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97
사실 그 여인들이 한제를 곁눈질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한제는 그녀들이 보기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매력을 풍기는 사내였다. 비록 그 외모는 평범했지만 그 몸에서 풍기는 묘한 느낌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한제는 커다란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4백 년 만에 누리는 평화였다.
밤하늘에 총총 떠 있는 빛들을 보며, 이제 그것들이 그가 밟고 있는 것과 같은 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모두 고대 신의 기억의 유산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당시 서사가 하늘을 가로지르지 않고 항상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마음이 평화로워지자 한제 주변의 영력은 다시 천천히 끓어오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한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체외에 자리한 붉은 물질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 붉은 물질은 그의 평화로운 심리 상태에 따라 살짝 흩어졌다. 한제는 만약 줄곧 이렇게 평화로운 마음가짐이 계속된다면 얼마 뒤에는 체외에 있는 붉은 물질이 모두 흩어져 사라져 버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이것이 자신이 지난 4백 년간 살인을 저질러오면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전에도 느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 물질이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면 화신기에 오르는 데에는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왠지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때, 체외의 붉은 물질이 갑자기 요동치더니 천천히 응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10분의 1정도 축소한 뒤에는 어찌된 일인지 더 이상 응결되지 않았다.
다시 시험을 해보려던 차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갓 스물쯤 됐을 법한 여인이 손에 훈제 돼지고기와 술주전자를 들고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한제의 앞에 당도한 소녀는 음식을 놓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제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그 소녀는 낮에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계집종이었다.
미소를 지으며 술주전자를 들고 신식으로 살핀 한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성분을 모두 살핀 뒤에야 술을 마셨다.
홧홧하고 얼큰한 느낌이 목을 타고 배로 내려갔다. 4백 년 동안 술을 먹은 적은 손에 꼽혔다. 그는 옛날에 넷째 작은아버지가 집에 방문할 때에나 술을 마시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곁에 붙어 앉은 한제는 아버지의 술을 한 모금씩 몰래 맛보았다. 그러다가 얼굴이 새빨개지면 아버지와 넷째 작은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었다.
슬픈 표정으로 한제는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앞에 있던 계집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저쪽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곧장 대답하며 예쁜 눈으로 한제를 힐끔 보고는 자리를 떴다.
한제는 이미 곡식조차 먹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일반인들의 먹을 것은 그에게 아무런 유혹도 되지 못했다. 훈제 돼지고기가 눈앞에 있었지만 건드리지도 않고 술만 들이켰다. 어느새 술주전자는 텅 비었다.
깊은 밤이었다. 마차 행렬을 지키는 사내들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껄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한제는 입가에 가만히 미소를 띠었다.
심지어 몇몇 사내들은 술에 취한 건지 담이 더욱 세져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구애를 하기도 했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째서인지 한제의 머릿속에는 언젠가부터 이모완이 떠올랐다.
그때, 여흥이 술주전자 두 개를 들고 곁으로 다가와 하나를 건넸다. 그리고 한제의 곁에 앉아 웃으며 말했다.
“그 버들잎, 신기하더군요. 아가씨께서 벌써 훨씬 나아지셨답니다. 자 한 잔 하시죠!”
말을 마친 그가 술주전자를 기울여 한 잔 따라냈다. 하지만 주전자 째로 마시는 한제의 모습을 멍하니 보더니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잔에 든 술을 마셔버린 뒤 한제처럼 술주전자 째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낮에는 계집종에게 병이 났다고 하더니 왜 이제는 아가씨로 바뀐 겁니까.”
한제가 슬쩍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여흥은 난감한 듯 얼굴이 붉어져서는 허벅지를 두드리며 말했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게 돼 죄송합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수도에 가서 무슨 문제가 생기거든 천남(天南) 상점으로 와 저를 찾으십시오. 힘이 닿는 대로 도와드리겠습니다.”
한제는 피식 웃으며 더는 아무 말도 않고 천천히 술을 마셨다.
여흥은 한제가 비워버린 두 개의 주전자를 보며 다소 놀란 눈치였다.
“술이 세군요. 밤도 깊었고 마냥 앉아 있기도 무료하니 제 형제들과 함께 이야기나 나누시지 않겠습니까?”
