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20
“빌린 약초를 갚는 것이다!”
한제는 한 마디만을 남긴 채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허윤은 멍하니 눈앞의 약초를 바라보다가 찬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쌓인 약초가 매우 구하기 어려운 것으로 그 양과 질이 이전에 한제가 썼던 것을 훨씬 능가함을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한시름 놓았다.
한제가 떠난 후로 스승님으로부터 한바탕 꾸짖음을 듣기도 했다. 천우 선배가 그렇게 가버렸으니 후에 자도종에서 또 찾아온다면 자신은 천고의 대역 죄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일손양겁(一損兩劫)
집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한제는 가슴팍을 여러 번 두드리며 숨을 골랐다. 점차 그의 가슴팍으로부터 하얀 실이 가닥가닥 배출되기 시작했다.
한제는 흉포하게 꾸물거리는 실들을 움켜쥐어 뽑아냈다. 이에 가슴팍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싸늘한 눈으로 손에 쥔 실들을 응시하던 한제가 주먹을 꽉 쥐자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실들은 재로 흩어져 버렸다.
뒤이어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는 느릿하게 호흡을 이어가며 계속해서 실들을 배출했다.
귀원종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던 날, 한제는 마침내 그 하얀 실들을 모두 배출해낸 뒤 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이어서 저물공간을 소환해 옥패와 짐승 뼈에 새겨진 단약 제조법을 꺼냈다. 그간 하얀 실들을 제거하느라 이것들을 자세히 살필 여유가 없었기에 이제 마음 놓고 연구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눈빛이 굳어진 그는 얼른 옥패와 단약 제조법을 거둔 뒤 지하로 가라앉아 본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겁을 넘겨야 해!”
고신의 삼손칠겁은 수련자가 겪는 다섯 번의 천쇠와 마찬가지였다. 모두 목 위에 운명의 칼을 달아놓고 있는 것과 같아 한 번 내리친 칼에도 살아남는다면 수준이 대폭 높아지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몸도 영혼도 그대로 소멸되고 말았다.
일손과 이손에서는 각기 두 번의 겁을 세 번째 관문인 삼손에서는 세 번의 겁을 맞게 된다.
고신의 손과 겁은 수련자의 천쇠보다 훨씬 더 기이했다. 한제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서사의 기억에 의하면 강력한 고신일수록 손과 겁의 도래가 느려졌다.
일반적인 고신은 6성급에 달했을 때 처음으로 겁을 맞게 되지만 어떤 고신들은 7성급에 이르러서야 첫 번째 겁을 맞기도 했다. 심지어 8성급이 된 후에 첫 번째 겁을 맞는 극소수의 고신도 있는데 서사가 바로 그런 고신이었다.
아주 가볍게 그 관문을 넘기고 난 뒤 엄청난 발전을 이룬 그는 9성급으로 곧장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8성급 절정에 달한 뒤 전설적 존재인 9성급 고신이 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묵류분신술을 수련하기도 했다.
서사의 기억에는 당연히 5성급 고신으로서 맞는 첫 번째 손의 겁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이에 한제는 쓰게 웃었다.
그는 고신의 손겁이 예정보다 일찍 찾아온 것은 본체가 완전한 고신이 아니기 때문인 것은 물론이고 요령의 땅에서 고신의 힘을 과하게 사용한 결과일 거라고 생각했다.
8성급 고신은 가볍게 넘긴 관문이었을지 몰라도 한제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재난이었다.
일손양겁, 그중 하나의 손은 온몸에 끊임없이 가해지는 손상이었다. 주작성종에 있었을 때만 해도 한제의 본체 중 하반신만 새카만 뼈로 남아 있었는데 운해성역에 온 이래 그 손상은 더욱 극심해져서 이제는 가슴 아래까지 전부 뼈로 변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것은 겨우 첫 번째 손의 시작에 불과했다. 끊임없는 손상 아래 온몸의 살이 전부 다 사라지면 첫 번째 손은 그제야 끝이 날 것이며 뒤이어 두 번의 겁이 찾아올 것이었다.
뜻밖의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본체의 죽음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제에게는 서사의 심혈을 얻은 덕분에 싸울 기회라도 있다는 것이었다.
★ ★ ★
귀원종 지하 깊은 곳, 가부좌를 틀고 앉은 본체에 남은 것은 뼈뿐이었다.
