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795
#794화
“선지자가, 지크프리트 바스만을 죽였나?”
살기가 실린 목소리에 후긴은 굳게 입을 닫았다. 지난 일주일간 그래 왔던 것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처럼.
하지만 지금까지 놈을 심문했던 수사관들과는 달리, 나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이 방, 어때? 분위기 괜찮지?”
뜬금없이 건넨 말에 후긴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탁자와 의자뿐인 넓은 방을 천천히 배회하며 말을 이었다.
“24시간 돌아가는 카메라도, 감시용 창문도 없으면 죄수한테는 천국 아닌가? 나도 전에 비슷한 일을 한 번 겪어 보니까 알겠더라고. 누군가에게 매 순간 감시당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기분 더러운 일인지.”
“…….”
“그래서 특별히 여기로 데려온 거야. 그게 여러모로 피차 편할 것 같아서. 앞서 말했듯이 감시하는 이목도 없고, 또…….”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방음 마법도 완벽하고.”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나는 안다.
깊게 가라앉은 저 눈빛은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증거라는 것을.
그리고 짧은 침묵 끝에 후긴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목소리가 아닌 실소였다.
푸흐흐.
바람 빠지는 소리가 서서히 커지더니 이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한참이나 웃던 후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게 전부냐?”
“뭐?”
“고작 그게 전부냐고 물었다. 고문이든, 협박이든. 할 거면 제대로 해라. 그 정도로는 가소롭지도 않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입을 다물어야 할 차례다. 바통을 넘겨받은 후긴이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네가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할 거다. 이미 다녀간 그놈들처럼.”
이미 다녀간 그놈들이라.
못 본 사이 왜 이렇게 수척해졌나 했더니, 아무래도 나보다 앞서 찾아온 선객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수많은 나라가 으쌰으쌰 힘을 합쳐서 UN을 결성하고, 국제 고문 방지 협약을 만들어 봤자 결국 안 들키면 그만 아닌가.
게다가 후긴은 미카엘 실베르트의 크고 작은 임무를 도맡아 해결하던 오른팔.
인류의 배신자인 데다가 가장 중요한 비밀을 간직한 놈이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있으니, 중동에서 단련된 미국의 고문 기술자들은 수뇌부의 묵인하에 솜씨를 발휘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모조리 실패했지만.’
나는 한바탕 말을 쏟아낸 후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나를 억제당하고, 온몸이 속박되어 있다고는 해도 놈은 S급 헌터다. 그것도 미카엘 실베르트의 오른팔로 선택받은 특출난 강자.
고문과 정신 계열 마법으로도 저 단단한 정신력을 무너트리긴 어렵다.
“입만 열면 전부 끝나. 너와 함께 사로잡힌 다른 놈들처럼, 있는 사실 그대로만 말하면 된다고.”
“좆 까.”
“미카엘 실베르트가 네게 남긴 유언이 있지. 이미 전해 들었을 텐데?”
“들었다. 하지만 이건 오롯이 내 선택이야. 나는 다섯 살 때부터…….”
“듣기 싫으니까 입 다물어라. 네가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는 영재였건, 세상을 증오하게 된 고아였건 관심 없으니까.”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내가 무슨 별밤지기도 아니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악당의 사연을 들어 줘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놈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안다.
“사실대로 말하면, 한 가지는 약속한다.”
“약속?”
“그래, 약속.”
“그럼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겠군. 난 어떤 것도 필요 없…….”
후긴이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연 순간. 나는 준비해 두었던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죽여 줄게.”
“……!”
“최대한 고통 없이. 깔끔하게. 널 풀어준다는 약속은 애초에 지킬 수가 없어서 못 해 주겠지만, 그 정도는 오늘 당장이라도 가능하지.”
“……네놈.”
“부정하지는 마. 너도 지금처럼 살 바에야 차라리 죽고 싶잖아. 안 그래?”
감추려 하지만, 보인다.
체념과 독기가 뒤섞인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 하지만 입 안에 숨어 있는 혀는 아직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개소리 집어치워. 어떤 방법으로도 내 입을 열 수는 없을 거다.”
“아까부터 하는 말을 들어 보니까, 확실히 뭔가를 알고 있긴 한가 보네.”
“…….”
“그런데 지금 당신 나이가 어떻게 되더라. 내가 알기로는 오십 언저리니까…… 아직 젊네. 앞으로도 오래 살겠어.”
