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 Life Returner RAW novel - Chapter 213
15화
내가 탄 마차는 경비 초소 앞에서 잠 깐 멈춰 섰다.
돌로 쌓은 벽이 협곡 진입로를 큼지 막하게 막아서고 있는 곳.
석벽에서 균열을 보이는 부분들에선 그라프들의 체액이 흘러 굳은 형태로 존재했으며,일대의 지면에는 인위적 인 흐름의 마나가 퍼 져 있었다.
그라프들이 장벽 아래를 파고 나오 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흐름임에 분명했다.
오딘의 분노에서 느낄 수 있는 흐름 과 비슷한 걸로 봐서는 그라프들이 지 하를 침투할 때 뇌전(雷電) 성향의 공 격을 받게끔 설계된 것 같았다.
넓이도 넓이지만 꽤 강력하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들은 한 거탑에 서 물줄기를 틀듯 나오고 있는 것이었 다. 거기가 광범위한 지하에 뇌력 철 조망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인 것이다.
마법력이 집약되어 있는 거탑은 비 단 그라프들을 대적할 때만 활용되는
게 아니다.
전시(戰時)에도 활용된다는 것을 익 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향하 는 내 시선은 썩 좋지 않았다.
이윽고 한참 후였다.
다시 마나의 세계에 몰두해 있던 때 였다.
그런데 땀으로 젖은 로브가 등에 달 라붙어 있는 이질감이나 엉덩이로 전 해져 오는 진동까지 보다 뚜렷해지고 있었다.
집중이 깨지고 있는 것이었다.
외부의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제 기억으론 메이어(Mayer) 비바 투스의 집권기 때가 마지막 토벌이었 습니다.”
“초소장도 그렇게 얘기했었네. 이거 참 이상한 일이군. 유체 하나 코빼기 도 보이지 않다니,우리 주의 가호라 고밖에는……. ”
더 집중하려고 했지만,한계점까지 몰아쳐 왔던 게 틀림 없었다.
감각을 풀어 버리는 순간에 정말로 뇌리 속부터 찌릿한 게 시작되더니, 이내 묵직한 통증으로 골 전체를 흔들 어 대는 것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초극의 감각을 유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창을 가리고 있던 천을 완전히 걷어 버렸다.
시야가 확 트였다.
붉은빛이 감도는 황무지가 펼쳐졌 다.
실제로 고개를 내밀어 육안으로 확 인해 보자 말라비틀어진 옛 강변은 물 론 깎아 세워 놓은 듯한 절벽들까지 전부 치워져 있었다.
모두가 극도의 긴장감 속에 협곡을 지나쳐 왔던 시간들이 무색해지던 순 간이었다.
하지만 협곡은 그라프들의 본격적인 서식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불과하기 때문에,탐사대 진형은 돌발적인 전투 를 상정한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신변 보호가 필요한 자들.
그러니까 나를 위시로 아인할,고위 사제 마놀리아,마법사 쎄레빌까지 넷.
거기에 바스만까지 포함한 그들이 마차 지척에서 걷는 중이었다.
아인할은 바스만과 하던 대화를 중 단하고 나를 쳐 다보았다.
바스만은 행여나 고위 사제가 내게 시비를 걸어올까봐 본인이 먼저 고위
사제에게 말을 붙이는 중이 었다.
그때 아인할이 물었다.
“필요한 게 있소?”
“배가 고프군.”
“당신이 먼저 식사를 요청하는 건 또 처음이구려. 조금만 기다리시오. 거의 다 왔소.”
아인할은 아니었지만,탐사대원 중 몇은 이쪽 영역에 경험이 있었다.
이윽고 탐사대가 본진으로 잡은 지 역은 과거의 탐사대들도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지역이되,수년 동안 이 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흔적 들이 잔존해 있는 곳이었다.
오래된 무덤들에선 손가락뼈나 두개 골 같은 것들이 무덤 밖으로 돌출되어 있었고,그라프들이 파고 나왔던 것으 로 보이는 숱한 구덩이들도 흔적만 남 았을 뿐,대부분이 막혀 있는 채로 존 재했다.
모두가 본진을 꾸리는 데 손을 거들 고 있는 시각.
나는 마차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 다.
지난 며칠간 용변을 해결할 때만 모 습을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 위 사제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긴 첫 만남에서 이미,나에 대한 관심은 안
좋은 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에 내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을 드 러내 관심을 더욱 증폭시킬 필요는 없 었다.
염색하거나 컬러 렌즈를 착용하지 않더라도 내 후드를 벗길 수 있을 만 한 능력자는 존재치 않으니까.
