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20
#719화
퀘스트, [타락한 신물]을 수락하시겠습니까?
Y / N
갑작스럽게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 창은 이뿐만이 아니다.
나는 새롭게 생성된 퀘스트 정보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퀘스트
[타락한 신물]한때 이 땅을 수호하던 신석(神石)은 이미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마기에 잠식당한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불씨와 같으며,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타락한 신물을 처분해야 합니다.
등급 : 초절정
제한 : 진태경
임무 : [타락한 신물] 처분 (미완료)
보상 : 임무 수행 방식에 따라 변동
실패 : [타락한 신물]의 마기 증가
퀘스트 정보창을 끝까지 읽은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수락.’
– 퀘스트, [타락한 신물]을 수락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반강제로 진행되었던 몇몇 퀘스트와는 달리 이번에는 버젓이 선택지가 있었지만, 내게 있어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마기를 억누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신석. 아니, 마기에 잠식당한 [타락한 신물]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폭탄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갖고 있던 인물이 야수묘왕이라 다행이었지, 어지간한 절정 고수라 해도 저것에 담긴 마기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퀘스트 정보창에 적혀 있는 내용처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균열을 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던가.
마지막 순간 스스로 몸을 내던졌던 수호령을 생각해서라도 저 폭탄이 터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와 같은 생각을 떠올린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마기라니, 안 되겠군.”
눈살을 찌푸린 채 중얼거린 적천강이 나와 야수묘왕을 향해 손짓했다.
“빠져 있어라. 노부가 처리할 테니.”
적천강이 한 말의 의미를 짐작한 듯, 야수묘왕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적 노, 그 말씀은 설마.”
“네놈이 생각하는 그 설마가 맞다. 화근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아예 싹을 뽑아 버려야지.”
“하지만 이건…… 결코 쉽게 파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려를 표하는 야수묘왕에게 돌아온 적천강의 대답은, 실로 짧고 간결했다.
“그건 네놈이나 그렇고.”
“…….”
“난 돼.”
그야말로 씹상남자식 화법.
짤막한 한마디로 남만 최고의 짐승남인 야수묘왕마저 입 닥치게 만든 적천강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화아악.
그의 손을 타고 모여들기 시작한 열양지기가 끔찍한 열기를 토해 낸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흡사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하지만…….
“노야.”
고심 끝에 불쑥 튀어나온 한 마디.
막 출수(出手)하려던 적천강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뭐냐?”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거.”
“왜?”
“나름대로 좀 생각해 봤는데, 함부로 건드리면 재미없을 것 같아서요.”
“뭐라?”
내 진중한 목소리에, 적천강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네놈이 생각이란 걸 했단 말이냐?”
“…….”
말문이 턱 막히네, 아주.
짜게 식은 내 표정을 바라보며 헛기침한 적천강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두면 언제고 화근이 된다. 한시라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맞아.”
“그건 저도 알죠.”
“아는 놈이 왜 그러느냐? 노부가 못 미더워서?”
“어허. 말씀을 왜 그렇게 하세요. 제가 노야 아니면 누구를 믿는다고.”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절반 정도는 그런 마음이 없지 않아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적천강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혹시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만약에 완전히 파괴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타락한 신물]은…… 예를 들자면 내 앞에 놓여 있는 찻잔 같은 거다.
잔이 온전하다면 찻물은 흘러넘치지 않는다. 그러나 찻잔이 깨지면, 찻물은 사방으로 넘쳐 흐를 것이다.
‘마기를 억누르지 못하게 되면, 그땐 또 한 번 지랄 나는 거고.’
미친 호랑이 한 마리가 아무리 날뛰어 봤자 때려잡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마기가 퍼져 나간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아니, 그때는 골치 아픈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겠지.
그래서 적천강을 말려야 했다.
내가 얼마나 그를 신뢰하느냐와는 관계없이, 이런 도박에 다른 사람의 목숨을 판돈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으니까.