그 뼈는 얇은 붉은색 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 붉은 막과 뼈 사이에 많지 않은 피가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제의 분신이 그 곁에 다다른 순간, 본체가 깨어나기라도 한 듯 눈구멍 안쪽으로부터 어스름한 빛이 번득였다.
묵묵히 본체를 바라보던 한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본체를 보호함과 동시에 온 심신을 본체 체내에 녹여내 고통을 분담했다.
시간은 착실히 흘러 눈 깜짝할 사이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본체의 고통은 끊임없이 가중되었다. 본체에는 뼈만 남은 상태였지만 지능과 감각은 여전히 또렷했기에 끔찍한 고통을 오롯이 느끼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사흘 동안 본체의 몸은 열 배로 커진 상태로 현재 귀원종 지하에는 높이가 백 척이 넘는 해골이 얌전히 누워 있는 셈이었다. 그 뼈에서는 핏빛이 번득였고 번득이는 핏빛 아래 흐르는 혈액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로부터 또 사흘이 흘렀다. 한제 본체의 해골은 이제 3천여 척에 달했고 성인 남성만 한 굵기의 뼈 위에 거의 붙다시피 한 채로 희박하게 흐르는 피는 점점 느려지다가 결국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이 순간, 본체의 두 눈에서는 어스름한 빛이 밝게 빛났다. 마치 땅을 뚫고 그 밖의 파란 하늘을 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 지하 깊은 곳에서 쩌적, 쩌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본체의 오른쪽 발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뼈의 겁⋯⋯.”
거대한 오른발 뼈는 형태 없는 거대한 손에 쥐인 듯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부서진 발의 뼈는 재가 되어 흩어졌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본체는 뼈만 남은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쩌적 하는 소리는 점점 격렬해지더니 결국 천둥소리처럼 요란하게 지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한제의 분신은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악문 채 본체와 함께 그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얼굴에서는 푸른 정맥이 불끈 돋아났고 콩알만 한 땀이 비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다.
뼈의 겁은 무정하게 들이닥치고 있었다. 고신은 강력한 생명력 덕분에 모든 살을 잃었어도 회복할 가능성 한 자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첫 번째 손은 그 한 자락 생기마저 없애버렸다.
생기를 빼앗은 뼈의 겁은 밀물처럼 밀려들어 생기를 잃고 회복할 가능성을 잃은 본체의 뼈를 모두 부수었다.
본체는 온몸의 뼈를 잃는 순간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본체가 죽으면 분신 역시 소멸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뼈의 겁을 넘기려면 본체를 되돌려 생기를 되찾고 겁에 대항해 온몸의 뼈를 다시 응집시켜야 했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새롭게 응집된 뼈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견고해져 어지간한 법보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한제는 아무리 괴로워도 견뎌내야만 했다. 분신도 본체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극도의 고통을 온몸의 뼈가 계속해서 부서지며 무너져 내리는 고통을 참아야 했다.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순간에 저항해야만 뼈의 겁을 이겨내 본체의 힘을 대폭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 절호의 순간을 놓치면 비록 저항에 성공한다 해도 온몸의 뼈 중 일부만 응집되는 데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한제는 그렇게 이 기회를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저항의 시기가 늦어질수록 그 성공률이 떨어진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뼈가 끊임없이 부러지고 부서지며 붕괴의 범위가 커질수록 겁을 넘기기는 어려워졌다.
사실 7성급 고신만 돼도 온몸의 뼈가 다 부러지는 찰나를 기다렸다가 저항함으로써 더 강력해질 수는 있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그런 일을 해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그 순간까지 끝내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해 대부분은 두개골이 수련자의 손톱만큼 작아졌을 무렵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겁에 저항했다. 그렇게 할 경우 온몸의 뼈 중 그 손톱만 한 부분이 유일한 흠이 되어버린다.
7성급 고신이 그럴 정도니 6성급 고신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는 자가 더욱 드물었다. 마지막 순간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으로 저항의 순간이 늦어진다면 끝없는 죽음의 심연으로 가라앉아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순간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 한제로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뼈를 새롭게 응집시킬 그 기회를 위해, 자신을 진정한 고신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불완전한 부분도 남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분신은 하늘을 거역하고 본체는 종족에 거역한다. 나 이한제는 평생 거역하며 수련해온 자야. 하늘과 겁과 운명에 거역하는 것이 바로 나다!’
