재 정식 제자들 중 1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것은 너 하나뿐임을 명심해라.”
한제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형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겨, 수련에 더 많은 노력을 들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른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장 사형께서는 여기까지 어인 일이신지요?”
장 사형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별일이 있는 건 아니고 잡무처의 어느 기명 제자가 실종되었다는데 누군가가 그날 네가 그곳을 지나는 것을 봤다더구나. 그 일에 대해 물으러 왔다.”
이미 이런 상황에 대비하고 있던 한제는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일은 저도 기억납니다. 평소 잡무처에 잘 가지 않는데 그날은 그 기명 제자가 제게 불손한 말을 했기에 한마디 해주러 갔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날 따끔하게 혼낸 것에 상심해 하산한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장 사형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버르장머리 없는 수련생이군. 장로님과 몇몇 사숙(師叔)들과 협의를 해봤는데 잡무처를 수련생에게 맡겨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해서 정식 제자에게 그 일을 맡기려고 했는데 모든 정식 제자들이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바쁘다며 원치 않더구나.”
한제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 일을 제게 맡겨주십시오.”
장 사형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