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08
“잊지 않았습니다. 그날로 사부님께서는 저를 제자로 거두어 주셨지요.”
큰 귀의 수련자는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자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손에 들린 사탕을 본 어린 수련자는 어렸을 때의 추억들을 천천히 떠올리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사탕을 아주 조심스럽게 저물대에 넣었다. 평생 간직할 생각이었다. 사부님께서 사주신 거니까.
이들이 한제가 사는 골목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진 후였다. 하지만 길 양편으로는 빛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한편, 서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잠시 멍한 상태로 있던 그는 사방을 살피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제를 보고 얼른 자리에 꿇어앉아 감격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제는 서도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지난 16년 동안의 인연 때문이야. 가보게.”
서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제를 향해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가게 문을 밀어 열었다.
그때, 한제가 미간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서도 돌아오게. 문은 닫을 필요 없네!”
서도는 흠칫 놀라더니 한제가 시키는 대로 문은 열어둔 채 돌아왔다.
“한쪽으로 비켜 있게. 손님이 왔군.”
한제는 술주전자를 들며 덤덤하게 말했다.
서도는 굳은 얼굴로 한제 곁에 와서 섰다. 그리고 번득이는 눈으로 가게 대문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큰 귀의 수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는 붉은 옷의 어린 수련자가 붙어 있었다.
서도의 눈이 다시 겁에 질렸다. 단번에 그 큰 귀의 사내가 세자를 겁박하여 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자임을 알아본 서도는 두려움에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한제를 보고는 물러나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참아냈다.
어린 수련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사부님, 저자입니다! 저자가 저를 다치게 했습니다!”
한제를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외친 붉은 옷의 수련자는 곁눈질로 자신의 사부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사부는 자신이 가리킨 사람이 아니라 주위에 가득한 조각상들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한제는 말없이 여유롭게 술을 들이켰다. 두 사람을 훑어보던 시선도 거둔 상태였다.
필연적인 백 년 안의 죽음
조각상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피던 큰 귀의 수련자는 마지막으로 백운종의 중년 문인과 노파의 조각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그 두 조각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마치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한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도우, 내게도 한 잔 주겠나?”
큰 귀의 수련자는 온화한 목소리로 저물대에서 잔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한제는 술주전자를 앞으로 휙 던졌다. 그 술주전자를 받아든 큰 귀의 수련자는 자신의 잔을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더니 진심으로 감탄한 듯 말했다.
“맛이 정말 좋군!”
한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음에 든다면 그 술주전자에 째로 드리지.”
큰 귀의 수련자는 하하 웃으며 거절하지 않고 또 한 잔을 따라 마셨다.
한참 동안 술맛을 음미하던 그가 말했다.
“대단한 경지이군. 나보다도 위인 것 같은데 인간 세상에서 지내면서 일반인이 될 생각을 하다니, 감탄했소!”
오른손을 휘저어 또 하나의 술주전자를 소환해내 과일주를 마시던 한제가 말했다.
“도우는 제자를 이용해 화범(化凡)을 하고 있군. 나와 조금 다르긴 하나 스승으로서, 아버지로서 천도를 깨닫고 있으면서 뭘 부러워하는 겐가?”
큰 귀의 수련자는 기이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는 모양이군. 오늘 이 녀석의 말을 듣고 짐작은 했지만 정말 수도 안에 나 외에도 화신기에 이를 준비를 하는 자가 있을 줄이야.”
한제는 빙그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우,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그 아득하고 흐릿한 화신기 경계에 이를지 시합해보는 것이 어떻겠나?”
큰 귀의 수련자가 한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한제는 미묘한 표정으로 큰 귀의 수련자를 향해 말했다.
“시합을 했다가 내 평생 화신기에 이르지 못하게 될까 걱정스럽군. 도우, 방금 그 말, 여러모로 위험한 말이네.”
큰 귀의 수련자는 하하 웃으며 소매를 휘두르더니 포권을 취했다.
“수도 안에서 도우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운이 좋군! 나는 주무태라 하네. 도우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한제!”
한제는 또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도우, 1백 년 안에 자네는 화신기에 이를 것이라 보네. 미리 축하하지!”
주무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제는 덤덤한 눈빛으로 말했다.
“축하가 너무 이르군. 한데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1백 년 안에 화신기에 이르건 그러지 못하건 자네의 제자는 그 안에 반드시 죽을 것 같네만!”
