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68
#167화
“안 해!”
목청 보소.
팔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쩌렁쩌렁한 고함에 청풍이 입 안에 들어 있던 것을 꿀꺽 삼켰다.
“은인, 진짜 해 주기 싫은 모양인데요?”
나도 들었어, 인마.
제법 꼬장꼬장한 성격이라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지만 고함 몇 번에 물러날 거였으면 나 역시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우선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제 얘기부터…….”
“무슨 얘기? 결국 네놈의 병장기를 만들어 달라는 것 아니냐?”
“어, 그게 맞긴 한데요.”
“이미 십 년 전에 은퇴한 늙은이한테, 그것도 이 밤중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사람 죽이는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해?”
장태보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당장 노부의 눈앞에서 꺼지지 못할까!”
“흑, 흐아아앙!”
큰소리가 계속해서 터져 나오자 장태보의 품에 안겨 있던 꼬마가 울음을 터트렸다.
화섭자를 든 혁무진이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노인네 성질 하고는…….”
동감이지만 마음이 너무 급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거,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죽었다 깨어나는 한이 있어도 내 의뢰는 안 받아 줄 기세다.
‘이러면 곤란한데.’
원단에 있을 연회를 위해서는 당장 내일까지 돌아가야 한다.
잠시 망설이던 그때,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이게 뭔 소란이여?”
“장씨 어르신 목소리였는데? 옆집 항아 울음소리도 들렸고.”
“어르신. 거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여기서 정체가 까발려 봤자 서로 좋을 것이 없다. 아니지, 오히려 손해 보는 것은 저쪽이다.
장태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무것도 아닐세. 그냥 젊은 놈들이 만취해서 집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야.”
“쯧쯧. 요즘 것들이 다 그렇지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마음만 받지.”
그의 단호한 대답에 열려 있던 문들이 하나둘씩 닫히고 두런두런 들려오던 목소리도 뚝 끊긴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장태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돌아가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방금 전보다야 유해진 말투에 목소리도 작아졌지만 여전히 얼음이 뚝뚝 떨어진다.
하는 수 없다.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며 울먹거리는 꼬마를 달래는 장태보의 뒷모습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귀가 어둡군.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그럼 이만.”
몸을 돌리려던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도 있을 만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는 꼭 명장(名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르신을 찾아온 것이고요.”
그러나 장태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서쪽으로 한 시진만 가면 나오는 큰 마을에 대장간이 하나 있지. 거기 주인장 솜씨가 제법이더군.”
“만년한철을 제련할 수 있을 정도입니까?”
만년한철. 천하에서 가장 단단하고 예리한, 검기까지 버텨 내는 이능(異能)이 깃들어 있는 신비로운 광물.
매우 값지고 희귀한 탓에 어지간히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도 평생 구경 한 번 못 해 보는 물건이라고 했다.
‘바로 그 만년한철이라면 마음이 동할지도 몰라.’
하지만 장태보의 반응은 내 예상을 한참 빗나갔다.
“만년한철이라, 그럼 철기방으로 가야지. 방주라는 녀석한테 맡기면 그럭저럭 잘 해낼 걸세. 내 어깨 너머로 배운 게 있으니 말이야.”
무덤덤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만년한철이라는 희대의 금속조차 구리와 다름없음을.
“밤이 늦었군.”
명백한 축객령. 나는 별수 없이 발을 돌렸다. 혁무진과 청풍이 뒤따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내일까지는 계속 비벼 봐야지.”
“쩝, 쩝쩝쩝.”
“보니까 보통 고집불통이 아니던데…… 아니, 그건 그렇고 만년한철은 어디서 구하셨어요?”
“말하자면 길다.”
“쩝쩝, 쩝쩝쩝.”
“…….”
“…….”
나와 혁무진의 눈빛에 살살 눈치를 살피던 청풍이 보따리를 내밀었다.
“하나 드실래요? 아직 많이 남았는데.”
우리는 동시에 외쳤다.
“안 먹어!”
* * *
다 무너져 가는 객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작은 마을에 하나뿐인 객잔답게 어디 빠지는 곳 없이 전부 낡고 후졌지만 딱 하나 장점이 있었다.
바로 객잔 주인이 장씨 촌에서 사십 년을 산 토박이라는 것이었다.
무림인의 행색을 한 우리를 경계하던 그는 은자 하나를 쥐여 주자 입이 귀밑에 걸렸다.
