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033
#1032화
그것은 마치 두 개의 거대한 파도가 서로를 집어삼키는 듯한 광경이었다.
몇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 장소가 바다가 아닌 드넓은 설원(雪原)이고, 물 대신 무수한 사람들과 번뜩이는 날붙이로 이루어진 파도였으며, 충돌 끝에 터져 나온 포말이 핏빛처럼 붉었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핏물 그 자체였다.
콰드드드득!
수만 대 수만의 격돌.
뒷걸음질 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군마(軍馬)처럼, 서로를 향해 돌격한 두 갈래의 군세는 삽시간에 서로를 향해 뒤섞였다. 각자의 손에 들린 병장기를 번뜩이며.
차차창! 푸푹!
서걱!
섬뜩한 절삭음과 함께 농밀한 피 안개가 퍼져 나간다.
그리고 삽시간에 무수한 핏물과 비명으로 뒤덮인 설원 속, 맹렬하게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송곳들이 있었다.
“무량수불……!”
화아악.
막강한 기파(氣波)에 폭풍이라도 만난 듯 거세게 흩날리는 도포 자락.
단 일검으로 다섯 명의 적들을 갈라버린 풍운검군(風雲劍君)은, 우윳빛 강기로 거대해진 검신을 비스듬히 내리그었다.
쏴아아악!
엄청난 압력에 공간이 일그러진다. 길게 솟아오른 검강이 흑색 갑주로 무장한 적들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뒤집히는 땅거죽, 동시에 사방으로 비산하는 살과 뼈.
그러나 그 참혹한 광경을 코앞에서 지켜봤음에도, 천주라는 새로운 신을 섬기게 된 교도(敎徒)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무언가에 홀린 듯 몽롱한 눈빛으로 풍운검군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여덟 글자의 교언(敎言)을 쉴새 없이 중얼거리며.
“천상천하(天上天下).”
“만마앙복(萬魔仰伏)…….”
퍼걱!
공허하다 못해 오싹하기까지 한 그 음성은 죽음을 맞이한 후에야 끝이 났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풍운검군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크르륵.
쩍 벌어진 목울대 사이로 피거품이 들끓는다.
풍운검군의 일검에 목이 베인 교도가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천상, 끄륵. 천……”
푹!
가슴에 검을 꽂고 나서야 우뚝 끊기는 교언. 그런 교도의 모습에 풍운검군은 등골이 서늘해져 옴을 느꼈다.
‘결코 평범한 자들이 아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였다. 천마가 중원을 휩쓸던 그 시절에도,휘하에 결집한 십만 마도는 그야말로 반쯤 미쳐 있는 광신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풍운검군이 당시 마주했던 적들에게는 최소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 할 감정이, 그들에게도 분명히 있었다.
‘한데 도대체…….’
순간, 풍운검군은 그제야 이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두려움.
놈들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자신이 대적할 수 없는 강자라는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암천의 교도들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계속해서 그를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새하얀 포말 대신 붉디붉은 핏물을 흩뿌리며.
쐐애애액!
유려하게 움직인 검 끝이 사방에서 밀려드는 적들을 향해 휘둘려졌다.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
종남파의 상징과도 같은 초절정의 검공(劍功)이 공간을 휩쓸었다. 극도로 예리한 강기 앞에 두부처럼 잘려 나간 적들의 무기와 몸뚱어리가 조각나며 흩어졌다.
서걱! 투두둑!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허물어지는 시체들.
그러나 한쪽 팔과 함께 가슴이 깊게 갈라진 적 중 하나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고꾸라지는 대신, 남아 있는 한 손을 뻗는 중이었다.
퍼엉!
날카로운 파공성과 동시에 터져 나가는 도포 자락.
아슬아슬하게 적의 장력(掌力)을 피해 낸 풍운검군이 쾌속하게 손을 뻗었다.
푸푹!
종남파가 자랑하는 천궁지(天穹指)의 지풍이 미간을 관통한 후에야 허물어지는 신형.
하지만 촌각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수십의 적을 처리했음에도, 풍운검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건.’
틀림없다. 놈들은 두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고통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특정한 대법이나 몽혼약을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이는 분명 상리(常理)를 한참이나 벗어난 현상.
이런 적들이 무려 수만이다.
두려움이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개개인의 무위 역시 높으니, 그야말로 전장을 휩쓸기 준비된 전투 병기들.
‘좋지 않다. 아니, 최악이야.’
풍운검군이 정마대전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에 입술을 깨문 그때였다.
쉬이이익!
겹쳐지는 파공음과 함께 들이닥친 거대한 기운이, 전장의 한축을 파고들었다.
콰아아앙!
난데없는 굉음과 함께 수많은 육편(肉片)이 사방으로 튀었다.
동시에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을 중심으로 빈틈없이 검진을 구축하고 있던 종남파의 제자들이, 그 광경을 본 풍운검군이 눈을 부릅떴다.
“안 돼!”
“사, 사매!”
비명과도 같은 외침들.
어린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사문의 식구를 잃은 그들은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힌 채, 굳건했던 검진을 단숨에 허물어트린 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칠흑으로 뒤덮인 두 명의 사내.
아니, 혈검마군이 말했듯이 흑귀(黑鬼)라는 이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알 수 없는 존재들.
스아아아.
전신을 휘감으며 올올이 피어오르는 흑빛 기운이 공기를 잠식한다.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는 종남파 제자들의 마음을 옥죄고 손발을 묶었다.
“흡……!”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가쁜 숨소리.
섬뜩한 기세, 혹은 멀고 먼 어딘가에서는 피어(Fear)라 불리는 그 압도적인 기세에 모두가 짓눌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 대부분이.
슈확!
