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042
1042회. 경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군
엘리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애슐리 넬슨 남작이 계속해서 말했다.
“스쿠툼(빙벽)은 대륙의 전설이었다고요. 인간이 로디나 대륙에 정착한 이래 단 한 번도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어요. 오죽하면 ‘신의 방패’라고 불렸겠어요.”
“그랬겠네요.”
엘리오는 애슐리 넬슨 남작의 목소리가 올라가자 장단을 맞춰 주었다.
“대수림의 어비스도 마찬가지예요. 대수림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지금 남부 왕국들의 욕심으로 문제가 됐지만 실효성은 전혀 없다고 봐요.”
“실효성요?”
“남부 왕국들이 정작 대수림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애꿎은 모험가들의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거잖아요.”
“아, 그건 남부 왕국들이 대수림을 장악할 수 없다는 소리예요?”
“북부의 설원도 사람이 살기 어렵지만, 대수림은 북부의 설원보다 더 끔찍하니까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나무를 본 적 있으세요?”
“없는 것 같아요.”
“대수림은 그런 곳이에요. 제국과 왕국들이 대수림을 내버려 둔 것도 그런 자연환경 때문이고요. 인간 모두가 알고 있어요. 대수림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마수라는 걸요. 어비스는 그런 대수림 한가운데 있어요. 인접한 남부 왕국들이 손을 잡아도 정복은 꿈도 꾸지 못해요.”
“그러면서 제국과 다른 왕국들의 출입을 통제하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아니, 대수림의 출입을 통제할 수는 있어요?”
“그동안 모험가들이 어비스로 향하는 통로를 개척했거든요. 개척이라고 해서 대수림에 마을을 만들고 그런 건 아니고요, 대수림을 가로지르는 극히 일부분의 지도를 만들었어요. 그 경로의 시작 지점이 남부 왕국에 있고요.”
“아하! 그러니까 개척된 경로의 시작 지점을 통제하면…….”
“맞아요. 어비스까지 가는 새로운 경로를 개척해야 하는데, 얼마가 걸릴지는 아무도 몰라요. 대수림의 상황을 고려하면 최소한 수십 년이 걸릴 거예요. 그동안 대수림과 인접한 남부 왕국들이 보물을 독점하겠다는 거죠.”
“그건 좀 치사하네요. 그 경로를 남부 왕국에서 개척한 거라면 이해가 가는데……. 대륙의 모험가들이 만든 거라면서요?”
“그렇죠. 그래서 제국이 앞장서서 남부 왕국들을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오가 물었다.
“그런데 남부 왕국들이 다 대수림에 접해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들은 반대하지 않나요?”
“대수림에 인접한 남부 왕국은 셋이거든요. 그곳에서 미리 손을 썼는지 아무런 의견 표시를 하지 않고 있어요. 이런 경우에 말이 없는 건……. 그 세 왕국을 지지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네요.”
엘리오는 동감을 표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남부 왕국들 간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반응이었다.
“지금까지 잠잠하던 남부 왕국들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걸 보면, 어비스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요.”
엘리오는 그게 강철 골렘과 관계되었음을 알지만 말하지 않았다.
마구스 킬리언 헤일 공작이 마법 병단에 알리지 않은 내용을 미리 공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수림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 어디인가요?”
“개척된 경로의 시작 도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아드리아 왕국의 페로무로스라는 도시예요. 엘리오 경도 어비스에 관심 있으세요?”
“나중에 한번 방문해 보려고요.”
“어머, 저도 그런데. 가시게 되면 저에게도 꼭 좀 알려 주세요.”
“마법 병단은 어쩌시고요?”
“휴가라도 내죠 뭐. 어비스의 탐사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엘리오가 망설이자 애슐리 넬슨 남작은 변명하듯 말했다.
“사실 어비스 탐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믿을 만한 사람들과 파티를 구성하는 거예요. 대수림도 그렇지만 어비스 인근에 있는 트레저 헌터들의 도시도 엄청 위험하거든요. 온갖 수배자들이 다 모여든 곳이라서요.”
