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824
#823화
철컹. 투두둑.
무수한 병장기가 피로 물든 지면 위로 떨어져 내린다. 수천의 광신도들이 물결처럼 무릎을 꿇는다.
동쪽으로부터 시작된 어스름한 새벽빛이 그 광경을 비추었다.
마침내 승리가 찾아온 전장을.
그리고 이 믿을 수 없는 승리를 가져온 한 청년을.
‘진태경.’
무릎 꿇은 패자들은 그 이름 앞에서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고, 승자들은 경이에 가득 찬 눈동자로 자신들의 젊은 맹주를 바라보았다.
열 배가 넘는 수적 열세.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던 미친 광신도들.
헌터들은 내심 두려웠다.
두 번 다시 가족들을 만나지 못할까 봐. 이 이름 모를 협곡에서 자신들이 쓰러진다면, 더욱 큰 재앙이 산 자들을 집어삼킬까 봐.
하지만 그들이 잠시나마 품었던 두려움이 무색하게도, 진태경은 한순간에 이 거대한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압도적이었고, 한편으로는 신성(神性)했다.
살아남은 이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진태경이 베어 낸 것은 적들의 살과 뼈만이 아니다. 그는 광신도들의 마음을 꺾었다. 그들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마치 신화 속 한 장면처럼.
‘기적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지.’
매직 존슨은 문득 가슴속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하염없이 진태경을 바라보는 대마도사의 시선은 잔물결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를 닮았다. 놀라울 만큼.’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옛 기억이 망막 위로 드리운다.
삼십여 년 전의 케케묵은 기억. 그러나 ‘그’와 함께한 모든 순간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매직 존슨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던 기적은, 그 위대한 업적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고요해진 전장의 중심에서 홀로 우뚝 서 있는 어느 젊은 영웅도 함께.
그러나 동시에 매직 존슨은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심지어는 기적조차도 합당한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등가교환(等價交換)이야말로 불변의 법칙.’
진태경을 응시하던 매직 존슨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은 그때. 그가 천천히 들어 올린 스태프의 끝에서 눈부신 빛이 흘러나왔다.
화아아악.
치열했던 대전투의 끝을 알리는 섬광이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밝힌다.
따스한 온기를 머금은 그 빛에 맞닿은 헌터들은 그제야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현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승리했다.
바로 오늘, 새로운 역사의 한 줄을 새로 썼다.
차차차창!
피와 살점으로 범벅된 날붙이가 하늘을 찌르고.
와아아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협곡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승리로 인한 기쁨이요, 죽은 동료에 대한 애도인 동시에 오롯이 한 사람에게 바치는 경외.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는 알지도, 보지도 못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를 받으며 우뚝 선 젊은 영웅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자꾸만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는 창대를 있는 힘껏 말아 쥔 손가락이 새하얗게 물들어 있는 광경을.
‘……빌어먹을.’
욕설을 삼킨 진태경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 솟구치는 뜨거운 기운을 억눌렀다.
자꾸만 흐릿해져 가는 시야, 이명(耳鳴)이 맴도는 귓가에는 헌터들의 환호와 시스템 알림이 혼잡하게 뒤섞여 파고들었다.
– [Lv.140 하미드 샤 마수드]를 처치하셨습니다!
– 상당량의 경험치와 명성을 획득하셨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의 효과로 모든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 레벨 업의 효과로 일부 상처가 치유됩니다!
– 특수 디버프, [부서진 신체]가 치유의 힘을 거부합니다!
– 상태 이상, [심력 고갈]이 치유의 힘을 거부합니다!
– [중단전]이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휴식을 취하여 심력을 회복하십시오!
현재 진태경이 처한 상황은 시스템이 알려 준 그대로였다.
신체의 상처와 피로는 회복되었으나, 중단전(中丹田)은 시스템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영역. 앞서 그가 보인 재앙과도 같은 파괴력은 결코 헐값으로 얻어 낼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욱신.
이미 한계까지, 아니 한계 이상으로 힘을 쥐어짜 낸 탓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벅찼다.
심장 어림에서 전해져 오는 고통과 정신적인 피로는 끊임없이 몸을 좀먹으며 속삭였다.
전투는 끝났다고.
네 역할은 끝났으니, 지금부터라도 휴식을 취하라고.
“그래, 할 만큼 하긴 했지.”
공허한 뇌까림이 혀끝에서 흩어진다.
진태경은 흐릿한 시야 너머로 환호하는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함께 몇 번의 전투를 겪으며 익숙해진 면면들.
군데군데 빈 자리가 눈에 띄긴 했지만, 이번 전투로 목숨을 잃은 헌터들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만약 중단전의 효용을 한계 이상으로 발휘하지 않았다면, 아마 살아남은 헌터 중 절반 이상은 지금쯤 전장에 널브러진 채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을 터.
진태경의 생각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힘들었던 격전을 단숨에 승리로 이끌었고, 더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막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대전투를 그 홀로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태경은 창대를 말아 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저 멀리 사막과 황야가 펼쳐진 서쪽을 바라보았다.
‘해야 할 일이 남았어.’
정광(正光)이 꺼지지 않은 청년의 눈이 끝없이 늘어선 지평선을 응시한다.
그의 시선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누군가를 좇고 있었다.
‘도플갱어.’
새벽이 찾아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플갱어가 모습을 감춘 서쪽 땅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치 놈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처럼. 그리고 뒤이어 찾아올 거대한 전쟁을 예고하는 것처럼.
‘가야 한다.’
순간 진태경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의지를 넘어 사명에 가까웠다.
그는 나아가야 했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됐다.
