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213
1213회. 부모 심정도 헤아려 주세요
큰일을 겪으면 사람이 변한다.
갑자기 납치 사건에 휘말린 안드리아 지터 가족도 그랬다.
부인인 샤인 코울스로는 항상 주변을 경계했고, 호기심 많던 싱크레어 지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알고리움을 떠난 뒤로 한동안 엘리오 일행이 탄 마차는 조용했다.
몇 개의 영지를 지나 마차는 마침내 아발란트 공국에 접어들었다.
아발란트 공국을 지나면 파티마 공국이니 목적지 절반쯤 온 셈이다.
아발란트 공국.
사비에르 백작령.
해거름 무렵.
세 대의 마차와 가드들이 사비에르 백작의 성이 있는 도시로 진입했다.
피에스트라를 출발한 마차들이다.
번화한 도시를 보자 샤인 코울스로와 싱크레어 지터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납치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 같았다.
운송 책임자인 레온 토로스가 안드리아 지터에게 다가와 ‘혹시 모르니 가급적 가드들의 눈이 닿는 곳에 계시라’는 말을 하고 갔다.
물론 그것은 대귀족 모험가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었지만 안드리아 지터는 운송 책임자의 특별한 배려로 받아들였다.
세 대의 마차가 낡고 오래된 태번 앞에서 멈춰 섰다.
이윽고 가드들이 열 여덟 명의 승객들을 태번(tavern, 술집 겸 여관)으로 몰아넣었다.
도시마다 역마차 운송 협회와 계약한 태번이 있지만, 독점적 영업을 하다 보면 나태해지기 마련.
절반의 승객들은 더럽고 불결해 보인다고 다른 식당을 찾아갔다.
최종적으로 가드들이 안내한 식당에는 가드들과 함께 움직이고 싶거나, 일 벌이기 싫어하는 승객들만 남게 되었다.
안드리아 지터의 가족이 전자라면 엘리오 일행은 후자에 속했다.
보름간의 동행으로 안드리아 지터 가족과 엘리오 일행의 관계도 많이 좋아졌다.
싱크레어 지터의 경우 어쩌다 엘리오 일행과 눈이 마주치면 빤히 쳐다보기도 할 정도였다.
지금도 그랬다.
식후에 차를 마시던 엘리오는 어린 계집애가 자신을 빤히 보자 대뜸 물었다.
“왜?”
샤인 코울스로는 보름간의 동행으로 경계가 약해졌는지 딸과 모험가의 대화를 막지 않았다.
“아저씨, 모험가죠?”
“어.”
“모험가는 강한가요?”
“자기 한 몸 지킬 정도는 되지.”
그러자 파비안이 슬쩍 끼어들었다.
“꼬마야, 이분은 엄청나게 강해.”
싱크레어 지터가 파비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나쁜 사람들도 물리칠 수 있어요?”
“당연하지.”
“모험가가 되려면 뭘 해야 돼요?”
“그야 당연히 검술이나 마법을 익혀야지. 너도 모험가가 되고 싶냐?”
“네, 모험가가 돼서 나쁜 사람들을 물리칠 거예요.”
“그건 치안대가 하는 일인데? 모험가가 아니라 치안대를 가야지.”
“치안대는 무서운 곳이잖아요.”
“모험가는 안 무섭고?”
“네.”
그러자 파비안이 조금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얘가 모험가를 아주 물로 보네. 모험가도 무서운 사람들이야.”
“안 무섭거든요?”
“너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 아냐?”
파비안이 헛소리를 늘어놓으려 하자 엘리오가 그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그만해 인마. 나는 네가 입 놀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해.”
“농담도 못 합니까.”
“어, 하지 마. 너는 좀 재수가 없어. 꼭 말이 씨가 되더라고.”
그러자 라르바 오마르 백작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도 그의 입에 재난을 불러오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마르 경, 제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라고요. 억울합니다.”
파비안이 하소연했지만 엘리오와 라르바 오마르 백작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싱크레어 지터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모험가들을 구경했다.
확실히 모험가는 치안대와 달리 동네 아저씨들 같았다.