무의식적으로 거절하려던 한제는 이내 생각을 바꾸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는 여흥을 따라갔다. 몇몇 사내가 모닥불을 둘러싼 채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여흥은 막 허풍 가득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사내의 다리를 걷어차며 웃었다.
“이오수, 청분루(靑粉樓)의 도홍이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다. 이번에 돌아가면 꼭 도홍이를 찾아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확인할 것이다.”
이오수라 불린 사내는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며 웃었다.
“가보라고. 너야 워낙 일 치르는 속도가 빠르니 난 네 다음이라도 충분해.”
그의 말에 사내들이 와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흥은 욕을 몇 마디 지껄이며 자리에 앉았다. 한제도 그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주위의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새삼스러운 느낌이었다. 이들은 한제가 숨 한 번만 내쉬어도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나약한 자들이었지만 이들이 누리는 흥이나 즐거움을 한제는 누릴 수 없었다.
그날 밤, 한제는 적지 않은 술을 마셨다.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주위의 사내들과 점점 친밀해져 갔고 술잔을 주고받는 횟수와 웃음도 많아졌다. 나중에는 다소 대담한 여인들도 술판에 합류했다.
그중에는 아까 한제에게 술을 가져다준 계집종도 있었다. 그녀는 예쁜 눈으로 자꾸 한제를 곁눈질했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새벽이 돼서야 하나둘 취해 잠이 들었다. 여인들은 마차로 돌아가 옷도 벗지 않고 잠을 청했다.
경계를 맡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잠들었다. 모닥불에서 나무 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오히려 자장가 같았다.
한제는 자리에서 근처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처럼 가진 평화롭고 즐거운 시간에 잠시 자신이 수련자라는 사실을 잊기까지 했다.
그는 눈을 감고 체내를 살폈다. 체내의 경지는 어느새 원영기 초기를 돌파해 중기에 이르러 있었다. 이미 원영기 초기의 절정에 이르러 있었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중기에 접어들게 되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하지만 체외의 붉은 안개는 약간 흩어져 있었다. 한제는 고민에 빠졌다. 만약 이 붉은 물질이 흩어져버린다면 언젠가 후회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그것을 응결시키기 시작했다.
한제가 붉은 안개를 응결시키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다. 모기들이 앵앵대는 소리, 잠든 사내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끄트머리가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며 밤의 장막을 몰아냈다.
한제는 동쪽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순간 일반인으로서는 알아챌 수 없는 두 갈래의 보라색 기체가 그의 콧구멍을 통해 들어가 체내를 한 바퀴 돌아서는 입을 통해 나왔다. 이를 반복하자 전신이 상쾌해졌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마음이 어느 정도 평화로운 상태에 이르러야만 이런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듯했다.
하룻밤 사이에 체외의 붉은 안개는 또다시 10분의 1 정도 수축한 상태였다. 짧은 시간에 될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한제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 사람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시종일관 마차를 수행하던 쪼글쪼글한 얼굴의 노인이 마차에서 내려 깊은 숨을 몇 번 들이마시더니 공터에서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한제는 그의 행동을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그 동작들에는 공격력이라고는 없었지만 모두 몸을 강건하게 하는 작용을 했다. 연속적으로 해나가다 보면 분명 그 효과는 놀라울 터였다.
한참 뒤 노인은 동작을 마친 뒤 긴 숨을 토해내며 잠시 망설이다가 한제에게로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에는 잘 쉬셨습니까?”
한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 버들잎, 어디에서 찾으신 겁니까?”
“길에서 주웠습니다.”
한제가 답했다.
노인은 흠칫 놀라더니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운이 좋으시군요!”
그 후로도 그들은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었지만 아무리 변죽을 두드리고 찔러보아도 한제의 입에서 중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노인은 한숨을 내쉰 뒤 자리를 떠났다.