그제야 엘리오는 애슐리 넬슨이 왜 자신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보기와 달리 모험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그러니 마법 병단의 기사가 됐겠죠?”
애슐리 넬슨 남작이 엘리오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언제라고는 말씀을 못 드립니다. 그러니까 혹시 믿을 만한 파티를 찾게 되시면 먼저 가셔도 됩니다.”
“네, 엘리오 경만큼 믿음이 가는 파티원을 만나게 되면, 그렇게 할게요. 그럼, 잠정적으로 우리는 동료인가요?”
“예, 정말 동행하게 될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요.”
“올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애슐리라고 불러 주세요. 저도 계속 엘리오 경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귀족들 간에 호칭은 성을 사용하는 게 예의다.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것은 친밀감의 표시였다.
그러나 ‘라고아’의 성이 익숙지 않았던 엘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이름이 편합니다.”
말 그대로 ‘라고아’보다 ‘엘리오’라는 이름이 익숙해서 한 소리다.
잠시 후 알파 중대 앞에 도착하자 애슐리 넬슨 남작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엘리오 경. 나중에 봬요.”
“예.”
엘리오가 무덤덤하게 인사를 받자 애슐리 넬슨 남작은 뭔가 말을 더 하려다 그냥 돌아섰다.
엘리오가 1소대 기사 숙소로 들어가자 편하게 쉬고 있던 케일과 기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작님, 축하드립니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듯 케일이 대표로 인사를 건넸다.
엘리오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1소대 기사들과 자신의 사이에 한 번은 있어야 할 순간이었다.
“부대는 정해졌습니까?”
케일의 물음에 기사들이 일제히 엘리오의 입을 보았다.
다들 그게 가장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직요. 균열 감시에 투입되기 전에는 알려 주겠죠? 나는 이대로 지내도 상관은 없는데.”
그건 그의 진심이었다.
기사들과 정이 든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그게 부담이 될 만큼 히르헤라에서 죽음은 비일비재했다.
당장 알파 중대만 해도 균열 감시 임무에 투입될 때마다 두세 명씩 죽어 갔다.
다른 영지군이 매번 열 명 안팎의 희생자를 냈으니 알파 중대가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쿠누트가 끼어들었다.
“저희도 남작님이 저희 중대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요. 남작님 덕분에 알파 중대의 피해가 가장 적었는데, 다른 데로 가시면 안 됩니다.”
리들리의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파 중대의 사상자가 다른 영지군과 비교해 눈에 띄게 적은 것이 엘리오 때문인 까닭이다.
엘리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지위는 남작에 불과했기에 기사들에게 어떤 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
***
다음 날 정오.
엘리오는 후작의 참모인 오스카 아비드 자작의 부름을 받았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엘리오는 기사들의 응원 속에 막사를 나섰다.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웃으며 말했다.
“엘리오 라고아 남작. 이거 참 입에 붙지 않는군. 그냥 엘리오 남작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예.”
엘리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곳 사람들은 꽤나 호칭에 집착하는 것 같았다.
“축하는 어제 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우리 영지군은 알파, 벨라토스, 찰리 중대로 나누어져 있네. 알다시피 알파는 균열 감시, 벨라토스는 마법사 보호, 찰리는 지원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지. 참고로 코드란테스 영지군은 디바, 에쿼스, 페리움 중대고, 푸토코아는 골리앗, 히어로, 아이콘 중대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지. 디바 중대와 골리앗 중대를 균열 앞에서 만났으니 알 거야.”
“예.”
엘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히르헤라에 있는 영지군들은 약속이나 한 듯 최전방 부대, 마법사와 움직이는 부대, 지원부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리는 경을 위해 루퍼스 중대를 창설하기로 했네.”
“루퍼스요?”
“늑대라는 뜻인데 경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군.”