모험가를 처음 접한 그녀는 엘리오 일행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싱크레어 지터가 숟가락으로 엘리오 앞에 놓인 황동잔을 통통 두드렸다.
엘리오가 힐끔 쳐다보자 그녀가 말했다.
“아저씨는 검술을 배웠어요? 마법을 배웠어요?”
“둘 다.”
“마검사예요?”
싱크레어 지터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열두 살인 그녀도 마검사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
엘리오는 퉁명스러운 어조였지만 대화의 흐름을 끊지 않았다.
과거 같았으면 자리를 피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딸이 생각나서다.
“마검사는 좀…… 힘들지 않아요?”
어린 싱크레어 지터가 주워들은 지식으로 알은체를 했다.
그제야 안 되겠다 싶었는지 샤인 코울스로가 딸에게 주의를 줬다.
“싱크레어, 잘 모르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네, 죄송해요.”
때마침 다른 식당을 찾아 자리를 이탈했던 승객들이 하나 둘 돌아오면서 한적하던 태번이 북적거렸다.
그러자 안드리아 지터 부부는 가드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그 틈에 싱크레어 지터가 엘리오에게 나직이 말했다.
“모험가 아저씨. 검술과 마법은 어디서 배웠어요?”
“검술은 집, 마법은 사원.”
“예에? 집에서 검술을 배웠어요? 귀족이세요?”
“아니, 조상님 중에 기사가 있었어. 그분의 검술이 내려온 거야.”
“유명한 분이에요?”
“아니, 아무도 몰라. 시골에 있던 기사라. 왜? 너도 검술 배우고 싶어서 그러냐?”
“네. 모험가가 되려면 배워야 하잖아요.”
“흠.”
엘리오는 ―과거 무당파 원로들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싱크레어 지터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솔직히 반신(半神)의 경지인 지금도 뭐가 좋고 나쁜지 모르겠다.
‘사지가 멀쩡하고 눈이 흐리멍텅하지 않으면 되는 건가?’
그의 기준에서 싱크레어 지터는 나쁘지 않았다.
팔다리는 날렵해 보였고, 눈동자도 어린아이답게 티 하나 없이 선명했다.
“저어, 아저씨…….”
“왜?”
“아니에요.”
꼬마가 말을 돌리자 엘리오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그였지만 막상 꼬마가 말을 끊으니 볼일 보고 뒤를 닦지 않은 것 같았다.
“뭔데? 말해 봐.”
“싫어요. 말 안 할래요.”
싱크레어 지터는 고개까지 격렬하게 좌우로 저었다.
이렇게 되자 엘리오는 어떻게든 꼬마가 하려던 말을 듣고 싶어졌다.
“말하면 일 코퍼 준다.”
“저한테 십 코퍼 있거든요? 그보다는 제 부탁을 하나 들어주세요. 그럼 말할게요.”
“흐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주마. 말해 봐.”
“약속한 거예요?”
“어. 빨리 말해. 숨넘어가겠다.”
“검술을 가르쳐 주세요.”
“…….”
순간 엘리오는 못마땅한 얼굴로 물러났다.
별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저건 예상을 넘어선 발언이었다.
싱크레어 지터가 설명하듯 말했다.
“그게 제가 하려던 말이었어요. 이제 제 부탁 말하면 되죠?”
“미리 말해 두는데 검술이나 마법은 못 가르쳐 준다. 가르칠 시간도 없고.”
“검술을 가르쳐 주세요. 시간이 없으면 쪼끔이라도 좋아요.”
“…….”
꼬마의 집요한 청에 엘리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때는 자신이 언법(言法) 수련자라는 게 진짜 짜증 난다.
뒤늦게 엄마인 샤인 코울스로가 딸의 말을 듣고 서둘러 나섰다.
“싱크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안 돼. 보름만 더 가면 도착하는데 무슨 검술을 배운다는 거니? 괜히 바쁜 모험가님 괴롭히지 말고 가만히 있으렴. 정 검술을 배우고 싶으면 아카데미에 보내 줄게. 모험가님, 신경 쓰지 마세요. 애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그녀는 검술이나 마법은 아카데미에서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 중요한 걸 왜 뜨내기 모험가에게 배운단 말인가!