무림에서는 할아버지 소리 들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나이지만, 요즘 같은 현대 사회에서 오십 언저리면 정말 한창때다.
돈푼깨나 있는 사람들은 최첨단 의학과 마법을 이용한 건강관리로 백 세를 넘기는 경우가 상당하니까.
게다가 후긴은 S급 헌터. 마나를 억제당했다고는 해도 신체의 활력이 일반인과는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다.
“우리 까마귀 양반, 장수하겠네. 물론 남은 여생은 교도소에서 보내야 하겠지만.”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힌 나는,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햇빛 한 줄기 안 들어오는 꽉 막힌 방에서 24시간 밀착 감시. 심심할 때마다 심문. 아니, 고문이라고 해야 하나. 이미 저질러 놓은 짓이 있어서 앞으로도 꽤 지독하게 당하겠지?”
“…….”
“그래도 깜냥이 있어서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버텼는데…… 그걸 오십 년쯤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 뭐, 그래도 확실히 몸은 건강해지긴 하겠다. 칼질 끝날 때마다 포션으로 샤워시켜 줄 거 아냐.”
테러로 인한 사상자만 무려 수백만.
상실감과 분노에 휩싸인 인류 앞에서 인권(人權)이라는 단어는 이미 무용지물이다.
당장 내일 아침 뉴욕 타임즈에 후긴을 고문했다는 기사가 실리면, 전 세계 사람들은 깜짝 놀라 성금을 걷으려고 할 거다.
놈의 변호사 비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놈이 느낄 고통을 영원히 연장할 포션 값을 대주기 위해서.
그리고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 후긴의 정신도 서서히 무너져내릴 것이다.
혹은, 이미 금이 가기 시작했거나.
“오는 길에 최 팀장님이 재미있는 얘길 하더라고. 비행기 안에서 네가 소란을 좀 피웠다던데. 혹시 어디 아파? 아니면 발작?”
아마도 후자겠지.
강인한 신체와 정신력을 지닌 S급 헌터에게도 고통은 평등하다. 다만 견디는 법을 알고 있을 뿐.
익숙해져도 무뎌지지는 않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왜 대답이 없냐. 걱정해 준 사람 무안하게. 벌써 이러면 남은 인생은 어떻게 버티려고?”
반쯤 누워 있던 몸을 바로 세운 그때. 으득, 하는 파육음과 함께 후긴의 입 안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혀를 깨문 것이다.
“저런. 아프겠다.”
작게 혀를 찬 나는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후긴의 아가리에 쑤셔 박았다. 금세 피가 멎고 반 토막 난 혀가 아물었다.
“서로 피곤하게 이러지 말자. 혀 깨물라고 입마개 풀어준 거 아니잖아. 이제 가져온 포션도 슬슬 다 떨어져 가는…….”
으득. 촤아악.
다 떨어졌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다시 혀를 깨무는 후긴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지 말라니까.”
그리고 인벤토리를 뒤져 포션을 꺼냈다.
정확히는 포션이 빽빽하게 들어찬 박스를.
쿵.
“제발 부탁 좀 하자. 300개 정도밖에 안 남아서 그래. 응?”
“……!”
“그래도 다행이다. 이번엔 혀가 조금만 잘렸네.”
“…….”
“입 벌려. 아, 해. 아.”
후긴은 대답 대신 멍하니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런 녀석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쫙!
이빨들이 사방으로 튄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기에는 내가 아쉽다.
쫙! 으직.
턱관절이 부서지며 놈의 입이 저절로 딱 벌어졌다.
“옳지. 잘한다. 말 잘 듣네. 근데 너 치석 쌓였다. 마지막으로 스케일링 받은 게 언제야?”
입가에 한가득 피를 묻힌 후긴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이 년. 이 년 전…….”
“꽤 됐네. 포션만 먹는다고 만능이 아니야. 치석은 부상이 아니라 치유가 안 되잖아. 양치질을 해야지. 아니면 치과를 가거나. 어떻게 해야 한다고?”
“양치질, 치과…….”
“뭐래, 병신아. 클린 마법이면 되는데. 머리는 장식이냐? 그냥 태어난 김에 갖고 있다가 급할 때 무기로 쓸 거야? 초등학교 때부터 장래희망이 듀라한이었어?”
