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14
#1013화
“대, 대인을?”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마중걸과 그의 의형제들은 크게 뜨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니, 대인은 갑자기 왜…….”
말꼬리를 흐리는 마중걸을 향해, 나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번 일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으니 갑자기는 아니지. 이유야 뭐, 굳이 말 안 해도 알고 있죠?”
“지금 나를…… 아니 우리를 암천의 간자로 의심하고 있는 거요?”
“그렇진 않습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당신들에 한해서만큼은.”
“하면, 대인을?”
내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마중걸을 비롯한 백마칠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젠장, 도대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요?”
“저희 대형께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대인께서는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직접 들으셨으니 아실 거 아닙니까?”
당연히 알지.
매우 보기 드문 부류의 희한한 인간이라는 것만.
하지만 지금은 아,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넘어갈 만한 상황이 아니다.
“갈! 필요하다면 내 목이라도 걸겠소!”
나는 한 박자 늦게 외친 난쟁이를 바라보며 턱을 긁적였다.
“그쪽에 계신 분, 본인 목을 거시겠다고?”
“……어?”
막상 이렇게 콕 찝을 줄은 몰랐는지, 순간 움찔한 난쟁이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목은 좀 그렇고 손목을…….”
“남아일언중천금! 당연히 걸겠소! 둘째 형님 목을 자르시오!”
“아니, 이 미친놈아!”
불쑥 끼어든 주먹코의 대리 배팅에 난쟁이가 허둥지둥하던 그때, 내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손목이건 모가지건, 어차피 수지타산이 안 맞는 건 똑같은데.”
“그게 무슨…….”
“궁금해서 묻는 건데, 당신들 눈에는 이 많은 사람이 단지 심심해서 옆 동네 마실 나가는 거로 보입니까?”
“……!”
삽시간에 무거워진 분위기 속, 흔들리는 그들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저 멀리 앞서가는 수많은 이들의 뒷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흑룡마문. 종남파.
감숙 무림에 속한 크고 작은 문파의 무인들.
그리고 마지막, 나와 화룡각 대원들까지.
단지 이뿐만이 아니다. 수천의 인마(人馬)가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방향에는, 언제 위기에 처할지 모를 수만 명의 아군이 있다.
난쟁이 한 사람만이 아니라 칠종백마 전원이 목숨을 건다 해도, 이는 같은 저울에 올려 비교할 수 없는 막중한 무게였다.
“전쟁은 도박이 아니라는 말, 혹시 여기서 나만 들어 봤나?”
혼잣말처럼 내뱉은 물음에 마중걸은 물론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고작 마방 몇 명의 증언으로 의문의 초절정 고수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둔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바람인지 저들 역시 알고 있을 테니까.
천하의 운명을 판가름할 대전쟁은 현재 진행형이고, 전쟁은 결코 도박이 아니다.
게다가…….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괜한 의심도 아니지.’
내심 중얼거린 나는 마중걸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날 백마칠종 사이에 오갔던 전음의 내용을 떠올리며.
“당신들끼리 주고받은 전음 중에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있는 것 같던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흥미로운 내용이라면, 어떤…….”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 대인이라는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것저것 알려 줬다고. 그것도 제법 최근에.”
마지막 뒷말에 유독 힘을 주어 덧붙이자, 안 그래도 침잠하게 가라앉아 있던 마중걸의 눈동자가 눈에 띌 만큼 요동쳤다.
“그, 그건.”
“문득 궁금해지네요. 그 최근이 정확히 언제인지, 그리고 무엇을 알려 줬는지. 안 그렇습니까?”
불현듯 고개를 돌려 던진 물음에, 상황을 주시하던 적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녀석이 하는 말을 듣자 하니 노부도 궁금해지는구나. 그토록 중요한 얘기를 왜 지금까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는지도.”
돌이켜보면 누구 한 사람쯤은 충분히 의심할 만한 일이었다.