‘나중에 아카데미에서 자세를 교정하려면 싱크레어만 고생할 거야.’
샤인 코울스로가 펄쩍 뛰며 만류하자 싱크레어 지터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샤인 코울스로도 싱크레어 지터도 몰랐다.
엘리오에게 약속은 제국의 황제도 막을 수 없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파티마 공국에 도착할 때까지 따님의 검술을 지도해 주겠습니다.”
“네? 괜찮아요. 바쁘신데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싱크레어, 괜찮다고 말씀드리렴.”
엄마의 채근에 싱크레어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안 가르쳐 줘도 돼요.”
“아니, 내가 안 괜찮다. 나는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꼭 지켜야 한다. 그러니 파티마 공국의 역에 도착할 때까지 검술을 가르쳐 주마.”
엘리오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샤인 코울스로는 남편인 안드리아 지터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내가 결사적으로 반대하자 결국 안드리아 지터까지 나섰다.
“모험가님. 안 가르쳐 줘도 됩니다. 철부지 아이의 말이니 한 귀로 흘려버리십시오. 아직 어려서 검술을 가르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한 소립니다.”
“아이는 뭘 모르고 한 말이겠지만, 그것을 약속한 나는 어른입니다. 내가 한 약속을 번복할 수 없으니 가르쳐야겠습니다. 설사 황제라 해도 내가 한 약속을 번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엘리오가 정색을 하자 샤인 코울스로는 기가 막혔다.
고작 역마차 운송 협회의 마차나 타고 다니는 모험가가 아이와의 약속에 황제를 끌어들이니 더욱 맡기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좋은 말로 해서는 듣지 않겠구나.’
그녀는 조금 더 독한 수단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무엇이든 기초가 중요한 법이지요. 우리 아이만큼은 파티마 공국의 검술 아카데미에서 기초부터 제대로 가르쳐 줄 생각이에요. 모험가님의 검술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모험가님보다는 아카데미가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부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부모 심정도 헤아려 주세요.”
엘리오는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안드리아 지터가 다시 한번 거절하려고 할 때 가드들이 승객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부터 숙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태번은 가족이나 동행 단위로 방이 배정됐다.
안드리아 지터 가족은 방이 배정되자마자 달아나듯 자리를 떠났다.
엘리오 일행도 셋이 묵을 수 있는 커다란 방 하나를 받았다.
침상에 걸터앉아 검술 지도를 고민하는 엘리오에게 파비안이 말했다.
“저어, 이건 그냥 궁금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라고아 백작님은 왜 그렇게 약속에 집착하십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어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조금 전 꼬마의 경우 부모가 그렇게 반대하면……. 그건 약속을 어긴 거라고 볼 수도 없지 않습니까?”
“말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뭔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야. 생각해 봐. 마법사들의 마법도 그 뿌리는 결국 말이잖아. 전에 킬리언 헤일 경에게 들었는데, 자기 말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마법사는 강해진다고 하더라. 마법사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고. 나 역시 말의 무게가 강할수록 마법의 위력도 강해져. 그래서 약속을 잘 하지 않지만, 어쩌다 하게 되면 반드시 지키려고 하지.”
“저는 절대로 마법을 배우면 안 되겠네요?”
“배우려고 했었냐?”
“알고리움의 잡화점에서 하신 그 마법은 좀 탐이 났었습니다.”
“참고로 그 마법은 너와는 극성이다.”
“저도 말의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익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파비안의 뻔뻔한 발언을 들었음에도 엘리오는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파비안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부모의 반대가 저렇게 심한데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교육은 본래 어려운 법이다.”
“라고아 백작님의 말씀은 묘하게 어긋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통역의 문제일까요?”
“네 마음의 문제다.”
엘리오는 침상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맞다.
마음의 문제다.
싱크레어 지터를 보면 자꾸 딸이 떠올라서 뭐라도 주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