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983
“동쪽 산을 취해 선문의 왼쪽 설주로 삼아라!”
엄숙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자 대지의 모든 선인들이 동시에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선계 가장 동쪽의 높은 산봉우리가 무너져 내리더니 하늘로 떠올라 빠른 속도로 돌진해왔다. 그 와중에도 산봉우리는 계속해 붕괴하더니 하나의 네모난 기둥이 되어 대지에 착지했다.
지면이 바르르 진동하던 그때,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서쪽 산을 취해 선문의 오른쪽 설주로 삼아라!”
이번에는 선계의 서쪽 끝의 산봉우리가 무너져 내려 기둥으로 변했다.
“남쪽 산맥을 취해 선문의 인방(引枋)으로 삼아라!”
선계 남쪽에 길게 누운 산맥이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거대한 용처럼 날아올라 무너져 내리면서 줄어들더니 두 개의 설주 위에 안착했다.
“북쪽의 대지를 취해 선문으로 삼아라!”
이번에는 선계 북쪽의 대지가 진동했다. 쩌적 소리와 함께 지면을 따라 균열이 퍼져나가면서 대지를 문의 형태로 분리해냈다.
이렇게 분리된 대지는 붕 떠올라 끊임없이 줄어들며 날아들더니 거대한 문짝이 되어 세 개의 돌기둥 사이에 끼워졌다.
“제선(祭仙)!”
문이 완성된 순간, 모든 선인들은 동시에 하늘과 땅을 뒤흔들 법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이전에 확산되었던 파문이 대량의 선기를 흡수한 뒤 사방을 휩쓸며 문 안쪽으로 몰려들었다.
콰르릉! 쾅!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파문은 수축했고 짙은 선기가 거대한 문에 녹아들었다.
“문이 열릴 때 선역이 강림할 것이다!”
그때, 모든 광경이 이지러지더니 전환되었다.
눈 깜짝할 새 오랜 세월이 흐른 듯했다. 선계는 여전히 선계였지만 더 이상 평화롭고 아름답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가득했고 곳곳에서 비참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대지에서는 콰르릉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균열이 생겨났다.
하늘은 먹물을 푼 물처럼 혼탁했고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 멀리서 수십 명의 선인이 다가왔지만 그중 가장 후미의 세 사람이 갑자기 바르르 경련하더니 피범벅이 되어 추락했다.
가까스로 문 앞에 이른 수십 명의 선인이 꿇어앉았다. 선두의 선인이 울부짖듯 하늘을 향해 외쳤다.
“선문이 완성된 지 4만 년이 되었는데 어찌 진정한 원고 시대의 선인은 강림하지 않는 것인가!”
거대한 문은 만들어졌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대륙으로 만들어진 문짝은 꽉 닫혀 있었다.
선인이 울부짖던 그때, 꿇어 앉아 있던 이들 중 몇 명이 바르르 경련하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원고 시대 선역은 봉계에 큰 재난이 닥칠 것이니 선문을 세워 그 화를 면하라 했다! 한데 재난이 닥친 오늘, 어째서 진정한 선인은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 것인가!”
먼 하늘 끄트머리에서 수백 명의 선인이 다가왔다. 그러는 도중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숨을 거뒀다.
이곳에 이른 선인들은 바닥에 꿇어앉은 채 원통하다는 듯한 얼굴로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원고 시대의 선인이 돕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이 재난을 이겨내야 한다. 죽더라도 선계에서 죽어야지!”
한 선인이 고개를 번쩍 쳐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붕괴와 죽음이었다. 그는 피와 살점이 되어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일부는 선문에 튀기도 했으나 거대한 선문에 비하면 개미만 한 점에 불과했다.
무릎을 꿇고 있던 선인들이 하나둘 고개를 쳐들더니 하늘로 솟아올랐다.
“죽더라도 선계에서 죽겠다!”
이들은 날아오를 때마다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며 쾅, 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히 저항할 수조차 없었다.
그때, 하늘을 뒤덮은 어둠이 돌연 응집되기 시작했다. 뒤이어 허공에서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손가락이 나타나 돌문을 향해 돌진했다.
“크아악!”
손가락을 피하지 못한 수련자들이 순식간에 숨을 거두었다.
하늘을 뒤덮은 어둠을 완전히 흡수한 손가락은 이내 돌문의 문짝과 충돌했다.
콰콰쾅!
격렬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세상의 모든 규칙을 압박했다. 수많은 균열이 일면서 문짝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대지에도 균열이 생겨나면서 선계 가장자리는 열 개가 넘는 조각으로 갈라졌다.
이어서 선계도 무너졌고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분리되면서 순식간에 폐허가 됐다.
하지만 붕괴는 멈추지 않고 점점 격렬해졌다. 이어서 한 줄기 파멸적인 기운이 퍼져 나가면서 모든 생령을 파괴했다.
유월(流月)
한참 뒤에야 대지는 진동을 멈추었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문짝을 잃은 거대한 문이 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다시 한번 광경이 일그러지더니 전환되었다. 이번에도 긴 시간이 지난 듯했다.
적막한 선계 깊은 곳에 돌연 한 줄기 균열이 일어났다. 10만 척 길이의 균열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우주에 보라색 수련성이 하나 표류하고 있었다.
수련성 안에는 흉측한 흉수들이 가득 자리했는데 거대하고 날카로운 주둥이가 번들거렸다.