“장씨 어르신 말입니까?”
“네. 저 언덕 너머에 사시는 분이요.”
객잔 주인은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당연히 알고 있습죠. 가끔 저희 객잔에 오십니다.”
“그런가요?”
“예. 혼자 자작도 하시고, 가끔 노름판에 끼기도 하시지요.”
“도박을 좋아하시나 봐요?”
“그렇다기보다는 그저 소일거리로 하시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칠 주야에 한 번 집 밖으로 나올까 말까 하는 분이라서요.”
“집돌이구만.”
“예?”
“아, 그냥 혼잣말이었습니다. 노름은 잘하시는 편이고요?”
잠시 생각하던 객잔 주인이 대답했다.
“그저 그렇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항상 조금씩 잃는 편이긴 한데, 밥벌이도 안 하면서 매번 오는 걸 보면 젊을 때 한 재산 모아 둔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자고로 덕후들은 덕질에 돈을 아끼지 않는 법이니까.
무인이라면 하나같이 병장기 덕후들이고 장태보는 최고의 커스텀 제작자 중 한 사람이다.
돈이라면 남부럽지 않게 벌었을 것이 분명하다.
‘돈으로 꼬드기는 건 역시 무리인가?’
어젯밤 일로 대충 짐작은 했지만 정말 까다로운 사람이다.
거래라는 건 상대방이 원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줘야 성사되는 법인데, 그는 지금의 생활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 뭐 없나요? 예를 들면 가끔 뭔가를 만드신다든지.”
“만들다니요?”
“그 왜, 식칼이라거나. 곡괭이라거나.”
반복되는 생활은 습관으로 굳어진다. 일평생을 불과 철을 다루며 살았던 장태보는 말할 것도 없다.
나였다면 가만히 있는 게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객잔 주인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께서요? 어찌나 움직이는 걸 싫어하시는지 겨울에 땔 장작도 표국에 웃돈을 주고 운송시키는 분입니다.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
표국 로켓 배송이여, 뭐여.
집돌이에 귀차니즘이 더해지니 도무지 파고 들어갈 틈이 없다.
아침 식사를 하며 대화를 듣고 있던 혁무진과 청풍이 대뜸 끼어들었다.
“완전 철벽인데요?”
“쩝쩝. 와, 저런 사람 처음 봐요.”
“……나도 당신 같은 사람 처음 봐.”
이 객잔의 단점 중 하나는 음식을 더럽게 못한다는 것이다.
일단 주인의 손만 봐도 위생이 심각하게 의심되는 수준인데, 청풍은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남은 음식을 쓸어 담았다.
“맛있어요?”
“네! 할아버지랑 살 때는 매일 풀에 벽곡단만 먹었거든요.”
“아, 벽곡단.”
그거라면 인정이지. 그걸 먹느니 진호 형의 토사물로 부침개를 부쳐 먹고 말겠다.
“…….”
“조장,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우물우물, 은인. 무슨 일 있어요?”
“……아뇨, 그냥 속이 좀 메슥거려서.”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건 좀 아니다.
나는 청풍이 마지막 접시를 깨끗이 비우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나가자.”
“벌써요? 이제 겨우 진시(辰時)인데.”
“저 만두 하나만 더 먹어도 돼요?”
객잔 주인이 냉큼 끼어들었다.
“어르신이 나이가 있으셔서 아침잠이 별로 없으십니다. 그리고 만두는 지금 당장 싸 드리겠습니다.”
“자, 됐지?”
나는 주인장에게 은자 하나를 더 건넸다. 그는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객잔 앞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어르신, 편안한 밤 되셨습니까.”
마당에 나와 있던 장태보는 우리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정확히는 나를 보고 그런 거겠지만.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래도 그냥 갈 수야 있나요.”
나는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최하급 헌터 시절에는 면전에 대고 쌍욕 하는 놈들도 있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오기가 뭐해서 약소하지만 선물도 하나 사 왔습니다.”
“응?”
“객잔 주인이 말이 많더라고요. 얼마 전에 지인이 삼십 년이나 묵은 하수오(何首烏)를 캤다고 그러지 뭡니까?”
하수오는 현대에서도 아직까지 쓰이는 한약재다.
무협 소설에서는 툭 하면 튀어나오는 게 백 년, 천 년 묵은 하수오인데 여기서는 삼십 년짜리 하수오를 캐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즉, 이 근방에서는 돈이 있어도 찾기 힘든 물건이라는 뜻이다.
