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12
#711화
때로 어떤 종류의 침묵은, 수많은 감정과 말을 대신하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그, 우선 손부터 좀 빼고 얘기할까요?”
“…….”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천강은 손을 빼지도, 그렇다고 뭐라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내 얼굴과 전신 곳곳을 훑어볼 뿐이었다.
이 새끼 뭐지? 설마 이게 다 꿈인가?
딱 그런 눈빛이었고, 나는 적천강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지.’
눈앞에서 다 죽어 가던 놈이 멀쩡히 살아났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했다던 옆 동네 예언자도 손바닥에 상처는 남아 있었는데, 다섯 번의 레벨 업은 나를 상처 하나 없는 애기 피부로 만들어 줬다.
심지어 적천강이 지켜보는 앞에서.
쫙!
난데없이 울려 퍼지는 찰진 소리.
온 힘을 다해 셀프 귀싸대기를 날린 적천강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더니,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노부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냐?”
내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뇨.”
“아무리 생각해 봐도 꿈 같은데.”
“그럼 뺨 한 대 더 때려 보세요.”
쫘악!
역시 노빠꾸.
어지간히도 강하게 때린 모양이다.
입에 고인 핏물을 걸쭉하게 뱉어 낸 적천강이 심호흡했다.
“……염병할. 꿈은 아니로군. 그럼 기문진(奇門陣)에 의한 환영인가?”
“어, 그것도 아닐걸요. 만약에 제가 환영이면 지금 노야가 잡고 있는 손은 누구 겁니까.”
“네 환영을 덧씌운 암천의 술사겠지. 아니면 죽은 줄 알았던 남천마후거나. 노부가 환영에 홀린 틈을 타 일격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
“상상력 한번 끝내주시네. 노망나셨어요?”
“말하는 싸가지만 보면 영락없이 네놈이긴 한데. 허어. 정말이지 미치겠군.”
“저도 미치겠습니다.”
진심이다.
지금까지 시스템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숨겨 왔는데,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발각당했으니까.
한숨을 내쉰 나는 여전히 혼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적천강을 바라보았다.
대충 빡빡 밀어 버린 민머리에 낡은 승복을 걸친 그의 모습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그 꼴은 뭡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변복(變服)이지. 이 정도면 그럭저럭 승려 같지 않으냐?”
“절간에 불 지르고 도망친 파계승 같은데요.”
“……빌어먹을 놈. 노부라고 땡중 흉내를 내고 싶었겠느냐? 암천의 눈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머리카락이 워낙 눈에 띄는 바람에 싹 밀어 버렸지.”
하긴,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해도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어디에 가도 눈에 띄기 마련이고, 소문이 퍼지는 건 당연지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내가 아는 혈승(血僧)은, 단신으로 광서성을 피로 물들인 무시무시한 대마두니까.
“그래서 암천의 눈을 피해서 승려로 변복까지 하셨다는 분이, 무고한 무림인 수백 명을 때려죽였습니까?”
“그건 그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워낙…… 뭐?”
뭐라 말을 이으려던 적천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고한 무림인이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냐?”
“……?”
“노부가 광서성에서 뜻하지 않게 이목을 끈 것은 사실이다. 사파 잡놈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별의별 개짓거리를 다 하고 있길래 손 좀 봐줬지.”
“사파? 지금 사파라고 하셨어요?”
“그래. 암천의 소행인 것처럼 위장해서 온갖 패악질을 부리고 있었다. 직접 찾아가서 방파 여섯 개 정도를 박살 내 버렸더니 나머지 잔챙이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더군.”
“……!”
입을 벌린 채 적천강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전후 사정을 알아차렸다.
‘광서성에서 도망쳐 왔다는 그 무림인.’
남만에 입갤하자마자 풍토병에 걸려 죽었다던 그 무림인이, 알고 보니 적천강의 불주먹을 피해 도망쳤던 사파 잔챙이였던 거다.
자고로 가재는 게 편이고, 사람은 눈치가 있어야 하는 법.
가뜩이나 외지인이 배척받는 남만에서 스스로 나쁜 놈이라는 걸 밝힐 수도 없었을 테고, 그 과정에서 적천강에게 죽은 사파 무림인들은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협객들로 둔갑했다.
워낙 폐쇄적이고 외부와 교류가 없는 남만이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이게 시발, 이렇게 되나.’
멍하니 적천강을 바라보던 나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오는 길에…….”
“누굴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만났다. 장강에서 물질하는 수적 놈들부터 난데없이 창칼부터 들이댄 남만 놈들. 그리고 네놈의 수하들까지.”
“아.”
“표왕(漂王)의 손녀가 노부를 보자마자 그러더군. 네놈이 위험에 처했다고. 혁가 놈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질질 짜는 통에 손목을 부러트릴 뻔했다.”
말만 들어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누구보다 간절했을 그들의 모습이.
그리고 내가 위험하다는 말에 어떤 의문도, 망설임도 없이 곧장 달려왔을 적천강의 모습이.
“한데, 왜 이야기가 이쪽으로 빠진 거냐? 설명이 필요한 건 되레 노부이거늘.”
짐짓 인상을 구기는 적천강을 보며, 나는 문득 실소를 흘렸다.
“……웃어?”
황당해하는 적천강의 모습에 웃음이 더욱 짙어진다.
“당연히 웃어야죠. 이렇게 살아서 다시 만났는데.”
“……!”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궁금하신 점이 많겠지만 나중에 다 설명해 드릴게요. 반드시.”