“아니, 도대체 왜…….”
“그런데 이 개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안 되겠네. 씨부럴 새끼가 조선의 마지막 대령 숙수도 아니고 간만 존나게 봐요. 지금 수라상 차리냐, 시벌놈아? 넌 이 포션 다 쓸 때까지 못 나갈 줄 알아라.”
“전부! 전부 말하겠……!”
“여물어.”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냥, 아까부터 스멀스멀 뱃속을 타고 올라오던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을 뿐이다.
덥석. 빡!
포션병 하나를 냅다 집어 놈의 정수리를 향해 후려쳤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밀려든 고통에, 단단히 속박된 몸뚱어리가 파르르 떨렸다.
“자, 잠깐.”
“이거 강화유리야, 이 새끼야.”
빡! 빡! 콰창!
아무리 강화유리여도 세 번 정도가 한계다.
어느새 피가 솟구치는 놈의 정수리 위로 박살 난 유리 조각이 후두둑 쏟아졌다. 그 안에 담겨 있던 내용물도 함께.
솨아아아.
치유와 고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기적의 현상.
하지만 나는 치유가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포션 병을 움켜잡았고.
뻑! 뻑! 뻐억!
콰창!
정신을 차려보니 텅 빈 박스에 손을 휘젓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끝, 끝났나……?”
“아니.”
나는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박스를 리필하며 대답했다.
“더 버텨. 아직 이백 개는 더 남았어.”
“……!”
“할 수 있다. 우리 함께 힘내자. 난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 어쩌면 앞으로 매일매일 해도 괜찮을 것 같아.”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보던 후긴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 말한다고 했는데 왜…….”
“개소리하지 마. 언제?”
“아까 전부터, 계속, 줄곧, 끊임없이 말했는데…….”
“이거 웃기는 새끼네. 내가 병신으로 보여?”
“진짜다! 진짜로 그랬다!”
“혹시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야? 막, 막 억울해서 미치겠고 그래?”
“그, 그게 아니라.”
“됐어. 나 마음 상했어. 일단 기왕 꺼낸 상자부터 비우고 다시 얘기해.”
“……!”
사실 어렴풋이 그런 말을 들었던 것도 같긴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나는 후긴과의 훌륭한 팀플레이로 두 번째 포션 상자를 비웠고, 세 번째 상자를 꺼내 들었을 때 놈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만! 그마안!”
베테랑 기술자들의 고문으로도 열리지 않았던 주둥아리가, 이제는 아주 자유분방하다.
어쩌면 내가 보여준 진짜 광기가 놈의 마음을 움직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반쯤 열었던 상자를 다시 닫았다.
“이제야 내 진심을 알아주네.”
“……아까 말했던 약속은?”
“틀림없이 지킨다. 그렇게까지 죽고 싶다면.”
“어떻게 널 믿지?”
“그건 네 자유지. 하지만 난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한다. 그뿐이야.”
“…….”
“그래서, 대답은?”
침을 꿀꺽 삼킨 후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가 맞다.”
“정확히. 다시.”
“지크프리트 바스만을 죽인 장본인은…… 선지자라 불리는 그자야.”
틀림없다. 지금 후긴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짐작이 확신으로 변함과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이 찾아왔다.
“선지자라 불리는 그자?”
“……아.”
흐려진 정신 때문일까. 하지 않아도 되었을 말을 했다는 표정이었지만, 이미 한 번 뱉은 말을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뭔가 더 있다.’
미카엘 실베르트와 선지자가 연관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연관성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던 상황.
나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놈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인지 말해. 선지자에 대해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하라고.”
“그, 그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는 것은. 그러나 이미 절벽 끝으로 내몰린 후긴에게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었다.
“그가 바로, 무닌이다.”
“뭐?”
나도 모르게 반문한 그 순간, 후긴이 처음 아레스 길드에 찾아왔던 그 날의 기억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명함 한 구석에 음각(陰刻)되어 있던 두 마리의 까마귀.
그리고…… 최 팀장과 나누었던 대화도 함께.
‘후긴과 무닌. 이 두 마리의 까마귀는 바로 그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어느 신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게 누군데요?’
‘오딘.’
‘……!’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절대신 오딘. 그리고 그를 섬기는 두 마리의 까마귀. 후긴과 무닌.
처음부터, 까마귀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