전직 마적단. 그것도 지금껏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그저 그런 뜨내기들인 백마칠종이 어떻게 멸지(滅智)의 사막을 넘겠다는 대담무쌍한 발상을 떠올렸을까.
그리고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저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봐왔고, 전음의 내용 역시 모조리 기억하고 있는 나는 이미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짐작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향하는 새로운 교역로를 뚫어야 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당신들이 떠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말이 틀립니까?”
“……!”
“……!”
아마도 전날 남호의 조언을 따라 일찍이 후미로 위치를 옮기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뱉은 말에 깜짝 놀랄만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경 십여 장에는 우리뿐이었고, 마중걸에게 남은 선택지 역시 하나뿐이었다.
“……더 숨길 것도 없군.”
무거운 침묵 끝에 흘러나온, 시인이나 다름 없는 한 마디.
그의 의형제들이 다급히 뭐라 외치기 직전, 손을 들어 모두의 말문을 틀어막은 나는 담담하게 질문을 이어 갔다.
“그 사실을 숨겼던 이유는?”
“대인께서 원치 않으셨을 테니까. 그분 덕분에 마음을 고쳐먹고 지금껏 잘 살아왔는데, 우리가 금수(禽獸)도 아니고 어찌 그 사실을 대놓고 떠들 수 있겠소?”
“더 자세히.”
“이번이 처음은 아니오. 십여 년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인께서는 나와 아우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셨소. 첫 대면 당시에는 그분의 신위(神威)에 놀라 수하가 되길 청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하시며 말씀하시더군.”
복잡한 표정을 한 의형제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마중걸이 말을 이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법이라고. 차라리 우리처럼 개심의 여지가 있는 마적들을 모아 한 울타리를 이루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여 나와 아우들은 대인께서 하신 조언을 따르기로 했소.”
“백마방(白馬方)…….”
“맞소. 그것이 백마방의 시작이었지. 그 후로도 대인께서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늘 올바른 방향을 알려 주셨소. 새로운 교역로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렇다면 몇 년 전부터 서쪽 교역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도 혹시.”
내 물음에 담긴 의미를 즉각 이해한 마중걸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다만 대인께서 그리 조언하셨을 뿐이지. 그 후로 우리는 서쪽으로 향하는 새로운 경로를 탐색하기 시작했고, 초원만이 유일한 대안책이라는 것을 깨달았소. 당연히 그동안은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서부 초원의 공백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 또한 그 덕분이었을 테고.”
불쑥 울려 퍼진 적천강의 뇌까림에, 마중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상황이 이리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줄은 저희야 까맣게 몰랐지요. 대인께서도 마찬가지 셨겠지만 말입니다.”
그야 당연하다.
설령 천기(天氣)를 읽을 줄 알았던 법왕 굉도가 아직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수년 뒤에나 벌어질 일을 어찌 그토록 자세히 예측할 수 있었겠나.
‘그쯤 되면 천기를 읽는 수준이 아니라, 예언이지. 예언.’
게다가 이어지는 마중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인이라 불리는 그자의 조언은 딱히 특별하지도 않았다.
어디 갈 곳도 없고, 농사 한번 지어 본 적 없는 착한 마적 몇 명에게 특기를 살려서 백마방을 차리게 도와준 것이 시작이다.
사막 너머로 향하는 새로운 교역로?
범인(凡人)이라면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대담한 발상이긴 하지만, 애초에 그자의 무위나 행적을 들어 보면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
사막에 인접한 거대 방파의 수장이거나, 야망이 큰 상단주들 역시 한 번쯤은 품었을 희망 사항이기도 하고.
하지만 뭘까, 알 수 없는 이 기묘한 느낌은.
‘뭐지, 도대체.’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낸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있는 마중걸을 향해 잠시 닫혀 있던 입술을 뗐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우리를 찾아온 건 누구의 생각입니까?”
“부끄럽지만, 그 역시 대인의 조언이었소.”
“역시.”
