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s are subscriber RAW novel - Chapter 178
177화 최강의 원군
급격하게 생기가 빠져나가는 벽지심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전생에…… 개구리였었나? 몸을 작게…… 축소시키는 축골공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있지만, 크게…… 늘리는 무공이…… 있는 줄은 몰랐군. 배워 뒀으면…… 밤이 더욱 즐거웠을…… 텐데…….”
“농담도 할 줄 알았나? 그런 줄 알았다면 굳이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일세.”
“그거야말로…… 웃긴 소리군…….”
벽지심은 크게 웃으려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사지를 축 늘어트린 벽지심이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꿈틀거림마저 멈췄다.
“소리도 못…… 지르겠군. 지독한…… 독이야…….”
“아혈을 점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지. 무리하지 말게. 사천당가 특제일세.”
“하아…….”
벽지심은 뭔가 꺼내려던 말을 삼켰다.
빠르게 퍼져 나가는 독 기운을 생각하면 쓸데없는 언쟁으로 낭비할 시간 따윈 없었기 때문이다.
“내 행세를…… 할 생각이라면 많이…… 힘들 거야……. 내가 좀 잘났지…… 않나…….”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아도 되네. 네 버릇 들이나 생각하는 방식이라면 충분히 파악이 끝났으니까. 그간 시간이 제법 많았지.”
시간을 들여 녹림칠십이채를 농락한 벽지심이었지만, 그 시간은 흑의의 사내에게도 기회였다는 이야기다.
“……무공은?”
“천신채의 시작은 북란대전 당시 강남대협 서자승이 만든 저항군이 그 모태였지. 자네가 익힌 건룡십이도(乾龍十二刀)는 종남파의 제자였던 서자승이 대천강검법(大天罡劍法)을 바탕으로 만든 무공이고.”
“그래……서?”
“구파의 무공쯤은 이미 예전에 파악이 끝났다네. 애당초 구파의 근본을 비틀어버린 것이 우리들이야. 그곳에서 파생된 자네 무공쯤 흉내 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허어…… 구파까지?”
“구파가 뭐 그리 대수라고. 구파에 대한 대단한 환상이라도 있는 모양인데, 그 구파도 곧 쪼개질 걸세.”
구파를 가볍게 여기는 언행에 벽지심은 이들의 배후가 생각보다 더 거대하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구파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까지도.
“천하라도…… 손에 쥘…… 생각인가?”
“확신은 못 하겠군. 속해 있는 곳이라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많거든. 힘이 있음에도 기이하리만큼 자중하더란 말이지. 요즘은 좀 달라진 느낌이긴 하지만. 뭐, 아랫것들이 뭘 어쩌겠나. 까라는 대로 까는 거지.”
그간 쌓인 정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입이 간지러웠던 것일까?
흑의의 사내는 벽지심에게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전부 다 이야기해줬다.
끝을 알 수 없는 세력. 천하를 농락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현황.
거기에 이 정도 실력자조차 아랫것 취급을 받는 곳이라니.
벽지심은 된통 걸렸음을 실감했다.
곧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벽지심이 최후의 힘을 짜내 속에 담겨있는 말을 꺼냈다.
“내 수하들…… 잘…… 부탁…….”
“그간 내가 들은 말 중 가장 자네답지 않은 말이군.”
흑의의 사내는 죽은 벽지심의 눈을 감겨 주었다.
콰직!
그리고 머리를 밟아 깨부쉈다.
벽지심의 옷으로 갈아입은 흑의의 사내는 약재를 부어 시체를 흔적도 없이 처리했다.
그렇게 진짜를 없앤 흑의의 사내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자가 아니었다.
“아…… 아…….”
천신채의 채주, 건룡대도 벽지심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이내 건물 밖으로 나간 ‘벽지심’이, 바깥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여러’ 수하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도 움직인다.”
“예!”
수하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그 웅장한 대답을 들은 벽지심은 이윽고 옆에 있던 횃불로 방금까지 머물던 거처에 불을 질렀다.
느리지만 점차 번져 가기 시작하는 불길이 삽시간에 허름한 가옥을 집어삼켰다.
안에 남아 있는 뭉개진 시체와 함께.
그렇게 허름한 가옥을 활활 태우며 순식간에 커지는 불길은 멀리서도 볼 수 있는 거대한 연기를 피워 올리며 어떤 신호를 보냈다.