단숨에 공간을 지우며 쇄도한 풍운검군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고작 눈 한번 깜빡할 시간 만에 수십 명이 넘는 제자들이 죽었다.
장문인인 그가 지켜야 할 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 왔던 종남파의 동량(棟梁)들이 한순간에 무참히 꺾여 버린 것이다.
“감히!”
쉬쉬쉬쉬쉭!
분노가 실린 검 끝이 바람을 가른다. 구성에 다다른 천하삼십육검이 수십 개의 검영(劍影)을 그려내며 쏟아진다.
그리고, 덧없이 흩어졌다.
후우웅! 캉!
거대한 기운과 기운이 충돌한 순간, 풍운검군의 눈이 크게 부풀었다.
바람을 베어 낸 그의 애검이, 바람과 함께 검영을 지우며 휘둘려진 도끼날에 부딪혀 밀려나고 있었다.
“이 무슨……!”
그그극. 콰앙!
풍운검군이 경악성을 미처 다 토해 내기도 전, 마침내 엄청난 거력(巨力)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간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콰드득!
깊은 골을 만들어 내며 밀려나는 발끝. 가까스로 신형을 추스른 풍운검군은 손목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충격도 함께.
“네, 네놈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듬더듬 흘러나온 목소리.
성인 장정만 한 크기의 거대한 대부(大斧)를 쥔 흑귀를 응시하는 풍운검군의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떠져 있었다.
‘설마. 설마.’
풍운검군은 애써 부정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달랐다.
단신으로 종남파 장문인을 막아낸 저 흑귀는, 분명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얼굴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안다.
무식하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한 저 무기도. 비록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변색되었지만 아직 어렴풋이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목구비도.
“……흑부괴마(黑斧怪魔).”
풍운검군은 넋 나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오래전 풍운마군이 스승과 함께 전장에서 맞닥트렸던 마교의 대마두. 처음으로 그에게 죽음의 공포를 심어주었던 초절정의 강자.
그리고…….
“분명, 죽었을 터인데.”
마침내 그날 그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천마가 거느린 이십 사인의 거마(巨魔) 중 한 사람.
“한데, 한데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
하지만 풍운검군의 의문은 해결되지 못했다.
다음 순간 휩쓸어오는 강맹한 파공성이, 풍운검군을 현실로 끄집어 올렸으니까.
쐐애애액, 퍼걱!
목이, 피가 솟구친다.
차기 장로감으로 지목받았던 중년의 일대 제자가 단 일 수만에 목이 잘리는 광경에, 풍운검군은 이를 악물며 땅을 박찼다.
“사형들!”
공력이 실린 그 외침에, 뒤늦게 흑부괴마의 정체를 깨닫고 굳어 있던 노호검객과 태을무정검이 움직였다.
파팟!
흐릿해지는 신형. 신법을 발휘하여 깃털처럼 가벼워진 발끝.
그러나 흑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죽음에서 돌아온 흑부괴마와 결코 그에 못지 않는 막중한 기파를 뿜어내는 또 다른 흑귀를 향해 쏘아지는 풍운검군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오늘이, 바로 그 날일 수도 있겠군.’
이미 오래전 초인의 반열에 든 그다. 거기에 더해 도사로서는 자격이 부족하지만, 무인으로서는 훌륭한 두 사형도 있다.
한데 어째서일까.
그런 사형들과 일천에 달하는 제자들이 있음에도, 고작 둘밖에 안 되는 저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량수불.’
종남산을 떠나며 이미 각오했던, 그럼에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풍운검군은 검을 뻗었다.
슈화악!
그리고 공간을 일그러트리며 떨어져 내리는 검격에 맞서 거무튀튀한 도끼날이 휘둘려진 그때.
꽈아아앙!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거대한 충격과 함께, 풍운검군은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의 우려가 결코 단순한 두려움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 전투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는 누군가는,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콰드득.
느려진 세상 속, 일평생을 함께 해온 애검이 산산이 부서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풍운검군은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천하의 그 누구보다 강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언제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화의 바람을 불어왔던 누군가를.
그리고 누구보다 앞서 나아가고 있는 젊은이를.
‘진 도우(道友).’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
먹구름보다 어둡고, 핏물처럼 끈적한 마력의 파도가 사방을 휩쓸었다.
* * *
콰아아아…….
어느 순간, 등 뒤의 어디에선가 아스라이 울려 퍼지는 굉음에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려는 고개를 애써 되잡았다.
쉭, 푸푹!
손가락 한 마디 차이로 옆구리를 스쳐 지나간 화살이 사각에서 다가오던 적에게 틀어박힌다.
분명 공력이 실려 있었음에도, 놈은 고통이라고는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듯이 내게 쇄도해서 시뻘건 도기(刀氣)가 맺힌 신월도를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뻑!
한 박자 앞서 채찍처럼 휘두른 발끝을 따라, 산산이 부서지는 뼈마디의 감촉이 느껴졌다.
볼 것도 없는 전투 불능의 상태.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정강이가 으스러진 채 주저앉은 놈을 향해 한 손을 흩뿌렸다.
‘인벤토리 오픈, 소환.’
텅 비어있던 손아귀에 나타난 비수가 잡힘과 동시에 내쏘아진다. 그 섬광의 종착지는 정확히 적의 미간을 겨누고 있었다.
푹,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이미 삼 장의 거리를 더 나아간 후였다.
그리고 그런 내 곁에는 화왕(火王) 적천강이 있었다.
콰아아아!
탐욕스럽게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길과 그 끔찍한 열기에 녹아내리는 살갗들.
온 사방이 비명 대신 수증기가 악취로 뒤덮인 그때, 맹렬한 파공성이 귓가에 닿았다.
쐐애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