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omachines in Moorim RAW novel - Chapter 99
99. 이한이 선두에 선 이유
적봉족의 마을은 혈교의 총단 같지가 않았다.
가축을 모아놓은 우리도 곳곳에 있고, 도축을 하는 모습도 일상적으로 볼 수 있었다.
말젖을 치대며 치즈를 만들고, 마유주를 만드는 여자도 보인다.
거기에 아이까지 끼어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냥 평범한 유목민 마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나각의 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평범한 유목민 마을은 가면을 벗어던졌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 모를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을 곳곳의 방어거점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모두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움직임에도 절도가 있었다.
몇 년은 각을 잡고 훈련을 해야 나올만한 움직임이었다.
무림인보다는 군인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마을에 있던 건물과 각종 시설을 방어용 군사 시설로 바꾸기 시작했다.
가축을 가두고 인도하던 목책은 방어용 목책으로 탈바꿈했고, 천막을 치운 곳에서는 작은 방어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곳곳에 설치된 함정에 있던 안전장치를 제거해서 함정으로 작동할 수 있게 손질을 하기도 했다.
그들이 평범했던 유목민의 마을을 전투를 위한 진채로 뜯어고치는 동안, 조금 다른 분위기의 사람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색의 옷을 걸친 사람들이었다.
날아가듯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오랫동안 무공을 수련한 자들로 보였다.
병사처럼 규율이 서 있던 자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혈교의 총단을 지키는 정예가 분명했다.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기를 나르고, 함정을 손보는 것은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와중에서도 화려하게 치장한 몇몇 여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수상쩍은 일을 시작했다.
정신이 번잡할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한 여자들은 사람 크기만 한 붉은 색의 나무 말뚝을 들고 나타나서 마을 외곽의 중간중간에 박아넣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말뚝을 박을 때마다 대기가 요동쳤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먹구름도 조금씩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이한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자연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력한 진법을 발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진법을 미완성 상태로 놔두었다가 필요할 때 완성시키는 방식이 분명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들은 혈교의 술사들일 것이다.
이한은 나각 소리가 들릴 때부터 키를리안 시야로 자신의 시각을 보충한 후였다
그런 이한의 눈에 적봉족의 마을을 둘러싸고 천천히 돌기 시작하는 거대한 자연의 기운이 보였다.
과거 북양에서 보았던, 산에서 흘러내리던 기운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사막에서 흘러들어온 기운이 그대로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기운의 움직임은 여자들이 말뚝을 박을 때마다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붉은색의 말뚝을 모두 박아서 진법이 완성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직 미완성인 지금도 마을 주변에 불과하지만 국지적인 기후에 영향을 미칠 정도인데?
이한이 진법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은 그리 뛰어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저 말뚝을 부수지 않는다면 나중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는 정도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한은 자신이 나서서 방해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우여곡절은 있겠지만 진법을 잘 아는 실력있는 무림인들이 해결을 하기는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만약,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서 손을 대지 못한다면 그때는 자신이 직접 박살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여유만 있다면 말이다.
“나노. 새로 박아넣는 말뚝 위치 잘 기록해 줘. 나중에 부숴야 할지도 모르니까. 너무 멀어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네.”
[나중에 설치한 붉은색의 말뚝 근처에 접근하면 화살표를 말뚝 바로 위쪽에 나타내겠습니다.]이한이 나노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마을 외곽에 몇 개의 말뚝을 박아넣은 여자들은 마을 내부로 향했다.
마을 안쪽에 박아넣을 말뚝은 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전보다 더 크고, 섬뜩한 느낌의 붉은색 말뚝을 몇 개 가져오더니,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 일격에 땅속으로 박아넣었다.
그 모습을 본 나노는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내공의 힘은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저것이 인간의 근력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내공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인간 진화의 방향을 좀 더 다양화 할 수 있을 겁니다. 기관에서는 나노머신과 인공지능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일한 방향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전의 유용함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를 많이 쌓았으니까 기관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겁니다.]“우리?”
[이한 님과 저는 운명공동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형제보다 더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했으니까요.]“형제보다 더 가까운 것은 인정. 내게는 형제가 없으니까. 그런데 나노는 기관을 위해 정말 열심이네. 기관에 대한 신뢰가 큰 모양이야.”
[제 고용주이자 창조주를 불신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어딘지 모르게 냉소적인 느낌이 드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을 향해 집중하는 바람에 나노의 미묘한 반응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구덩이에 몸을 숨긴 채 눈만 내놓고 있던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설 뻔했다.
사람이 죽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이한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해서 잠깐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저것이 혈교였다.
혈교가 혈교한 것이다.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말뚝을 박고 있던 여자들은 새로 등장한 사람들을 말뚝 위에 하나씩 올려 놓았다.