“아, 예에.”
엘리오는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신경 쓰였던지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급히 말을 이었다.
“오해는 말게. 경이 야인 출신이라 늑대 중대라고 이름 지은 건 아니니까. 북부에서 늑대는 신성한 야수로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다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정히 이름이 내키지 않으면 다른 것으로 정해 줄 수도 있네. 전쟁의 신 마르티우스라든가, 승리의 빅토리에라든가…….”
“아뇨, 그냥 늑대가 낫겠습니다. 루퍼스로 하지요.”
엘리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후작과 지휘관들이 바라는 게 뭔지 이름만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전쟁의 신’이니 ‘승리’니 하는 것보다 차라리 늑대로 불리는 게 마음 편했다.
승패를 떠나 늑대처럼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다.
“경이 루퍼스라는 이름을 원한다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네. 지금까지 알파 중대에서 생활을 했는데, 경의 중대로 데려가고 싶은 기사가 있나?”
엘리오는 뜻밖의 제안에 잠시 망설였다.
마음 같아서는 1소대 기사들을 다 데려가고 싶었지만, 중대장인 데니스 로빈 남작의 입장도 생각해 줘야 했다.
“1소대의 파비안을 보내 주십시오.”
“알겠네. 더 알고 싶은 게 있나?”
“루퍼스 중대의 임무는 뭔가요?”
“알파 중대를 근거리에서 지원하는 일을 맡게 될 걸세.”
엘리오는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남겨 둔 1소대 기사들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 가셔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자작님. 루퍼스 중대의 병사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입니까? 혹시 세 개 중대에서 조금씩 빼낸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나. 지금 있는 병력도 지속적인 손실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되지. 영지에 남아 있던 병사들을 추가로 데리고 왔네. 오후에 루퍼스 중대로 발령 낼 테니 짐을 꾸려 두도록 하게.”
“예.”
“더 궁금한 게 없으면 돌아가 쉬도록 하게.”
오스카 아비드 자작의 말에 엘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보던 오스카 아비드 자작이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수일 내로 베일럼 왕국의 지원부대가 합류할 걸세. 그것으로 균열 감시 임무도 조금은 수월해질 거라 믿고 있네만……. 나쁜 소식도 있네.”
“나쁜 소식요?”
“베일럼 왕국군이 합류하는 날, 코르보 마법 병단이 철수하겠다고 하더군. 제국의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서 그렇다는데……. 제국인들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엘리오는 자작에게 묵례를 해 보이고 천막을 벗어났다.
어젯밤 기사 숙소 앞에서 애슐리 넬슨 남작이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만 그래서 그랬던 모양이다.
문득 얼마 전 킬리언 헤일 공작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흑마법사가 한 달이나 넉 달 후면 활동을 재개할 거라고 하셨죠?
―최소 7서클, 어쩌면 8서클일 수도 있네. 게다가 히르헤라에 테르미누스까지 설치되었다면, 9서클 마법도 가능해. 솔직히 나도 그의 상대가 안 되네. 설사 자네가 소드마스터라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걸세.
이렇게 중요한 때에 코르보 마법 병단까지 제국으로 돌아간다니 조금 허탈했다.
빙벽이 뚫리면 대륙 전체가 혼돈에 빠질 텐데 제국은 어비스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사람들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
무림의 위기 앞에서 호천맹과 남맹이 이전투구(泥田鬪狗) 하는 걸 지겹도록 봤는데, 이세계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의 본성이 그런 걸까?
숙소로 돌아간 엘리오는 1소대 기사들에게 자작과의 대화를 알렸다.
‘파비안만 데려가기로 했다’고 하자 기사들의 어깨가 축 처졌지만, ‘루퍼스 중대가 알파 중대 지원 임무를 맡는다’고 하자 다들 좋아했다.
점심 식사 후, 엘리오와 파비안은 베르나르도 후작가에 신설된 루퍼스 중대로 거처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