‘그게 천분의 일. 만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확률이라 해도 지금은 안 돼.’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장렬히 싸우다 죽고, 이지를 상실한 괴물이 되어 죽고, 칼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이들조차 그 지옥도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게 죽어 나갔다.
아마 수호령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균열을 닫지 않았다면, 지금쯤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잠깐.
‘수호령?’
문득 떠오른 기시감과 함께 그 세 글자가 뇌리에서 빙글빙글 맴돈다.
녀석을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차례차례 눈과 귀를 스치고, 마침내 한 줄기 깨달음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
나도 모르게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외마디 탄성.
이놈이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적천강과 야수묘왕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그래, 갑자기 왜 또 혼자서 지랄 염병이냐? 노부도 좀 알자.”
“무슨 묘책(妙策)이라도 떠오른 게 아니겠습니까?”
글쎄. 이걸 묘책이라고 부를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하지만 지금 내가 품고 있는 짐작이 사실이라면……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다.
‘적어도 손해 볼 건 없겠지.’
내심 중얼거린 나는, 아직 닫지 않은 퀘스트 창과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두 분 모두, 잠깐 저랑 같이 바람 좀 쐬시죠.”
* * *
두두두두!
일제히 바람을 가르며 달려나가는 일단의 무리는 조촐했다. 아니, 머릿수만 보면 ‘무리’라는 단어 자체부터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호랑이 셋에 사람 셋.
하지만 가까이에서 그 면면을 살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장 내 양옆으로 달려 나가는 두 사람만 해도 그렇다.
“짐승이 빨라 봤자 얼마나 빠를까 싶었는데, 이것도 썩 나쁘진 않구먼. 안장도 편안하고.”
흥미로운 눈빛으로 열심히 달려나가는 호랑이를 요모조모 뜯어보는 적천강의 모습에, 왼편에서 달려 나가던 야수묘왕이 넙죽 대답했다.
“저희 남만야수궁에서도 가장 용맹하고 빠른 녀석 중 하납니다. 정마대전 당시에 저와 함께 참전한 녀석의 후손이기도 하지요.”
“오호. 그 막사 앞에 웅크려 앉아있던 커다란 놈? 기억나는군. 왠지 낯이 익다 싶었지.”
그래. 좌청룡 우백호가 별거냐.
좌화왕 우묘왕이라는 이 미친 라인업에 가슴이 절로 웅장해진다.
설령 남천마후가 살아 돌아와도 발라 먹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전력.
국밥보다 더한 든든함을 느끼는 내 귓가로 이어진 두 사람의 대화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이놈 보면 볼수록 괜찮은데. 체력 좋고. 발도 빠른 데다 딱 봐도 영특해 보이고.”
야수묘왕이 흐뭇하게 웃었다.
“제가 특별히 공들여 키웠지요. 새끼 시절에는 워낙 입이 짧아 고생했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손수 젖까지 먹여 가며 키운 녀석입니다.”
“뭣이? 네놈이 직접?”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지금 적 노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닙니다.”
야수묘왕의 우람한 대흉근을 유심히 살피던 적천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 치지.”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뭔가 이상…….”
“여하튼 됐다. 이놈은 노부가 데려가는 것으로 하지.”
그 순간, 야수묘왕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예?”
“뭘 되물어? 그럼 중원까지 돌아가는 길에도 뭐 빠지게 뛰게 할 생각이었느냐?”
“그, 그건 당연히 아닙니다만, 지금 타고 계신 녀석은 후배가 늘그막에 자식처럼 기른 놈이라…….”
“줘.”
“아니 그.”
“해 줘.”
“…….”
“정 싫으면 저 녀석을 데려가지. 딱 봐도 영물 같은데.”
적천강이 지목한 ‘저 녀석’을 바라본 야수묘왕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헉. 저 녀석만큼은 안 됩니다. 애당초 잠시 빌려온 거고요.”
