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26
#725화
― 이야기 좀 하자.
귓가를 파고드는 전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고삐를 느슨하게 잡았다.
그 행동의 뜻을 알아차린 맹수가 서서히 발걸음을 늦췄고, 함께 나란히 이동하게 된 적천강의 입술이 열렸다.
“천주가 네놈에게 유독 관심을 보인다는 말, 사실이냐?”
“네.”
“거, 희한하군. 노부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럴걸요. 저도 처음 하는 얘기니까.”
“왜 말하지 않았느냐?”
“안 물어보셨잖아요.”
솔직히,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한 대 정도는 얻어맞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적천강은 번개처럼 방어 자세를 취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물어보지 않았으니 말하지도 않는다……. 그래, 영 틀린 말은 아니로군.”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래.
“저기, 노야?”
“왜.”
“그, 혹시 삐치셨어요?”
“뭐라? 삐쳐? 노부가?”
“예.”
적천강이 대단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껄껄 웃었다.
“노부가 다섯 살 난 어린아이도 아닌데 삐칠 일이 뭐가 있겠느냐. 물론 지난 사흘 동안 그것에 관하여 말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고 네 녀석을 생각해서 노부 역시 묻지 않았지만, 그거야 쥐뿔도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결국 안 물어본 놈이 등신 아니겠느냐. 으허허.”
“…….”
“강호인들은 말한다. 사제지간(師弟之間)에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해당하지 않는 경우이니 넌 개의치 말거라. 뭐, 따지고 보면 노부는 열화문의 명맥을 이을 후인이 필요했고 네놈은 무공이 필요하여 상부상조했으니 그것으로 된 거지. 사실 요즘 같은 세상에 사제지간의 정 운운하는 것도 우습다.”
“…….”
“혹여나 네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뭐 빠지게 남만까지 달려오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 멀쩡한 머리털까지 다 뽑았지만, 노부는 괜찮다. 결과적으로는 그것도 안 빠졌고 머리털은 금방 자랄 테니까. 아무렴, 그렇고말고.”
“…….”
“그까짓 염병할 얘기 좀 안 들었다고 노부가 삐칠 게 뭐가 있겠느냐. 애초에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야 하는 게지. 때가 되면 어련히 말하겠거니, 하고 기다렸다가는 노부처럼 말라 뒈지는 것 아니겠느냐. 허허허.”
신선처럼 웃는 적천강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진짜 오지게 삐쳤네.’
사람이 이 정도로 삐칠 수가 있나.
이 정도면 포브스 지가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삐친 인물 1위’에 뽑혀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네 녀석을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나는구나. 그때는 노환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숨이 턱턱 막혀 오는 듯한 압박감.
나는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하는 적천강을 향해 간신히 입술을 뗐다.
“아까 드린 말씀은 농담이고, 저도 정신이 없어서 말씀을 못 드린 겁니다. 나름대로 생각 정리는 해야 할 것 아닙니까.”
“흠.”
적천강의 눈이 게슴츠레해진다. 평소의 모습을 약간이나마 되찾은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천주에 관한 것도 농담이냐?”
“그건 사실인데요. 안타깝게도.”
“근거는?”
나는 적천강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남만야수궁에 머무를 당시 그도 이미 한 번 들었던 내용이지만, 간단히 축약했던 그때와는 달리 훨씬 더 상세하게.
그리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적천강이 미간을 좁혔다.
“그 연놈들이 널 사로잡으려 했다?”
“예. 그런데 하다 보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죽이려 하더라고요. 독혈지에서 싸웠던 대설귀와 흑수권마도, 또 남천마후도.”
“널 생포하고자 한 것이 천주의 명령 때문이었을까?”
“그건…….”
적천강의 물음에 잠시 기억을 떠올린 나는,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만약 정말 천주가 그런 명령을 내렸다면, 남천마후는 설령 홀로 최후를 맞이하더라도 절 죽이려 들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목숨보다 앞서는 충심(忠心)이라……. 믿기 힘들 정도군.”
“단순한 충성심이 아닙니다.”
나직이 대답한 나는 기억 속에 남은 남천마후의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때의 눈빛. 그 순간의 표정. 환희로 들뜬 목소리와 그녀가 했던 모든 언행들.
그날, 내가 남천마후로부터 느낀 감정은 고작 충성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신(狂信)이었습니다. 남천마후에게. 아니, 암천에게 있어 천주는 살아 있는 신이나 다름없어요.”
“……!”
“암천의 모두가 천주를 두려워하고 경애합니다. 놈이 어떻게든 저를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그건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신명(神命)이에요.”
그토록 강하던 혈주도, 서천마군도.
이번에 최후를 맞이한 남천마후 역시 천주의 이름 앞에서는 종복을 자처하며 엎드렸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지간한 초절정 고수쯤은 맨손으로 찢어발길 수 있는 괴물들.
천주는 바로 그 괴물들이 받들어 모시는 왕이요, 신인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남천마후는 천주가 관심을 보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절 생포하려 한 것 같습니다.”
“단지 천주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적천강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광신도라…….”
흐려진 말꼬리가 바람에 파묻힌다.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채, 지금 이 순간에도 스쳐 지나가는 주위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마교도(魔敎徒)를 본 적이 있느냐?”
“혹시 제가 환갑 정도로 보이세요?”