주무태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붉은 옷의 수련자는 발끈했으나, 사부가 그와 상당히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울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어린 수련자의 수준으로는 이 둘 사이의 대화에 담긴 날카로운 기운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주무태는 이 가게에 들어왔을 때부터 겉으로는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줄곧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위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한제와 시합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화신을 위해서는 화범, 즉 일반인이 되어야 했는데 이는 천도를 깨닫는 방법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니 시합을 하게 되면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어 한제는 화신기에 이를 가능성이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평정심을 유지한다 해도 화신기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한제에게 속을 간파당하자 주무태는 작전을 바꾸어 백 년 안에 화신기에 이를 수 있을 거라며 축하했다. 이 역시 음험한 뜻이 깃든 말이었다.
그 말은 당시의 그 저급한 노인도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노인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실력자였기에 그의 말이 기분 나쁘기는커녕 반드시 그 말대로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허나 같은 말이라도 주무태의 말에 담긴 의미는 전혀 달랐다.
이를 간파한 한제가 여유롭게 넘겼는데도 집요하게 다시 시합을 걸어오는 상대의 말에 더는 참지 못하고 한제는 반격을 던졌다. 우선 1백 년 안에 상대가 화신기에 이를지 어쩔지는 모르겠다는 말을 던짐으로써 상대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한제의 진짜 공격은 바로 다음에 이어진 말이었다.
“1백 년 안에 네 제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는 주무태와 그의 어린 제자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노린 공격이었다.
주무태는 사제지간의 정을 깨달음으로써 화신기에 이르려 하고 있었다. 생각으로서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으로 제자를 받아들이고 정으로써 교육하고 은혜를 베풂으로써 상대에게 존경심을 받으려 했다. 이 모든 것이 화신기에 진입하기 위한 그의 수단이자 방법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경지를 깨달아 화신기에 이르는 날은 곧 그가 자신의 제자를 죽이는 날이 될 터였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제자를 죽여 심신으로 기르고 받아들인 제자를 잃음으로써 슬픔이라는 감정을 깨닫고 화신을 하려던 것이다. 정이 넘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무정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무정함 속에는 지극한 정성이 배어 있었다. 이는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최소한 한제는 그랬다.
때문에 그의 마지막 말이야말로 진정한 반격인 셈이었다. 백 년 안에 반드시 그 제자가 죽을 것이라는 말은 일단 백 년을 건 시합과 모순이 되는 예언이었다. 주무태의 무정한 마음과 앞으로 다가올 슬픔을 짚어냄과 동시에 어린 수련자에게 약간의 불안함을 심어놓는 역할도 했다.
주무태는 쓰게 웃으며 한제를 쳐다보다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살짝 포권을 취했다. 그러더니 서도를 향해 말했다.
“네 주인께 고하라. 사흘 안에 우정(雨鼎)을 도관에 보낸다면 이 일에 대해서는 따로 묻지 않겠다!”
말을 마친 그가 다시 한번 한제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떠나갔다.
어린 수련자는 멍한 얼굴로 얼른 그의 사부를 따라나섰다. 그는 오늘 벌어진 일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부의 모습은 평소와 전혀 달랐고 심지어 복수조차 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1백 년 안에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한제의 말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사부가 온화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복아, 너무 많은 생각은 말거라. 사탕은 왜 안 먹고 챙겨두었느냐?”
주무태가 자애롭게 묻자 어린 수련자는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평생 간직할 겁니다.”
주무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어린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함께 천천히 걸었다.
그는 그렇게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마음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신식으로 한제의 가게를 훑어본 그는 상대를 평생의 적수로 정했다.
한편, 한제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참 뒤,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더는 그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거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화범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서도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그는 이전까지는 한제를 그저 높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무 조각만 만들면서 왕궁에 있는 두 수련자를 깜짝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두 수련자가 이곳을 찾아간 후로 나무 조각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고 심지어 세자는 새해가 될 때마다 적지 않은 돈을 들려 보내기까지 했다. 10년이 넘도록 변함없이 지속되어 온 일이었다. 서도가 도움을 청할 사람으로 한제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세자를 핍박하고 궁에 있던 두 수련자를 도망치게 만든 자가 한제와 몇 마디 나눈 뒤 얌전히 물러난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세자가 꿈에 그리던 우정을 넘겨줘야만 모두가 무사할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 ★ ★
서도가 떠난 뒤 한제의 생활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이전의 모든 것은 마치 하늘의 구름처럼 흩어져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제는 여전히 매일 아침 침상에서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대우의 아이가 가져다줄 술을 기다렸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조각을 했다.
이런 생활은 이미 오랜 시간 해온 터라 일종의 습관이 되어 있었다.
살육에서 완전히 벗어난 지금의 그는 몇 년 전의 그와 완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지금 그에게서는 어떤 살기(殺氣)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보면 편안함과 평화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