서쪽 저 멀리 사라진 도플갱어를 쫓아, 머지않은 미래에 들이닥칠 재앙을 막아야 했다.
저벅.
홀린 듯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
그러나 이미 밑바닥을 드러낸 심력(心力)은 몸뚱어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비틀.
앞으로 걸어라.
그 간단한 명령을 제때에 전달받지 못한 다리에 힘이 풀린다. 가슴으로부터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심신을 방해했다.
‘제기랄.’
고작 두 번째 걸음 만에 맞닥트린 벽.
진태경은 서서히 기울어지는 시야를 느끼며 헛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문득, 눈앞이 어두워졌다고 느꼈을 때.
스륵, 툭.
앞으로 기울어지던 이마가 단단한 무언가에 닿았다.
뒤이어 등 뒤에서 불쑥 뻗어진 손이 힘없이 허물어지려던 신형을 일으켜 세우고, 이명이 울려 퍼지는 귓가로 두 줄기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고생했어, 진.”
“정신차려라. 인간.”
진태경은 눈을 깜빡였다.
쓰러지려는 자신을 일으켜 세운 손의 주인도, 앞을 가로막은 단단한 벽의 정체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매직 존슨. 그리고 스켈레톤 킹.’
그들이 왔다.
한 인간과 몬스터. 아니, 친구들이 왔다.
자신을 돕기 위해.
까득.
아득한 통증과 함께 흐려졌던 시야가 다시금 또렷해진다.
혀에서 흘러나온 핏물을 삼킨 진태경은 고개를 들었다. 더없이 반가운 얼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
순간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온 웃음에, 스켈레톤 킹이 굳은 얼굴로 매직 존슨을 향해 물었다.
“못생긴 놈이 왜 재수 없게 실실 쪼개지? 결국 미친 건가?”
“자네야말로 재수 없는 소리 작작하고 입 다물어. 이봐, 진. 내 말 들려?”
“인간아. 지금 내 손가락이 몇 개냐.”
진태경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소리 잘 들려요. 손가락도 보이고.”
“개수를 말해라. 이 못생기고 아둔한 놈아.”
“한 개. 그런데 그 손가락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하고 내려라.”
눈앞에서 중지를 흔들어 대던 스켈레톤 킹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정상이군.”
그 모습에 실소를 흘리던 진태경이 기침을 토해 냈다.
“최 팀…… 쿨럭, 최 팀장님은?”
“잘 있다. 조금 다치긴 했지만.”
“그래? 확실하지?”
“믿어라. 거짓말이 아니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진태경은 힘주어 허리를 곧게 폈다.
여전히 숨은 가쁘고 감각은 무디다. 그러나 이곳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존슨.”
때로는 작은 행동,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법.
진태경의 짧은 부름에, 무언가를 직감한 매직 존슨이 대답했다.
“안 돼.”
“가야 합니다. 아시잖아요.”
“알지.”
매직 존슨이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지금 네가 쉬어야 한다는 것도.”
대마도사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 있을 뿐,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는 진태경의 상태가.
하지만 무모함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었다.
눈앞의 청년이 언제나 늘 그러했듯이.
“텔레포트 마법을 써 주세요.”
“제기랄, 진. 미쳤어?”
“이건 부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부로, 난 세계 헌터 연맹에서 나가도록 하지.”
“그럼 그렇게 하세요.”
진태경이 머리 하나는 더 큰 매직 존슨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사표를 수리하기 전까지는, 제 명령을 들어야 할 겁니다.”
“……!”
“어서요. 존슨.”
매직 존슨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사표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결국 조잡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태경의 두 눈동자에 깃든 저 의지는, 당장이라도 꺼질 듯한 의식을 부여잡은 사명감은 단 한 방울의 거짓도 깃들어 있지 않은 진실이었다.
‘빌어먹을.’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다.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매직 존슨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지금처럼 마력 농도가 짙은 상황에서의 텔레포트 마법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진태경이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 생각나네요.”
“뭐?”
“중국 쓰촨. 그곳에서도 같은 말을 했었잖아요. 그리고 보기 좋게 성공했었고.”
“……!”
“절 보내 줘요. 처음 선지자가, 아니 도플갱어가 알려 줬던 그 장소로.”
진태경을 바라보는 매직 존슨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말려야 하는데, 분명히 말려야 하는데.
빌어먹을 대마도사의 두뇌는 이미 계산과 동시에 합리적인 추론을 내리고 있었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금과 같은 마력 농도에서 펼치는 텔레포트 마법은 이미 아크 리치 토벌전 당시 한 차례 시도해 본 적 있다.
현존하는 마법사 중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매직 존슨이었기에, 그리고 그 대상이 진태경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텔레포트 마법이 아니라면, 진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도플갱어를 막지 못하겠지.’
진태경의 제안은 무모했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이미 도플갱어가 전장을 이탈하여 도주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 놈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단,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한다면.
또한 이토록 위험한 텔레포트 마법을 견뎌 낼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참으로 잔인하게도.
“Fuck.”
매직 존슨은 힘없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어느새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선 진태경이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진태경의 옆에는, 이 위험한 동행에 함께하기를 자처한 누군가가 있었다.
“이 몸도 함께 간다. 넌 이곳을 지켜라.”
스켈레톤 킹. 죽음마저 극복한 언데드의 군주.
그를 본 순간, 매직 존슨은 자신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가지만 약속해.”
우우웅.
마나를 머금은 스태프가 몸을 떨었다. 휘황한 섬광 너머,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살아 돌아와, 반드시.”
화아아악.
아득한 섬광이, 공간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