“노부가 된다면?”
“제, 제가 직접 기른 것도 아니고, 아비가 되어 자식놈이 형제처럼 생각하는 놈을 어떻게 보내겠습니까.”
“오늘따라 하늘이 맑구나. 혓바닥은 길고.”
잠시 침묵하던 야수묘왕이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타고 계신 녀석을 내어 드리지요.”
“그렇게 권하니 어쩔 수 없지. 네 호의를 받아들이마.”
“…….”
웅장하긴 개뿔이.
그 노망났던 화왕이 맞나. 화왕은 진짜 전설이다…….
그리고 내가 조촐해진 가슴을 애써 가다듬고 있을 때, 나를 태우고 열심히 달려가던 ‘저 녀석’이 낮은 울음소리를 흘렸다.
크르릉.
슬쩍 눈까지 마주치는 모습을 보아하니, 저놈도 자신이 지금 막 화왕이라는 개장수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났다는 걸 아는 모양이다.
불쌍한 마음이 든 나는 파르르 떨리는 새하얀 털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괜찮아, 인마. 넌 살아남았어.”
끼이잉.
어미 잃은 강아지처럼 처연한 울음소리를 흘린 무야호가 슬그머니 걸음을 늦추었다.
적천강 앞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 봤자 중원 땅까지 끌려갈 확률만 높아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적천강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간 직후였다.
“저건……?”
서서히 흐려지는 말꼬리.
적천강이 바라보는 방향의 끝에는, 완전히 전소(全燒)되다시피 한 민둥산이 있었다.
아니, 저 볼품없는 민둥산에도 이름은 있다.
애뇌산(哀牢山)이라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
그리고 내가 막 그에 관하여 설명하려던 그 순간, 적천강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감히 어떤 호로 개잡놈의 새끼가 소중한 산천초목을 태워 먹었단 말이냐!”
“…….”
“…….”
찰나지간. 나는 야수묘왕과 뜨겁게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암천이요.”
간혹 어떤 종류의 진실은,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
* * *
비로소 저 볼품없는 민둥산이 우리의 목적지라는 것을 알게 된 적천강은. 대뜸 눈살부터 찌푸렸다.
“나무 심으러 여기까지 온 게냐?”
“……그. 진심으로 궁금해서 여쭤보는 건데, 혹시 절 어느 정도로 미친놈으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늘은 식목일도 아니고, 식목일이라 해도 나무는 안 심을 거다. 내가 이들과 함께 민둥산이 되어 버린 애뇌산을 찾은 목적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쪽으로.”
그리고 내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야수묘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독혈지로군. 아니. 이제는 성지(聖地)라고 불러야 하나?”
야수묘왕이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다. 그 내용이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도는 요희에게 대강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의 뇌까림을 들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릅니다. 독혈지는 독혈지고, 성지는 성지일 뿐이에요.”
두 공간은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 독혈지가 인간에 의해 세워진 죽음의 땅이라면, 성지는 남만의 심장이자 생명의 땅이다.
‘그래, 생명 그 자체지.’
내심 중얼거린 나는 손에 쥐고 있던 [타락한 신물]을 땅에 내려놓았다.
안개와도 같은 마기가 흘러나오고, 무야호가 낮은 울음소리를 흘린다.
그러나 어둠에 잠식당했을지라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스아아아아.
마치 심장이 뛰듯이 맥동하는 땅. 그와 함께 아득한 세월 동안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세상이 한 꺼풀 벗겨진다.
동시에 보였다.
따스한 광휘가 온 사방에 가득한 또 다른 공간이. 그 중심에서 그 어떤 것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자그마한 연못이.
“아.”
“저건…….”
적천강과 야수묘왕이 토해 낸 탄성이 끝을 맺지 못하고 흩어진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느꼈는지. 그리고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화(淨化).’
오늘이 바로, 새로운 신석(神石)이 탄생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