후드 정도면 훌륭한 위장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을 더 깊이 눌러썼다.
그러고 나온 바깥 한켠에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탐사조 대원들이 사제들이 쥐여 준 문헌집을 손에 들고 흩어지던 그때에
도 나는 테이블에 있었다.
나를 두고 음험한 말들을 속삭이던 아인할과 바스만 중,바스만이 터벅터 벅 걸어와 내 앞에 앉았다.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사는 처진 눈을 가진 사 내.
가만히 있어도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은 그 눈이 나를 응시했다.
“항상 나를 주시하고 있다가,대지에 서 진동이 느껴지면 바로 내게 뛰어오 시게. 나도 어지간하면 그대 곁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마 놀리아 님 말인데,사제께서 그대를 미덥지 않게 여기는 것이야 모를 수
없을 테고.”
이제 바스만의 시선은 고위 사제를 쫓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의 습격도 없이 협곡 을 관통한 것에 대해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나를 앞에 두자마자 불길한 직감을 느꼈던 바를 보면 올드 원을 직접적으 로 섬기는 자들에게는 특유의 안테나 같은 게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탐사가 끝난 후 본인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어 있는지까지 는 차마 알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엘슬란드의 여왕에게
데려다줄 것이다.
별다른 리스크 없이.
“그대의 신앙심이 그리 깊지 않으니, 사제와 그대는 되도록 말을 섞지 않는 편이 낫네. 나는 이번 탐사에 기대가 커. 성공리에 끝이 나기만 한다면 내 게도 명예가 따라오기 마련이네. 하니 진심을 다할 거라는 걸 의심하지 말라 말해 두고 싶었네.”
한껏 부풀려진 청구서의 인력 비용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게,바로 이 녀석에게 들어가는 비용 이었다.
마법사보다도 윗선을 차지하고 있다.
그간 마나의 흐름에 몰두하고 있었 기 때문일까.
어느새 나는 녀석의 내부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녀석의 마나는 타원체 네 개가 한 점 에서 맞물려 있는 꼴로 끊임없이 움직 이고 있었다.
큰 형상 자체는 네 잎 클로버와 닮은 그 모습에서 벗어나질 않으나,그것이 운동하고 있는 바는 강물에 큼지막한 돌 하나를 던져 놓은 것처럼 큰 가변 성(可變性)을 보이고 있었다.
반면에 오뇌르의 것은 느릿하고 조 용했었다는 게 떠올랐다.
정통 검맥을 꾸준히 수련해 온 자와 우연찮게 마나의 길에 들어선 이래로 본인만의 전검(戰劍)을 다듬어 온 자 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형상이 품고 있는 움직임.
즉,마나의 흐름이 침착하다 느낄 만 큼 정돈되어 있을수록 뛰어난 수준인 것.
거기까지가 이계 검사들의 세계였 다.
그때.
화악-!
뇌리에 눌러앉은 무거운 두통 속으 로 뭔가가 관통되 어 져 오는 기분이 들
었다.
그간 스킬의 회전력을 인장에 결부 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던 것이 허사가 아니게도,마나의 흐름을 읽는 눈이 전보다 월등히 상승한 것을 퍼뜩 깨달 았기 때문이었다.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듯 해 온 시간 들이 마냥 허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도가 나가고 있었다.
그날 밤에 나를 방해한 것은 아인할 도 바스만도 아니 었다.
[* 서왕모의 만년지주알] [ 개봉 까지 남은 시간 : 3분 ] [ 경고: 곧 서왕모의 만년지주 알이 개봉 됩니다.]꿈틀거 리는 느낌이 특별했다.
그래서 눈을 떠 보니 그런 메시지가 뜬 채 시야 정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 바깥,야영지 본진은 아직 한 번 도 그라프들의 습격을 겪은 적 없지만 여전한 긴장감으로 팽배했다.
탐사조들이 흩어지고 남은 공백 때
문에 보초 인원은 지금까지보다 배 이 상 많았다.
또한 그라프들을 잡을 때 사용되는 것으로 보이는 대형 무기들도 조립이 끝나,횃불의 불빛에 의해 커다란 그 림자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만년지주가 얼마큼 큰 크기로 등장할지 모르지 않았다.
인적이 없는 널찍한 공터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바스만과 고위 사제 마놀리아가 야 심한 밤을 틈타 몸을 섞고 있던 광경 을지나친 뒤였다.
사방 군데로 흩어져 있는 탐사조들
과 교착되지 않는 지점을 찾다 보니 본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개안을 발동시키지 않고서는 사물이 분간되지 않는,달빛이 전무한 밤.