녀석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균열을 통해 선계로 진입했다.
한제는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리고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그가 방금 본 것은 문의 기억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솟아오른 그는 거대한 문의 인방에 위에 가부좌를 틀었다.
이곳에서는 선계 전체를 굽어볼 수 있었으나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백발과 옷을 휘날렸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눈을 감은 한제는 여전히 기이한 상태에 침잠된 채 선문의 짙은 기운을 느꼈다.
문과 융합되는 그의 심신에는 점차 흐릿한 문이 하나 형성됐다. 그는 이 문을 마음에 담아 가져갈 생각이었다.
다만 심신에 나타난 문은 또렷하지 않았다.
그때, 한제는 문 안을 맴도는 여덟 갈래의 기이한 힘을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심신에 녹인 문의 형태가 또렷해지지 않은 것은 그 힘들 때문이었다.
한제는 여덟 가지의 서로 다른 힘이 여덟 가지의 규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잔야를 깨달았던 벼랑에서의 깨달음에 오직 하나의 규칙만 존재했던 것과는 달랐다.
만약 여덟 가지 규칙을 전부 가지려 한다면 마음속의 문은 영원히 또렷해지지 않을 터였다.
한제는 문 안에 나타난 여덟 종류의 규칙을 관찰하다가 문득 심신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육신 역시 살짝 경련했다.
“아니야! 하나가 더 있어!”
두 눈을 번쩍 뜬 한제는 문에서 오랜 세월을 느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생겨나는 기운이었으므로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세월의 느낌은 어딘가 이상했다. 모종의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이 변화는 수련자의 경지에 변화를 일으키듯 문의 기운을 세월에서 영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세월과 영원은 본질은 같지만 차원이 다른 개념이었다.
★ ★ ★
눈 깜짝할 사이 사흘이 지나갔다. 한제는 거대한 돌문 위에 가부좌를 튼 채, 기이한 경계 안에서 도를 깨닫는 것처럼 아홉 번째 규칙의 변화를 추적했다.
주위에는 흡혈마수들이 빽빽하게 흩어져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특히 금혈마수는 한제 옆에 엎드려 냉랭한 눈으로 사방을 감시했다. 그러다가 시선이 한제에게로 향할 때면 마치 부모를 그리워하는 자식과도 같은 눈빛으로 바뀌었다. 사실 금혈마수에게 한제는 부모와도 같았던 것이다.
금혈마수 주위로는 남혈마수 중에도 특히 그 색깔이 짙은 네 마리가 자리한 채 정열기 절정의 수련자보다도 강한 기운을 풍겼다.
이 5천여 마리의 흡혈마수들은 점점 한제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나, 그 연대는 무척 얕아 금혈마수가 사라지는 순간 흩어져버릴 터였다.
한제는 시종일관 가부좌를 튼 채 돌문의 규칙을 묵묵히 느끼고 있었다.
아홉 번째 규칙은 본래의 여덟 개보다 강력했기에 한제는 그 규칙을 깨닫기로 했다.
돌문의 오래된 기운에는 고독감이 배어 있었다. 이 낯선 풍의 선계에서 마음을 공명하게 하는 느낌이었다.
한제는 돌문 위에 앉아 마치 그 일부가 된 듯 오래된 기운을 바라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마음이 점점 동화되는 것만 같았다.
그가 수련해온 2천여 년의 시간은 이 돌문이 지내온 시간에 비하면 보잘것없을 정도로 짧다. 그러나 돌문과 융합된 지금, 그는 점차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화가가 산을 보고 물을 보고 사람을 보면서 허상의 틀을 잡아가듯 지금 한제의 마음에도 흐릿한 틀이 잡힌 상황이었다.
그의 눈빛은 호수처럼 잠잠했으나, 기억은 그 너머 묻어두었던 과거로 끝없이 한제를 인도했다.
어느 수련성의 부자(父子)가 보였다. 부자는 이야기를 나누며 산과 강을 따라 걸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끊임없이 곳곳을 돌아다녔다. 바다에 이르러서는 아이와 함께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내지르기도 했다.
모든 기억마다 추억이 깃들어 있었다. 고통과 기쁨이 공존하는 과거의 한 자락이자 그의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한제는 기억을 되새기고 눈앞의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았다.
“수련이란⋯⋯ 도를 마음에 담는 것. 깨달음이나 경지 역시 수련의 일종. 어떤 감상을 마음에 담고 느끼고 도와 융합시켜야만 경지가 되고 사상이 될 수 있는 법.”
한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눈을 다시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온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이미 그의 심신에는 거대한 돌문이 세워져 있었다.
허나 이전과 달리 그의 마음속 돌문에는 그 혼자만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곁에 한 아이가 앉아 있었다.
영원히 자라지 않을 아이. 어쩌면 한제의 마음속에 이평은 언제나 아이일지도 모른다.
실재가 아니라 기억의 허상인 이평은 살아 있었을 때처럼 제 아비의 곁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아비와 함께 해가 나고 지는 것을 보고 함께 세상을 유람했을 때처럼 아비의 외로움을 함께하려는 듯했다.
“모든 것이 영원할 수 있다면 후회할 만한 선택을 그토록 많이 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평과 함께 앉아 있던 거대한 돌문이 흐릿해지더니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쏴아아 하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