“쯧! 신승이 산에서 내려왔단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래서야 반쪽짜리 성공이 될 수밖에 없겠군. 그래도 신승을 처리할 수 있다면 손익을 뒤집을 수 있으려나.”
녹림도들과 달리 백가표국과 함께 천자산에 오른 신승 공료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 그의 중얼거림이 술렁이는 공기 속에 조용히 묻혔다.
***
내분이 일어나 제 살 깎아 먹기를 한다는 건 백가표국과 그들에게 붙은 파벌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생각보다 많이 모였네?”
적어도 열댓 곳 가량의 산채들이 우리 편으로 붙은 것 같다.
“인품이 훌륭하신 분들이 워낙 많잖아.”
“……뭐, 그렇긴 하지.”
백무호가 씩 웃으며 하는 말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신승 어르신을 바라봤다.
수단과 방법을 따지지 않고 따르게 만드는 것이 인품이라면, 확실히 한 인품 하시는 분이긴 하다.
‘지금 같은 녹림의 입장에선 재앙 그 자체지.’
하나로 똘똘 뭉쳐 있는 녹림칠십이채라면 모를까, 사분오열되어 각개격파 당하는 상황에선 어르신을 감당할 방도가 없다.
“네 쪽 일은 잘 풀렸냐?”
“아주 잘 풀렸지. 곧 합류할 거야.”
“그래? 단 아저씨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쪽으로 분류된 산채가 얼추 일곱 채 정도라던데……. 이야, 스무 채가 좀 넘는 정도네?”
친화력이 좋은 녀석답게, 벌써 단야흔 채주와는 사적으로 편하게 부르는 관계가 된 것 같다.
‘저쪽도 그걸 반기는 입장이겠지.’
단야흔 채주가 그린 미래 구상을 생각하면, 백가표국의 후계자인 백무호와의 친분은 소중한 인연일 테니 말이다.
녹림이 산산조각 난 지금 상황이라면 더더욱!
사실상 처음 예상했던 녹림의 미래 구상과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 분명하다.
사실상 무림을 향해 ‘앞으로 긴장해라, 우리가 뭉치면 좀 무섭다!’라고 외쳐 놓고 거하게 폭망한 꼴이기 때문이다.
“백 아저씨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인 유해한 일.”
백무호가 내 옆에 있는 이화를 살피며 말했다.
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 입장을 생각하면 고문은 좀 그렇지 싶은데…….”
“걱정 마. 산도적 아저씨들이 먼저 제안한 거니까. 실제 집행도 그 아저씨들이 하고 있을 거고. 좀 의미심장한 말이 있었거든. ‘이제 곧 너희도 끝장이다.’라든가, ‘신호가 보이면 모두가 들고일어날 거다.’라든가.”
“뭔가 남아 있단 거네.”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각 파벌에 숨어있는 배신자들이 어떤 신호를 기점으로 일제히 움직일 거란 의미 같은데…….
‘하긴, 그러니 녹림에서 먼저 움직인 것이겠네.’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누구라도 속이 거슬릴 것이다.
상황을 개판으로 만든 것에 대한 분노도 풀고 싶을 것이고.
결정적으로 결백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저게 그 신호인가?”
천자산의 요지라 할 수 있는 산 중턱 부근. 천신채 중심으로 보이는 곳에서 커다란 연기가 피어올랐다.
순간 고요해진 적막과 함께 짙은 긴장감이 흘렀다.
저게 정말 저들이 정한 신호라면 지금 이 순간 배신자가 옆구리에 칼을 꽂아 넣을 수도 있다.
다행히 돌발 행동은 없었다.
“우리는 중립 아니면 온건파였으니까. 아무래도 내부에서 충동질하며 배신각 재는 녀석들은 지금도 계속 치고받고 싸우는 녀석들 사이에 있겠지.”
만산호 채주가 크게 외쳤다.
주변에 들으라는 듯 하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자신들이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적어도 혼란 상황이 아니라면 어설프게 이빨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다른 쪽은 엉망이겠군.”
미성년자 관람 불가인 일이 행해지던 건물에서 나온 백진성 아저씨가 흘러가는 상황을 읽어내셨다.
나도 동의했다.
아직 싸우고 있는 파벌들이 있다면, 저 신호와 함께 튀어나온 배신의 칼날은 전세를 괴멸로 이끌 수 있다.
“가 보죠.”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찾기는 쉬운 일이다.
“부상자는 남는다. 그들을 지킬 인원도 남고. 다치지 않고 기량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만 나서도록!”
백진성 아저씨가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다.
