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21
#720화
후우.
선선한 바람이 느껴진다. 작게 심호흡한 나는 주위를 바라보았다.
성지(聖地).
그 두 글자가 이토록 어울리는 장소가 또 있을까.
하지만 내가 발을 딛고 선 이 자리는 몸통에 불과하다.
‘이런 성지조차, 심장은 따로 있지.’
생명과 정화의 기운이 가득한 곳.
이미 앞서 한 번 죽어 가던 내 몸뚱어리를 되살린 바로 그 장소.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연못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태양이 없음에도 머리 위로 내리쬐는 빛은 따스하고, 온 사방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과 풀은 싱그럽다.
아연한 표정으로 이 기이한 공간을 바라보던 적천강과 야수묘왕은 뭐라 말할 듯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굳게 입을 다문 채 내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인내심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찰박.
거침없이 연못을 향해 걸음을 내딛자, 차가운 강물이 금세 허리까지 차올랐다. 그런 내 모습에 적천강이 경호성을 토해 냈다.
“저, 저 녀석이……!”
자결이라도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적천강은 당장이라도 내 멱살을 붙잡고 끌고 나올 기세였지만, 나는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새끼손가락을 깨물었다.
으득.
희미한 고통과 함께 살이 갈라지고 피가 흐른다.
그러나 나는 눈을 부릅뜬 적천강을 향해 씩 웃어 보인 뒤, 망설임 없이 맑은 강물에 손을 담갔다.
‘일. 이. 삼…….’
마음속으로 느릿하게 숫자를 센 뒤 손을 빼자, 불과 삼십여 초 남짓한 시간 만에 완전히 아문 새끼손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강물에 뛰어들 것 같던 적천강도, 그런 그를 만류하던 야수묘왕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요희가 한 말이 사실이었군. 전부 사실이었어.”
옛날 사람들이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고사성어를 심심해서 만들었겠나.
역시 입 아프게 떠들어 봤자,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른 법이다.
‘일종의 퍼포먼스지.’
다행히 이 퍼포먼스의 효과는 확실했고, 더불어 나 역시 한 가지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효능이 남아 있어.’
솔직히 약간 걱정했다.
핵을 파괴당한 골렘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마기에 잠식당한 신석(神石)으로 인해 성지 역시 사라졌을까 봐.
하지만 그런 내 우려는 새끼손가락의 상처처럼 깨끗이 사라졌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다.
‘이거였어, 정답이.’
시스템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항상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할 뿐이며, 그 단조롭기 그지없는 텍스트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바로 이번처럼.
‘퀘스트 정보란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라고 적혀 있었지. 분명히.’
맞다. 처음부터 내게 주어진 퀘스트 임무는 [타락한 신물]의 ‘처분’이지, ‘파괴’가 아니었다.
나는 그 의미를 비교적 뒤늦게 깨달았고, 수호령과 얽힌 기억 속에서 한 신비로운 장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중태에 빠져 있던 내 몸을 치유하고, 몸속 노폐물을 정화시켜 주었던 어느 연못에 관한 기억을.
‘치유와 정화.’
저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효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나, 이 이상의 선택지는 없다.
나는 연못을 중심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스륵.
잔잔한 물결이 나를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연못의 수심은 그리 깊지 않았고, 투명하리만치 맑은 수면에는 긴장감으로 굳어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출렁이고 있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나는 꽉 쥐어진 주먹을 바라보았다.
[타락한 신물]의 단단한 감촉과 함께, 손가락 사이로 울컥거리며 솟구치는 강대한 마기(魔氣)가 느껴진다.‘……근데 이거, 잘못해서 역효과 나면 진짜 대환장 파티 시작인데.’
농담이 아니라 이 정도 마기라면 연못은 물론 성지까지 조져 버리고도 남는다.
그때는 진짜 찐 트루 독혈지가 되어 버릴 테고, 이제 막 저승 전입 신고를 끝마친 수호령이 매일 밤 꿈속에 등장해서 하악질을 해 대겠지.
하지만 뭐…….
‘나보고 어떡하라고. 이거 말고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데.’
시바,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은 나는, 손에 쥔 [타락한 신석]을 곧장 물속으로 처박았다.
첨벙! 촤아아악!
잔잔하던 수면이 흩어지고 솟구친 물보라가 내 전신을 흠뻑 적신다.
그리고…… 온 사방이 고요해졌다.
“……?”
뭐야, 이거. 왜 이렇게 조용해.
억겁과도 같은 짧은 시간 속, 잠시 망설이던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살짝. 아주 살짝.
그리고 내가 조심스럽게 실눈을 뜬 그 순간.
부그르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수포(水泡)와 함께.
쉬우우우우.
연못의 중심으로부터, 혼탁한 어둠과 뒤섞인 물살이 회오리쳤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슨…….
‘시벌, 딱 여기네?’
한 줄기 깨달음과 동시에, 거대한 물의 기둥이 내 발아래에서 솟구쳐 올랐다.
* * *
콰아아아아!
반응할 틈도 없었다. 그저 사방이 물이었고, 어둠이었다.
대비할 틈도 없이 들이닥친 혼란 속에서 나는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 아니, 몸부림치려 했다.
다음 순간, 비로소 현실을 깨닫지 않았다면 그러했을 것이다.
“……!”
똑똑히 보였고, 느꼈다.