“삼십 년 묵은 하수오라…… 그래서?”
“요즘 몸이 허하시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서요. 어르신 생각이 나서 챙겨 왔습니다.”
진호 형은 입버릇처럼 사람은 나이가 서른만 넘어가도 몸이 망가지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눈은 뻑뻑하고 속은 쓰리고, USB를 빌려 간 다음 날엔 다리에 힘도 제대로 안 들어간다는 것이다.
한창때인 진호 형도 이 정도인데 나이 든 사람들은 오죽할까. 삼십 년 묵은 하수오라면 건강 챙기기에 이만한 것도 없다.
“흐음. 자네가 먹지 그러나?”
“어이구, 제가요? 아닙니다. 이건 어르신 드리려고 가져온 건데요.”
미끼에 흥미를 보이는군.
나는 낚시대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하수오를 내밀었다.
제대로 섭취하면 1년 정도의 공력을 축적할 수 있는 물건이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다.
“드시지요. 생으로 뿌리까지 씹어야 최고라고 합니다.”
“흠, 그럴까?”
그래, 이거 얼른 먹고 만년한철 창으로 뱉어라.
내 환한 웃음에 장태보가 하수오를 입 안에 쏙 넣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오, 분위기 좋고.’
지금처럼 분위기 좋게 살살 달래다가 의뢰를 넣으면……!
그러나 다음 순간, 희망찬 미래가 뚝 끊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퉤!”
“……?”
“……?”
“……?”
나와 혁무진, 청풍은 반쯤 씹힌 채 땅에 버려진 하수오를 바라봤다. 저걸 뱉어? 삼십 년짜리 하수오를? 왜?
우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장태보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물었다.
“자네들 왜 그러나? 무슨 일 있나?”
“……아니, 그걸 왜 뱉으셨습니까?”
“써.”
“예?”
“쓰다고.”
당당한 대답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저게 말이야, 방구야.
“아니, 몸에 좋은 거니까 쓴 게 당연하죠.”
“쯧쯧. 자네 하수오 먹어 본 적 없지?”
“……네.”
백년설삼은 먹어 본 적이 있긴 한데, 그때는 내 몸이 아니라 모르겠다.
얼떨결에 수긍하자 장태보가 품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휙 던졌다.
“이게 뭡니까?”
잡고 보니 연필통만 한 목곽이다. 장태보가 같잖다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까 봐.”
가끔 도박한다더니 말투가 타짜 수준일세.
나는 왠지 모를 긴장감과 함께 목곽을 열어젖혔다.
“사쿠라! ……가 아니라 하수오네?”
하수오여?
그것도 그냥 하수오가 아니다.
내가 앞서 장태보에게 준 하수오보다 몸통도, 뿌리도 굵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이템 확인.’
띠링.
아이템창
[오십 년 묵은 하수오]종류 : 영초(靈草)
등급 : 일류
제한 : 없음
설명 : 오십 년간 자연에서 자라 비로소 영기(靈氣)를 머금기 시작한 하수오. 내공심법을 익힌 무인이 흡수한다면 최대 2년 정도의 공력을 얻을 수 있다.
“…….”
삼십 년짜리도 구하기 힘들다는데, 오십 년짜리는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힌 내게 장태보가 승자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넉 달에 한 번, 구방표국(九房驃國)을 통해 들어오는 물건이지. 거기 국주가 나한테 빚이 좀 있거든. 입도 무겁고.”
“……그렇습니까.”
구방표국 정기 배송이었구나. 어쩐지 노인네가 웬만한 청년보다 정정하더라.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은 집어치우세. 난 더 이상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야.”
“그래 보이긴 하네요.”
모아 놓은 돈도 있겠다, 직업적으로 성공도 이뤘겠다.
심지어 머리털도 풍성충이다.
없는 거라고는 가족밖에 없는데…… 예쁜 할머니를 소개시켜 준다고 하면 날 죽이려고 하겠지.
“제가 어떻게 해야 의뢰를 맡아 주시겠습니까?”
장태보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불로초를 구해 오면 생각해 보지.”
“예?”
“못 들었나? 불로초 말일세. 불로장생을 가져다준다는 영초.”
띠링.
– 퀘스트, [불로초를 찾아서]가 생성되었습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 / N
이번엔 내가 외쳤다.
“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