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24
#723화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
어느덧 성우(聖雨)라 명명된 빗줄기는 지금도 남만 전역을 적시고 있었고, 자애로우신 대지모신의 은총 아래 하나가 된 남만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쿵, 쩌저적!
중늙은이의 도끼질 한 번에 아름드리나무가 꺾이고, 마른 체구의 여인이 산더미처럼 쌓인 장작을 아무렇지 않게 번쩍 들어 올린다.
창가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야, 버프 오지게 받았네.”
“버, 뭐?”
곧장 돌아오는 반문. 이미 불청객의 존재를 알고 있던 나는 돌아서며 대답했다.
“별거 아냐. 그런데 무슨 일이냐? 지금쯤이면 한창 정신없어야 할 놈이.”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 그리고 이제는 전처럼 바쁘지도 않아.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수습되고 있지.”
“그래?”
불청객치고는 꽤 반가운 얼굴이다. 나는 남만야수궁의 소궁주, 야율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거 좋은 소식이네. 누구 덕분이래?”
내 물음에 야율목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버님께 듣기로는 어느 한족 덕분이라는데. 아마 착각하신 거겠지.”
“글쎄.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착각이 아닐 텐데.”
“아니, 착각이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한족이 우리를 도울 리 없으니까.”
“하긴 원래 중원에서 온 놈들이 다 그렇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짧은 침묵이 흘렀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피식 실소를 흘렸다.
“모두 네 덕분이다, 진태경.”
“다 같이 고생하긴 했는데, 사실 맞아. 내 공이 크긴 했지.”
내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야율목의 입가에 맺혀 있던 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한족들은 다 너처럼 겸손을 모르는 성격인가?”
“아니, 나만.”
“다행이군.”
“왜?”
“한족들을 지금보다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오…….”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야율목을 바라봤다.
녀석이 저런 말을 할 줄이야.
그전부터 조금씩 느끼긴 했지만, 중원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하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좋아하진 마라. 막상 가 보면 미친놈들 많다.”
“어린애 취급하는군.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엇비슷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남만도, 중원도.”
“그래?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몰랐던 것 같은데?”
“……그건 네놈이 들판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니까 그런 거고.”
과거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는지, 약간 머쓱한 얼굴로 대답한 야율목이 내가 서 있는 창가로 다가왔다.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보이는 광경을 응시하던 녀석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군. 내가 평생을 나고 자란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재앙? 아니면 기적?”
“둘 다.”
짤막하게 대답한 야율목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이 역시 신의 뜻이겠지.”
“……너도 대지모신 믿냐?”
“글쎄. 적어도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일을 겪었으니까.”
불가해(不可解)의 영역을 접한 인간은 누구나 신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저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 누가 있는지는 몰라도, 필시 대단한 양반이겠구나 하고 짐작하는 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뒷말을 삼킨 나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뒤처리는 잘하고 있고?”
“수복 작업을 말하는 거라면 이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늦어도 수일 이내에 최종 성과가 나오겠지.”
내궁이 초토화되고, 외궁에서만 수백 채가 넘는 가옥과 전각이 무너졌다는 걸 생각하면 실로 기함할 만한 속도.
그러나 나는 놀라는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버프가 워낙 끝내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내리고 있는 저 빗줄기에는 생명과 정화의 힘이 담겨 있다.
끊임없는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데다가 신체 능력까지 올려 주는 범위형 버프다.
‘물론 비가 그치면 효력도 끝나겠지만, 그 며칠만으로도 충분하지.’
옛말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이번에는 무려 수만에 달하는 남만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복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
자신들의 터전을, 고향을 새롭게 일구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그들의 노력은 엄청난 속도로 결실을 이뤄 내고 있었다.
“다른 쪽은?”
내 물음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야율목이 대답했다.
“남아 있을 부족 간의 우위와 경계를 없애기 위해 대족장 제도를 폐지했다. 우리 묘족은 물론이고 다른 사대 부족의 동의를 모두 얻었지.”
“잘했네. 아, 그렇게 되면 요희도?”