내 말을 들은 적천강은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염병할 놈 같으니.”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한마디였다.
마치 내게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고, 그와 나 사이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자꾸 웃지 마라. 정든다.”
“정이 안 든 것치고는 꽤 서럽게 우시던데. 아, 물론 노야 얘기는 아니고요.”
“……그 주둥이 닥치지 못할까.”
이제야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는지, 씨근덕거리면서도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워 주는 적천강이었다.
투둑.
내 전신을 뒤덮고 있던 먼지와 돌가루가 쏟아져 내린다. 통증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순간 눈앞이 흐릿해졌다.
‘음.’
나는 침음성을 삼켰다.
무려 다섯 번의 레벨 업으로 멀쩡하게 회복된 몸은 의지에 따라 움직였지만, 쉴 새 없이 반복된 전투로 시달린 정신은 피로하기 그지없었다.
‘아, 자고 싶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몸도 마음도 개운하게 푹 자고 일어나,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조금씩 잠기운에서 벗어나는 그런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각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이들은 신음을 내뱉으며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저들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영영 깨울 수 없는 잠에 빠지고 만다.
뒤늦게 주위를 둘러본 적천강 역시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노부가 더 서둘렀다면 좋았을 것을.”
부질없는 후회고, 괜한 자책이다. 적천강이 오지 않았다면 나를 포함한 모두가 이 자리에서 뼈를 묻었을지도 몰랐으니까.
“서두르자. 더 늦기 전에.”
적천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가장 정확하고 빠른 방법을 선택했다.
‘스킬, [기감] 발동.’
띠링.
시스템이 작동했음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나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 푸른 원이 일정한 범위를 감싸 안았다. 그와 동시에 곳곳에서 솟아오른 레벨 표시 창들을 보자 가슴이 답답해진다.
‘너무 적어.’
눈으로 확인한 레벨 창의 개수는 삼십여 개가 전부였다.
일천을 헤아리던 남만 전사들도, 삼백 명의 백천대도 이 자리에 뼈를 묻었다는 뜻이다.
이 와중에도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는 이들의 상태가 그리 위중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남천마후 역시 힘을 최대한 아껴야 했을 테니까.’
무거운 마음을 담아 뇌까린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쓰러진 이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백천대주 왕호. 마지막 순간까지 남천마후를 향해 달려들었던 그의 완맥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등줄기를 통해 공력을 흘려 보냈다.
스아아아아.
“쿠, 쿨럭.”
죽은 핏물을 한 움큼 뿜어낸 왕호의 창백한 얼굴에 붉은 핏기가 돌기 시작한다.
백천대 중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만큼 타격을 입었던 그였으나, 이것으로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왕호와 달리, 한눈에 보기에도 막중한 부상을 입은 이들 역시 있었다.
흐으으. 흐으.
코끝에서 흘러나오는 숨이 가늘다. 무릎을 꿇은 채 쓰러진 거한의 정체를 알아본 적천강이 침음성을 흘렸다.
“……된통 당했군. 이놈 이거, 정마대전 때도 이 정도 부상을 입은 적은 없었는데.”
목숨마저 내걸었던 남천마후의 일격은 그만큼 무시무시했다.
전신에 깊숙이 틀어박힌 무수한 검의 파편과 잔해.
거기에 더해 나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입은 막대한 내상으로 정신까지 잃은 야수묘왕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노야, 혹시.”
내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목소리에 담긴 우려를 알아차린 적천강이 고개를 저었다.
“야수묘왕은 무쇠처럼 단단한 놈이니 걱정 말거라. 노부가 최선을 다한다면 능히 살아남겠지. 한데…….”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 확신이 담겨 있던 첫 마디와 달리, 망설이는 듯한 눈빛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는 거대한 백호를 향한다.
“저 짐승은 모르겠다. 보아하니 짐승치고는 범상치 않아 보인다만, 꼭 살려야 하는 녀석이냐?”
살려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지만 내 생각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기도 전에, 나지막한 의념이 울려 퍼졌다.
– 만약 그리된다면. 그 역시 내게 주어진 운명이겠지.
“……!”
– 제법 오랜 세월을 살았구나, 늙은 인간이여. 비록 이무기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얼굴과는 다르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지.
눈을 부릅뜬 적천강에게서 고개를 돌린 수호령의 시선이 나를 향해 옮겨진다.
– 가까이 오너라.
나는 입술을 깨물며 수호령에게 다가갔다.
머리맡에 앉아 핏물로 흠뻑 젖은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자, 낮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건방지구나. 감히 이 몸에게 손을 대다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저 말없이 목덜미만 쓰다듬는 내게, 수호령이 의념을 흘려 보냈다.
– 사실 썩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구나. 아주 오래전에도 너처럼 괘씸한 인간이 있었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남만야수궁의 초대 궁주.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수호령이 마음을 열었던 유일한 인간.
–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모든 것이 다른데, 너를 보고 있자면 이미 수백 년 전 흙이 되어 버린 그가 떠오른다는 것이.
“……!”
– 아마도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구나. 본능적으로 널 구한 것도, 인간에 불과한 네게 신석(神石)을 맡긴 것도.
손에 닿아 있는 백호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크게 들썩인다.
거칠게 호흡한 수호령이 청백색의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수호령이 왜 신석을 필요로 하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지.
‘균열.’
수호령은 스스로 저 짙은 어둠을, 균열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수 개월 전, 어느 이무기가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