그렇게 나를 비롯한 소수정예가 빠르게 추려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을 찾아 이동했다.
“휘유!”
“많이도 죽었군.”
천자산에 모인 녹림도의 숫자는 만 단위를 넘어선다.
그들 중 일부가 죽어 있을 뿐이라도 시산혈해가 만들어지기 충분했다.
정말 엄청나게 죽었다.
욕심이 망친 증거가 사방에 가득했다.
으득!!
“벽지심 이 개자식…… 사지를 찢어버릴 테다!”
만산호 채주의 저주가 울려 퍼졌다.
비슷한 심정들인지 따라나섰던 채주들 역시 이를 갈며 살기를 피워 올렸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군.”
멀리서 아직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향해 달리자, 싸우는 소리가 잦아드는 가운데, 넋 나간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자들이 보였다.
“전림채주!”
그들 중 한 명을 알아본 만산호 채주가 이를 갈며 다가갔다.
“대체 뭔 짓을 한 거냐?”
노기 섞인 추궁에 전림채주가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전림채주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기호지세였어……. 시작한 싸움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나는 위대한 녹림을 만들려 했을 뿐이야…….”
그저 변명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다른 파벌을 쳐서 굴복시키고 흡수할 생각이었지만, 일단 피를 본 순간 끝을 보게 된 모양이다.
하지만 누구도 전림채주를 동정하지 않았다.
퍼걱!
“병신이 엿 같은 소리나 하고 있어! 짜증 나게!”
옆에 서 있던 다른 채주, 합산채주가 전림채주의 머리를 깨부쉈을 때 놀라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당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습으로 한 파벌의 수장 격이던 전림채주의 목숨을 거둔 자.
모두가 그의 정체를 파악했다.
배신자!
“이노오오오옴!!”
만산호 채주가 합산채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흑심투호라는 별호처럼 호랑이처럼 매섭게 달려드는 만산호 채주를 향해 합산채주가 주먹을 휘두르며 맞부딪쳤다.
그 결과가 놀라웠다.
콰쾅!!
“큭!!”
대수롭지 않게 만산호 채주를 튕겨냈다.
문제는 합산채주가 구사한 무공이다.
그 무공은 어딘가 눈에 익었다.
익을 수밖에 없다. 보는 순간 옆구리가 뻐근한 느낌이 드는 저 무공을 직접 몸으로 겪어봤기 때문이다.
“아라한신권?”
소림무공이다. 악군패처럼 어설픈 무공이 아니라, 진짜배기 정통 무공으로 보였다.
내 판단이 맞는가 싶어 신승 어르신을 바라보니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 벌어진 건 더 어이가 없었다.
“십팔나한진?”
여기서 분탕질 치는 이유가 아군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듯 녹림도들의 머리를 깨부수는 자들이 하나둘 나오더니 진형을 이루며 우리와 대치했다.
그런데 그게 십팔나한진이라는 모양이다.
신승 어르신이 본 것이니 착각일 수가 없다.
소림의 절기가 산적들의 손에서 피어나고 있다.
“같잖은 흉내질을…….”
“흉내? 하하하! 오히려 늙은이 네 쪽이 가짜일걸?”
신승 어르신을 조롱하는 그들이 완전히 진형을 갖추자 삼엄한 무게감이 주변을 눌렀다.
온전하게 돌아가는 십팔나한진의 위용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녹림이…… 아니야.’
합격진은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 가며 연습을 해야 비로소 짜임새를 갖출 수 있다.
저 짜임새는 저들이 이미 손발을 맞춰왔던 자들이란 걸 증명하는 거나 다름없다.
‘학이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녹림에 학이 스며들어 있다.
게다가 소림의 무공을 구사 중이다.
‘거기까지 손이 닿아 있다고?’
저들은 대체 어디까지 손이 뻗어 있는 걸까?
무서울 정도다.
그때였다.
[허!허!허! 뭐라는 거냐? 저 육시랄 중생 놈은.]‘어?’
오랜만에 들어보는 달마 사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닿아왔다.
[개판이구만. 지상 꼴 잘~~ 돌아간다.]비아냥거리는 천마 사부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아…… 야근 확정이군.]뭔가 비애가 느껴지는 장삼풍 사부님의 한숨까지.
세 사부님이 모두 모이셨다.
“하하…….”
갑자기 몸에 힘이 들어갔다.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의 존재에 전율했던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래, 적들이 누구건 무슨 상관이냐. 사부님들이 계신데.’
지금 최강의 원군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