야율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대족장 폐지를 주장한 이가 그녀였다.”
백상과 손을 잡았던 부족장들은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처형당했지만, 요희 만큼은 유일하게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뒤늦게나마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맹수들을 이끌고 외궁의 부족민들을 피신시키는 데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사면(赦免)에 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제기되지 않았다고 했다.
“백상이나 흑웅, 그리고 자신과 같은 선례(先例)를 남길 수는 없다는 말을 하더군.”
“맞는 말이지. 그전에는 대족장들의 힘이 너무 컸으니까.”
“아버님을 포함한 다른 부족장들도 동의하셨다. 이번 일로 우리 남만야수궁은 궁주 일인 체제로 움직일 것이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대회의는 존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야율목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다시 한번 남만야수궁이 새롭게 거듭났음을 깨달았다.
궁주에 제사장까지 겸하게 된 야수묘왕의 권위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해졌고, 불안하던 민심은 대지모신의 등장과 함께 안정을 되찾았으며, 사람들은 부족과 신앙을 떠나 하나로 뭉쳤다.
남만야수궁이 탄생한 이래 수백여 년간 서른두 조각으로 나뉘어 있던 이 땅의 균형이 마침내 하나로 단결(團結)된 것이다.
‘이 정도면 정말 소왕국(小王國)이라 불러도 되겠는데.’
자그마치 수만을 헤아리는 부족민과 일만에 달하는 전사.
그리고 그들이 부리는 맹수들까지 생각한다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비록 남만 전사들의 수준이 중원 무림의 무학(武學)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전력.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야율목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아니, 지금 보니까 귀티가 좀 나는 것 같아서. 알고 보니 왕자님, 뭐 그런 거 있잖아.”
“……왕자?”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야율목이 문득 실소를 흘렸다.
“왜 웃냐. 지금 상황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닌데.”
“생각해 보니 영광이라서.”
“뭐?”
“위대하신 대지모신의 사도(使徒)께서 왕자라 칭해 주시는데, 영광이 아니고 뭐겠나.”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거리는 내게, 야율목이 품에서 꺼낸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받아라.”
“이건…….”
“모신전(母神傳)이라 부르기로 했다. 아버님께서 네게 전해 달라시더군.”
내가 얼떨떨한 마음으로 죽편(竹片) 꾸러미를 받아 든 그 순간.
띠링.
― [모신전]을 획득하셨습니다.
― [모신전]은 [대지모신]의 기록을 다룬 경전입니다.
― 누군가가 믿음을 가질 때, 신은 비로소 존재할 수 있습니다.
― [대지모신]이 [남만]의 유일신으로 알려집니다!
― [대지모신]을 따르는 수많은 신도들이 열광합니다!
― [모신전]의 기록에 따라, 당신의 이름이 새롭게 알려집니다!
― 이것까지 하는 놈이 있나 싶은 업적, [종교 개혁]을 달성하셨습니다!
-칭호, [대지모신의 사도]를 획득하셨습니다!
시스템 알림과 함께 허공을 가득 메우는 홀로그램 창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황급히 손에 든 죽편 꾸러미를 펼쳤다.
그리고 깨알처럼 적힌 기록을 읽은 뒤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뭐냐, 이거.”
내 반응을 본 야율목이 어깨를 으쓱였다.
“적힌 그대로다. 대지모신께서는 태고부터 이 땅과 함께하신 어머니 신으로서, 남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친히 당신의 사도를 보내어 그들을 구하셨는데…….”
“그게 나다?”
“그렇지. 삼백 년 전에는 초대 궁주셨던 내 선조. 그리고 이백 년 전에는 네가 속해 있는 열화문의 당대 문주였고.”
그걸 이렇게 짜 맞출 줄이야.
물론 내가 몇 가지 힌트를 던져 준 건 사실이지만, 내 이름 석 자가 떡하니 박혀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이름이.
차라락.
뒷부분까지 훑어보니 제법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적천강은 물론이고 화룡각 대원들, 심지어는 남호의 이름까지.