한제의 분신과 본체는 절대 굴종하지 않겠다는 듯 동시에 두 눈을 번득였다. 고함을 외치지도 포효를 내지르지도 않은 채 그저 결연한 눈빛만으로 한제는 마음속의 역심을 뿜어냈다.
쩌적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본체의 오른쪽 허벅지 뼈와 더불어 왼쪽 허벅지 뼈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릎 아래의 뼈는 이미 재가 된 상태였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는 대지에서 울려 퍼져 점차 지표면 밖으로 흘러나가려 하고 있었다.
보름 전부터 막라 대륙에서는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매우 미약했던 소리였지만 점점 더 커져 이제는 지표면까지 가볍게 진동시키고 있었다.
일반인들은 그 소리에 덜덜 떨면서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바닥에 꿇어앉아 하늘에 대고 기도를 올릴 뿐이었다.
귀원종 수련자들은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다. 무언가의 포효 같은 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그들의 심신은 바르르 떨렸다.
이향동과 여연비, 그리고 두 노인까지 네 명의 대장로는 허공에 뜬 채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그 소리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 이향동은 나서서 조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여연비가 이를 저지했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고 심지어 막라 대륙의 원력이 그 쿵쿵 소리를 따라 대대적으로 뒤섞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휘저어져 소용돌이를 이룬 듯 원력은 그쪽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놀란 이유는 막라 대륙 너머 우주에서까지 흘러넘칠 듯 강력한 원력이 이곳으로 응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집된 원력은 대륙 바깥을 뒤덮었지만 짙은 원력이 막라 대륙 안으로 치고 들어올 경우 대륙의 방어막은 그대로 무너져 내릴 터였다.
또한 이전부터 막라 대륙 너머의 짙은 안개 속에서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던 흉수들이 지난 보름 동안은 어째서인지 이쪽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 눈빛은 흉측함과 망설임으로 번득이면서도 무언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대륙으로 들이닥치려 하다가도 참는 듯한 기색이었다. 마치 이 안에 그들을 유인하는 뭔가가 있는데 감히 덤벼들 수는 없어 머뭇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 흉수들 중에는 5급, 심지어는 6급에 달하는 녀석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이향동 은 7급 흉수 한 마리도 본 상태였다. 7급 흉수의 힘은 정열기 중기 수련자에 필적할 정도였다.
“여 사매, 사매가 어째서 우리 세 사람의 조사를 막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반드시 살펴야겠네. 우리 막라 대륙에 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세상의 원력과 안개 속에서 숨어 다니던 흉수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는지 알아야겠어!”
자신이 보았던 7급 흉수를 떠올리며 이향동은 여연비를 바라보았다.
곁의 두 노인도 말없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연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7급 흉수일 뿐이라면 다행이지. 난 만약 이 일이 계속 이어지다가 정열기 절정 수준의 수련자와도 대적할 수 있는 8급 흉수와 쇄열기 수련자와 쌍벽을 이루는 9급 흉수까지 몰려들까 걱정이야. 그렇게 되면 우리 막라 대륙은 정말 큰 재난을 맞게 되는 셈이지!”
두 노인 중 하나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러지는 않겠지. 우리 막라 대륙은 4급 성역 가장자리에 있지 않나. 주위에 그런 고급 흉수는 없을 거야.”
이향동은 잠시 침묵하다가 느릿하게 답했다.
“그러기를 바라는 수밖에⋯⋯.”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씁쓸한 표정으로 여연비를 바라보았다. 여태까지도 그들은 여연비가 자신들의 조사를 막아선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여연비는 해명하지 않고 긴 빛을 그리며 곧장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나머지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말없이 그 뒤를 따랐고 지면에 닿는 순간 곧장 대지를 뚫고 지하로 파고들었다.
네 사람은 속도를 약간 낮추었다. 콰쾅 하는 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고 소리의 근원지에 가까워짐에 따라 심신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위엄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끊임없이 밖으로 퍼져나가는 무서운 파동에 네 사람은 영혼에 가해지는 압박을 느낄 수 있었다. 저 아래쪽에 자신들을 마치 개미와 같은 미물처럼 보이게 만들 만큼 무서운 존재가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이들은 우뚝 멈춰 섰다. 여연비는 두 눈을 밝게 빛내며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뭐지? 이렇게 엄청난 위압감을 발휘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