나를 중심으로 힘차게 소용돌이치는 물살과 어둠을. 그리고 물 속이라면 느낄 수 없는 신선한 공기와 바람을.
‘공기? 바람?’
나는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면 속 부유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가슴께까지 차올랐던 물도 사라졌다.
발아래에는 단단한 지면이 있었고, 사방에는 물살과 어둠이 끝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를…… 감쌌다?’
틀림없다. 이 거대한 물의 기둥은 내 전신을 휩쓰는 대신 감싸 안았고 사방을 가로막은 어둠과 물결 너머에서는 있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광경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이건.’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극심한 혼란으로 인한 환각 증세, 그런 것 따위가 아니다. 이 연못에 담긴 어느 장소의 역사일 뿐이다.
아니, 탄생과 이 땅과 운명을 함께해 온 신물(神物)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신석(神石).”
신음처럼 중얼거린 나는 아연한 눈빛으로 사방을 가로막은 물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쉼 없이 흐르는 물결 속에서는 아득한 시간도 함께 흐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폐한 땅에서 고개를 내민 새싹이 거목(巨木)으로 성장하고, 풀과 꽃이 자라나자 동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다.
‘빠르다.’
찰나라고도 부를 수 없는 짧은 시간 속, 물결에 비친 풍경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수십 번씩 뒤바뀌는 낮과 밤. 어느 날은 천둥과 번개가 온 세상을 가득 메우고, 또 어느 날은 산이 무너져 강을 지웠다.
수백. 혹은 수천 년.
하지만 변화무쌍하기 그지없는 이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신석은 오롯이 제 자리를 지켰고, 그런 신석의 곁을 지키는 존재들 역시 있었다.
말. 원숭이. 표범. 곰…….
종도. 생김새도 다른 짐승들. 그러나 감히 짐승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들.
그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빛났다가 사그라들었고, 이내 눈처럼 새하얀 한 마리의 백호가 신석을 지키기 시작했다.
‘수호령(守護靈).’
그리고 이내 어둠이 찾아왔다. 몸서리칠 만큼 끔찍한 어둠이, 끈적하고도 악한 기운이 물결 속에서 넘실거렸다.
긴 세월을 지나, 마침내 도달한 그 날의 기억.
하지만 마지막 수호령은 새하얀 갈기를 흩날리며 달려나갔다. 포효를 내지르며 어둠을 물어뜯고 할퀴었다.
전신 곳곳에 자리 잡은 상흔(傷痕)으로 마기가 스며들 때까지. 청백색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던 그 순간까지.
그리고 신석에 담긴 모든 기억도 함께 끝났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일지도 몰랐다.
스륵.
다시 한번 수면이 흔들린다. 어둠이 사라지고 사방을 휘감은 물의 기둥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손에 쥔 무언가를 연못 깊숙이 담그고 있는 청년의 모습은, 모를 수 없을 만큼 익숙했다.
신석의 새로운 기억. 그 시작은 바로 나였고, 이는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했다.
띠링.
귓가를 파고드는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물기둥 속에서 몸부림치던 어둠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내 눈앞에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 [생명의 연못]은 악하고 불순한 모든 기운을 정화합니다.
– [타락한 신물]에 스며 있던 [마기]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 임무 : [타락한 신물] 처분 (완료)
– 퀘스트, [타락한 신물]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막대한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했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
–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
.
띠링. 띠링. 띠링.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시스템 알림과 허공을 메우는 홀로그램 창들.
그러나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멀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서서히 흩어지는 물기둥 사이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한 가지 물건 때문이었다.
슥.
홀린 듯 뻗은 손을 따라 물살이 갈라진다.
어린아이의 주먹보다 작고 가벼운, 하지만 믿을 수 없이 따스한 그것에 손끝이 닿은 그 순간.
화아아악!
눈부신 광휘가 부풀어 올랐다.
사방을 가로막고 있던 물기둥이 하늘 위로 솟구침과 동시에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촤아아아악!
숨겨진 성지를 넘어, 머나먼 어딘가로 끝없이 퍼져나가는 생명의 힘.
새로운 신석을 손에 쥔 나는 문득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점점이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사이로 다시 한번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띠링.
– [생명의 연못]에 담긴 기운이 비가 되어 이 땅 곳곳에 스며듭니다.
– 땅은 더욱더 비옥해지고, 초목은 늘 푸를 것이며, 상처 입은 이들은 치유될 것입니다.
– [생명의 연못]이 모든 기운을 잃고 메말랐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간에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 [신석]은 지금까지 그러했듯 이 땅에 존재할 것입니다. 새로운 [수호령]과 함께.
새로운 수호령?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저벅.
이제는 더 이상 연못이라 부를 수 없는, 메마른 지면을 딛고 선 커다란 앞발.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눈처럼 새하얀 터럭이 흩날리고, 한층 맑고 또렷해진 청백색의 눈동자는 기억 속 누군가를 쏙 닮아 있었다.
“……그래, 너구나.”
크르릉.
무야호. 아니, 새로운 수호령이 다가와 머리를 비빈다.
나는 말 없이 그런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고, 넋 나간 얼굴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적천강은 간신히 입술을 뗐다.
“……저놈, 노부가 데려가면 안 되겠느냐?”
순간 정색한 야수묘왕이 되물었다.
“되겠습니까?”
그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빗물에, 지금 막 푸른 잎사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 비가, 사흘에 걸쳐 남만 땅 전체를 적시리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