그리고 말뚝 위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칼을 죽죽 그어댔다.
말뚝 위의 사람은 멍하게 선 채 자신을 향한 폭력을 그대로 당했다.
비명도, 신음도 없었다.
그러나 피는 흘렀다.
붉은색의 말뚝이 피를 흡수했다.
바싹 마른 스펀지 위에 물줄기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땅으로 튄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붉은색의 말뚝이 모조리 흡수했다.
만약 말뚝에 입이 있다면 게걸스럽게 마신다고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말뚝은 피를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점점 더 피와 비슷한 색깔이 되어갔다.
마치 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한은 말뚝을 붉은색으로 만든 염료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사람의 피.
인간의 생명력과 정신력이 담긴 정수.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 하나가 죽어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시체가 치워지고, 새로운 사람이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혈교 이놈들은 정말 죽어 마땅한 자들이로군.”
말뚝 위에서 죽어가는 자들 중에는 여자뿐 아니라 아직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자기들끼리 죽여대는 것도 충분히 미친 짓으로 보였지만, 아이들까지 죽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선택이 거세된 아이들의 운명이 이한을 자극했다.
“아! 이런. 이거 미친 짓인데.”
이한은 숨어있던 구덩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이한 님? 설마 지금 제가 우려하는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요?]“나노가 뭘 우려하는지는 알겠는데, 아무래도 계속 숨어 있지는 못할 것 같다. 더 이상 참기가 힘들어.”
[이한 님! 저자들은 모두 혈교도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이란 말입니다. 이쪽 문명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한 님의 관여가 오히려 지나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애들도 있잖냐.”
[아니! 왜! 평소에는 차갑고 냉철하시던 분이!]“내가 필요 때문에 일으킨 일로 사람이 너무 많이 죽을 것 같았지. 그리고 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런 감이 있기는 했는데, 죽을 각오로 혈교와 싸우러 가는 사람들 뒤에 숨어서 체리나 집어먹는 것도 좀 그랬어.”
[무공을 익히더니 명문 정파의 무림인이 되셨군요. 협은 이곳 사람들이나 하라고 하시지!]“물론 지금 당장의 기분만으로 이러는 것은 아니야. 저 짓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아무래도 위험이 커질 것 같은 점도 고려했지. 이곳에 모여든 기운의 양이 보통이 아니거든. 그리고 나노.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한은 자신처럼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적봉족의 마을을 내려다보는 사람을 보았다.
방금 도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한도 얼굴을 아는 자였다.
복세기를 만나러 갔던 낭인방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낭인이었다.
평소에 같이 다니던 몇 명의 동료와 함께였다.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지도를 퍼뜨린 통로 중의 하나가 낭인방이다보니 지도를 가장 먼저 접한 자들 중 한 부류가 낭인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이렇게 겁 없이 가장 먼저 오다니!
용기가 대단했다.
아니면 만용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욕심이 앞서서 아무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리가.
낭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거칠고 위험한 일을 하는 만큼, 사람 역시 거칠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간의 평가와 달리 그들은 예의가 없고 무모하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은 진작에 다 죽었다.
멀쩡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활동해 온 낭인이라면 겉보기와 달리 눈치가 빠르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뛰어나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빨리 왔다는 것은 그럴 만해서 왔다고 봐야 한다.
생각보다 크게 위험하지 않고, 횡재할 가능성은 오히려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그들조차 이런 광경은 상상 밖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경악한 채 굳어있는 사이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는 그들의 이점이 사라졌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과 같은 낭인은 물론이고, 중소문파의 무림인들도 계속 도착했다.
개방의 거지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낭인방의 낭인과 달리 개방의 거지들은 대부분 이한이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개방의 총타에서 법개와 집법당의 거지들이 영고 분타로 몰려와서 혈교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거지라면 모조리 목을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관련성을 발견할 수 없었던 거지들도 목이 잘린 거지와 친분이 있었다면 손이나 발의 근육을 자른 후 쫓아냈다.
한바탕 피가 흐른 후에 영고의 개방 분타에 남아 있는 거지는 열 명에 한 명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장 부족한 인원은 다른 분타에서 데려다가 채웠고, 총타에서 내려온 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영고 분타주와 분타의 중요한 직책을 차지했다.
덕분에 옥을 둘러싼 소동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끼어들겠다는 생각에서인지 모조리 몰려온 모양이었다.
그들의 뒤로도 계속 무림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소림의 승려를 필두로 한 대문파의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이익과 명분이 함께하니 망설이지 않고 온 것이다.
이한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았다.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버리고, 칼 한 자루를 어깨에 맨 채 적봉족의 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 중 가장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