“그래, 네 녀석 정도의 나이라면 보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 정마대전이 끝나고서도 한참 후에야 태어났으니.”
“다 아시는 분이 갑자기 그건 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 시절의 마교와 다시 한번 싸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
“물론 놈들 역시 광신도였다. 허나 그 수괴인 천마(天魔)는 결국 한낱 인간이었고, 천마의 휘하에 있던 십만 마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 그들에게 천마란 단지 자신들을 이끄는 교주(敎主)일 뿐, 신이 아니었던 게야.”
나는 적천강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깨달았다.
마교도에게 있어 천마는 피륙(皮肉)으로 이루어진 인간이었지만, 암천의 모두에게 천주는 신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신을 위해 싸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싸울 것이고, 몸에 무수한 창칼이 박혀도 웃으며 숨을 거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한 전쟁이 될 것이다.”
적천강이 무거운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너에게는 더더욱.”
“천주가…… 절 주시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원했든, 원치 않았든 네 녀석은 이미 필요 이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천하 어딘가에서는 네 이름이 울려 퍼지고 있겠지.”
“…….”
“삼성(三星)과 십왕(十王)은 낡은 이름이다. 허나 네 녀석은 달라. 고금을 통틀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재능을 지녔고, 천하의 누구도 이제 고작 약관을 넘긴 네가 강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나를 바라보는 적천강의 눈빛은 숨길 수 없는 대견함과,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그렇기에 천주 역시 주시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놈은 이미 한 번 너를, 네 안에 숨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진면목을 확인했었으니까.”
“……사천당문의 뇌옥.”
“그래. 알 수 없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힘을 이용해서, 서천마군의 눈으로 너를 보았지.”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돌가루와 피가 흩뿌려진 석벽.
그리고 우뚝 선 채 나를 바라보던 서천마군의. 아니, 잠시나마 종복의 몸을 빌린 천주의 한마디를.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때, 놈은 분명 웃고 있었다.
전신이 한 줌의 재가 되어 흩날리면서도, 나를 향한 마지막 인사를 잊지 않았다.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그날의 기억.
작게 심호흡하는 내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적천강이 문득 입을 열었다.
“어쩌면…… 천주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그 비밀들을.”
“……!”
“그렇기에, 이제는 나 역시 묻지 않을 수 없구나.”
누군가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춰 버린 세상 속, 적천강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네가 숨겨 왔던 모든 것을, 노부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
* * *
적천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지난 사흘간 쉼 없이 빗줄기를 쏟아 낸 하늘은, 한없이 어지러운 그의 마음과는 달리 푸르고 맑았다.
‘선계(仙界)라…….’
미처 흘러나오지 못한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흩어진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참으로 긴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그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만약 자네가 곁에 있었다면, 이 어지러운 마음도 금세 다잡을 수 있었을 텐데.’
적천강은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벗을 떠올렸다.
술과 고기를 좋아해서 땡중이었고, 누구보다 인의(人意)를 사랑했기에 법왕(法王)이라 불리었던 한 사람을.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법왕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설령 그가 살아 있었다 하더라도 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기(天氣)를 읽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미 천기가 어그러졌다고 했지. 더 이상 저 하늘은 누구에게도 어떤 답을 해 주지 않는다고. 분명 그리 말했었어.’
동시에 법왕은 거대한 전란(戰亂)을 예고했다.
하늘마저 어지럽히는 기운이 온 천하에 미칠 것이라고. 불길이 되어 사방을 휩쓸 것이라고.
하지만 법왕의 예견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성(新星)의 주인.’
어지러운 하늘을 밝히며 떠오른 새로운 별.
법왕은 그 신성의 주인으로 한 청년을 점찍었고, 이후 구화산으로 향한 적천강은 열화문의 명맥을 그 청년에게 잇도록 했다.
“……허. 그저 헛소리 좋아하는 땡중인 줄 알았건만.”
헛웃음 섞인 중얼거림이 공허하게 흩어진다. 전신을 휩쓰는 시원한 바람을 말없이 맞고 있던 적천강의 시선이 문득 옆을 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는 한 마리 맹수.
그리고 튼튼한 가죽끈으로 전신을 고정한 채 안장 위에 엎드린 한 사람.
아니, 적천강의 하나뿐인 제자.
‘괘씸한 놈 같으니. 이 사달을 일으켜 놓고 잘도 자는구먼.’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진태경으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천강에게는 더 이상 놀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림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또 다른 세상. 그리고 선계와 같은 그곳과 무림을 오가는 한 청년.
‘괘씸한 놈 같으니. 이 사달을 일으켜 놓고 잘도 자는구먼.’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지만, 진태경으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천강에게는 더 이상 놀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림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또 다른 세상. 그리고 선계와 같은 그곳과 무림을 오가는 한 청년.
비록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천강은 자신이 들었던 이 믿지 못할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후였다.
‘그럼 설마, 이놈이 소신선(小神仙)이라도 되는 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그때. 진태경의 입가에서 죽 늘어진 침이 적천강의 뺨에 척, 하고 달라붙었다.
철퍽.
“…….”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적천강은 곤히 잠든 제자의 이마를 쥐어박는 대신, 한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자세를 잡아 주었다.
‘그래, 그간 고생했으니 푹 자거라.’
아니, 아니지.
적천강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다녀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