“사실 한나절 정도는 더 빨리 올 수 있었소. 하지만 우리끼리 결정하기에는 워낙 심각한 사안이라, 녕하 땅에 들어서자마자 대인을 찾아뵈었지.”
“계속하십시오.”
“초원과 사막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니,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이 술만 몇 사발 들이켜시더니 그러시더이다. 진작 감숙으로 갔어야 할 놈들이 왜 아직도 여기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느냐고.”
“……!”
“그 후의 일은 뭐, 이렇게 됐소. 제기랄.”
마중걸이 반쯤 체념한 얼굴로 입을 다물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말들이 내뿜는 거친 숨결과 세차게 달려가는 말발굽 소리만 울려 퍼지던 그때, 눈치를 살피던 주먹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칠주야(七晝夜). 칠주야 정도면 될 듯싶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개소리냐?”
생뚱맞은 말에 적천강이 눈살을 찌푸리자, 식겁한 주먹코가 다급한 손짓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 저기 계신 제자분께서 아까 저희에게 물어보시지 않았습니까. 대인을 모시고 돌아오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일이 걸리겠냐고. 거기에 대해 대답해 드린 겁니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
입술만 오물거리고 있던 마중걸의 의형제들이 그제야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셋째 형님이 간만에 옳은 말씀하시네. 칠주야면 떡을 치지.”
“맡겨만 주십시오. 죽을힘을 다해 모셔오겠습니다.”
“그, 물론 기련산이면 칠주야지만 대설산이나 돈황(敦煌)까지라면 좀 더 걸릴 수도 있긴 한데.”
“대인께서 뭐 극악무도한 마두도 아니고, 이대로 쭉 궁벽한 촌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바에야 이참에 무림맹에 출사(出仕)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안 그렇소?”
“갈! 나쁘지 않다니! 이미 우리 일곱 형제를 보내어 암천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만으로도 큰 공을 세우셨으니 필시 대인께도 아주 좋은 선택이 될…….”
쉭, 빠악!
“커헉!”
“이런 호로 새끼를 봤나, 갈갈거리지 말라니까 노부의 말을 귓등으로 들어?”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말안장을 박차고 날아올라, 난쟁이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돌아온 적천강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어찌하겠느냐?”
백마칠종의 얼굴을 천천히 훑은 내가 대답했다.
“엿새. 아니, 닷새.”
“예?”
“닷새로 하죠. 지금 이 행군이 멈추는 장소가 기련산이건 대설산이건, 돈황이건 그 안에 돌아오는 것으로.”
“……!”
“물론 한 사람은 무조건 남아야 합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굳이 내 입으로 말 안 해도 아실 거고.”
“자, 잠깐. 그 말씀은 우리 대형을……!”
내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백마칠종이 입을 모아 반박하려던 그때, 마중걸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좋소.”
“대형!”
“우형(愚兄)은 이곳에 남아도 상관없다. 그러니 너희는 한시라도 빨리 대인을 모시고 돌아오너라. 어서!”
단호한 마중걸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뭐라 말할 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그들은, 내 조용한 고갯짓에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대열을 이탈했다.
두두두두!
금세 어둠에 파묻혀 사라지는 여섯 필의 초원마를, 마중걸은 심유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결의에 찬 표정과는 달리, 미세하게 움직이는 입술은 차마 크게 말하지 못한 진심을 담고 있었다.
“시발, 진짜 좆 됐다…….”
“…….”
“…….”
이거 진짜 뭐 하는 새끼지.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진 마중걸을 나와 적천강이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그때, 들썩이는 말안장 위에서 거의 널뛰기 수준의 묘기를 선보이던 남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 시간 되나?”
곧장 수뇌부에게 이 사실을 전달할 생각이었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확히는 고개를 저으려고 했다.
다음 순간, 한껏 목소리를 낮춘 남호의 속삭임이 귓가를 파고들기 전까지는.
“중요한 이야기일세.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