이거 명색이 성경 같은 건데 이래도 되는 건가.
“아무리 급조했다지만 어이가 없네. 이거 설정 짠 새끼 누구야?”
“아버님.”
“어쩐지 훌륭하더라. 어쩜 이리 설정을 촘촘하게 짜셨대?”
“…….”
나는 야율목의 시선을 외면하며 죽편을 품에 넣었다.
‘대지모신의 사도라.’
사주팔자에도 없던 신의 사도 노릇을 하게 됐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아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큰 수확이었다.
‘남만인들이 중원인들에게 품고 있던 악감정이 희석될 테니까.’
마음속으로 뇌까리던 그때, 야율목이 불쑥 물었다.
“그래서, 준비는 다 끝났나?”
“응?”
“남만을 떠날 준비 말이다.”
“……!”
잠시 침묵하던 내가 입맛을 다셨다.
“눈치 빠르네.”
“모르면 이상하지.”
“어떻게 알았냐?”
“다른 이들은 둘째 치고 전날부터 그 덩치 큰 놈이 정신없이 음식을 챙기고 있었다. 먼 길이라도 떠나려는 사람처럼.”
덩치 큰 놈이면 말할 것도 없다. 범인의 정체를 짐작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산이, 이 미친 새끼. 조용히 움직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네 스승이신 화왕 적천강 대협은 과실주를 다섯 항아리나 빼돌리시더군.”
“…….”
아, 제발. 노야.
눈을 질끈 감은 그때, 야율목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떠나기 전에 인사 정도는 해야지. 모두 기다리고 있다.”
* * *
야율목이 말한 ‘모두’라는 두 글자가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북문(北門)에 가까워진 후에야 깨달았다.
‘이건.’
수천, 어쩌면 수만.
북문 밖, 생명의 힘이 담긴 소나기 덕분에 싱그러운 풀과 꽃으로 뒤덮인 들판을 가득 메운 수많은 인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과실주 항아리가 실린 수레 앞에서 딴청을 피우는 적천강.
비장한 표정으로 양손에 고기를 든 태산이와 각각 맹수에 올라탄 화룡각 대원들.
그리고…….
“드디어 왔군.”
야수묘왕 야율척. 이 땅의 모든 남만인들을 대표하는 남만야수궁의 주인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말도 없이 떠나려고 했느냐?”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말씀은 드리려고 했는데.”
“했는데?”
“그, 서신으로.”
“고작 서신으로?”
“아니, 워낙 바빠 보이셔서…….”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
이게 물음표 살인마인가 하는 그거냐.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나를, 머리 하나는 더 큰 야수묘왕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열화신룡 진태경.”
나직한 부름. 야수묘왕이 준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게는 목적이 있었다. 우리의 고향을, 이 땅을 찾아온 이유가. 그렇지 않느냐?”
“…….”
“한데 오늘의 넌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말없이 떠나려 하는구나. 낯선 땅에서 죽을 위기를 수없이 넘기고,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으면서도.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지.”
야수묘왕의 힘 있는 시선과 목소리는 나를 향하고 있지만, 이 자리의 모두가 듣고 있다. 모두가 보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냐.”
그리고 야수묘왕의 물음에,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그냥 사람이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것뿐입니다.”
“……!”
“대가를 얻기 위해 한 일이 아니라서. 다시 한번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떠나려고 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수만 명이 군집했음에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긴 침묵.
그렇기에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이 빗줄기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그 너머로 우뚝 선 야수묘왕의 신형이 움직였다.
스륵.
단단한 기둥과도 같은 허리가, 다른 이에게 굽혀져서는 안 되는 남만야수궁주의 허리가 나를 향해 기운다.
그리고 곧이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정중하기 그지없는 포권지례(抱券之禮)를 취한 야수묘왕이 입을 열었다.
“야수묘왕 야율척.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대표하여 화룡각주 진태경 대협께 무림맹으로의 입맹(入盟)을 청합니다.”
빗줄기가 서서히 그쳐 가는, 어느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