사실 나이만 따지자면 한제가 노인의 몇 배는 살아왔을 것이다. 아무리 노련하게 떠보는 질문을 해봐야 한제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마차 행렬을 따르며 한제는 서서히 이 일반인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며칠이 흘렀고 그동안 그 계집종은 시시때때로 한제를 찾아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매번 그럴 때마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제는 속으로 웃었다. 그녀의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했다. 허나 한제는 이모완을 제외한 어떤 여인에게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날, 수도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4성 수련국에 기거하는 일반인들의 도시는 분명 화려했지만 한제의 눈에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만약 그 성에 영기 소용돌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한제는 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한제는 신식을 펼쳐 수도 성을 대략 파악했다. 그 성에는 총 아홉 개의 영기가 존재했다. 한데 그 영기 소용돌이를 발산하는 것은 수련자가 아니라 높이 솟은 아홉 개의 검은색 원기둥이었다. 그 기둥의 크기에 따라 발산되는 영력의 세기가 달랐다. 여덟 개의 기둥에서 발하는 영기 소용돌이를 합쳐도 가장 큰 기둥에서 발산되는 영기 소용돌이 하나보다 작았다.
그러나 아홉 개의 기둥 모두 매우 굵어서, 가장 작은 것도 열 사람이 손을 맞잡아야만 둘러쌀 수 있었다. 가장 큰 기둥은 1백 명이 둘러쌀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아홉 개의 기둥 안에는 모두 누군가가 앉아 있었고 밖에는 신식으로 탐색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진은 한제 입장에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기둥 안의 사람들은 모두 수련자로 그중 경지가 가장 높은 자는 결단기 후기, 가장 경지가 낮은 자는 축기 후기였다.
이 특이한 건축물에 상당한 흥미를 느낀 한제가 아홉 개의 검은 기둥을 힐끔거리자 어느새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된 여흥이 조용히 말했다.
“한제야, 뚫어져라 쳐다보면 안 돼.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골치 아파지거든.”
한제는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여 형, 저 검은 기둥은 대체 뭡니까?”
여흥은 부러움이 깃든 눈으로 소리죽여 말했다.
“저건 선목(仙木)이라는 거야. 여기 수도는 선인들의 비호를 받고 있지. 황상께서 온 나라의 공인(工人)을 불러모아 선인들의 요구에 따라 만든 것이 저 아홉 개의 선목이야.”
“선목⋯⋯.”
한제가 약간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선목 안에는 선인이 들어 있어. 내 아버지께서는 젊은 시절 직접 그 안에서 선인이 날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하셨지.”
여흥의 목소리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선인을 본다는 것이 대단한 자랑거리인 듯했다.
관직에서 물러나다
한제는 문득 여흥의 아버지가 보았다던 그 선인이 자신을 본다면 공손하게 엎드려 선배님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여흥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때도 자신을 지금처럼 편하게 대할까? 그런 생각에 빙긋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그는 웃음이 많아졌다.
수도의 남쪽과 북쪽 사이에 놓인 부교(浮橋) 위에서 한제는 여흥 등과 작별을 했다.
여흥은 한제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마치 오랜 지기처럼 대했고 가슴을 두드리며 만약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꼭 자신을 찾아오라고 당부했다.
한제에게 말을 빼앗긴 손두식도 지난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정이 들었는지, 만약 누군가 한제를 괴롭힌다면 자신이 처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마지막으로 마차 안의 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그의 뒤로는 얼굴에 하얀 면사를 드리운 여인과 계집종이 있었다. 한제를 바라보던 계집종의 얼굴에 슬픈 빛이 드리웠다.
노인은 앞으로 나와 한제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굴에 면사를 드리운 여인은 제자리에서 한제를 향해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마차로 돌아갔다.
계집종은 하얀 면사를 드리운 주인과 몇 마디를 나누는가 싶더니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한제에게 주머니를 하나 건넸다.
“아가씨께서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이 안에는 금 열 냥이 들어 있어요. 치료비예요.”
한제는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었다. 돈을 만져본 것은 4백 년 만이었다.
한제는 포권을 취한 뒤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가 한참 멀리 떠난 뒤에야 계집종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차로 돌아갔다. 마차 행렬은 부교를 따라 남쪽 성으로 진입했다.
손에 쥔 열 냥의 금을 만지작거리며 한제는 성 안으로 향했다.
수도는 과연 천자(天子)가 생활하는 곳답게 다니는 사람도 많고 길 양편으로는 점포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