개봉을 앞둔 알이 허공을 뚫고 나왔 다.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적 당히 거리를 벌렸다.
만년지 주.
열여섯 개의 붉은 눈알을 박은 그 거 미 괴수는 굉장한 소리를 내며 깨어났 다.
그것이 몸체를 키우는 공간에 들어 가 있던 바위들은 먼지로 변했다.
거대한 방적돌기에서는 이미 끈적끈
적한 실을 오줌처럼 흘려 대기 시작했 다.
그때 만년지주의 붉은 눈알들이 사 방으로 초점을 옮겨 대다가 내게로 집 중됐다.
여덟 개의 다리를 곤두세웠을 때는 나 역시 시선을 높이 가져가야 했다.
구름이 온 하늘을 가리고 있었기에, 나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알들이 하나 하나 붉은 별빛으로 보였다.
거대한 형체로 시야를 차지하고 있 는 다리들은 하늘과 땅을 잇고 있는, 어느 위대한 신전의 거대 기둥 같았 다.
만년지주가 움직 였다.
큼지막한 움직임. 먼지를 일으키며 땅을 파는 행동이 세상에 깨어난 기쁨 에 도취된 행동으로 느껴졌다.
인근에 타고 오를 절벽이 있었다면 거기에서 자신에게 집약된 공능을 시 험해 봤을 테지만 협곡은 한참 멀리 있었다.
만년지주는 땅 아래로 제 몸만 한 굴 을 파고 자취 감췄다. 구덩이 외부는 굴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흙들에 의해 뭉개져 가고 있었다.
땅속에서 지면까지 전달되는 움직임 들이 한참이나 컸다.
그 안에서 어떤 열정을 퍼부었는지 는 모를 일이나,멀리 움직였던 만년 지주가 다시 돌아와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는 하부의 배 쪽에서 불 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년지주가 숨을 쉬면서 배를 부풀 릴 때마다 그 붉은 빛은 브레스를 토 해 내기 직전의 해골 용의 것처럼 선 명한 빛깔을 띠었다.
그쯤에서 나는 만년지주를 향해 손 을 올렸다. 그만 진정하라는 뜻에서였 다.
열여섯 개 붉은 눈알들이 나를 내려
다 보는 시간이 비로소 길어지고 있었 다.
그러다 한 기점에서였다.
[ 만년지주가 당신을 완전한 주인으로 인 식 했습니다. ] [ * 완전한 주인 : 이탈 시간 등의 제약 을 받지 않습니다.]관절을 세우고 있던 다리,부풀렸던 배, 위협적으로 뻗쳐 있던 독니들. 그것들이 순종을 맹세하듯 가라앉은 것도 바로 그때 였다.
해골 용은 엄연히 이탈 시간의 제약
이 있었다.
제한된 시간을 넘어서 이탈해 버리 면 통제권을 잃게 되는 제약이었다.
하지만 그런 제약이 없어진다면 사 실상 연희가 다루는 크시포스처럼 독 립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 다.
그때 만년지주가 보다 자세를 낮췄 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그것이 대가리 까지 완전히 지면에 접촉시켰을 때 느 낄 수 있었다.
만년지주 위로 올라타던 순간을 기 점으로.
직전에 보인 기쁨에 취해 있던 움직 임 그대로 지하를 파고 들어가기 시작 했다.
만년지주는 성체 그라프들만큼이나 땅을 파 들어가는 데 일가견이 있었 다.
또한 견고한 토굴을 만드는 데에도 대단하다는 것쯤은,본 시대 팔악(A 惡)이 만년지주의 주인으로 있을 때 익히 봐 왔던 일.
지하에는 만년지주가 짧은 순간에 만들어 낸 토굴들이 벌써 여러 갈래 길로 존재했다.
녀석은 자신의 능력 중 하나인 그것
을 내게 뽐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토굴의 거대 공간에서 한 번 더였다.
[ * 완전한 주인 : 고유 스킬 ‘번식’을 지 시할수 있습니다.]녀석의 독니가 시야 전방에서 달싹 거리고,뒤쪽 항문에서는 실을 뽑아내 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전해져 왔다. 이제야 알겠다.
본 시대의 팔악은 이 녀석을 제대로 써본게 아니었다.
[ * 완전한 주인 : 아이템 레벨이 대폭 상승하였습니다.]성장형 아이템이었던 건가.
번식!
만년지주의 진면목을 확인하고 나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나 조나단보다는 조슈아에게 특히 나 유용하게 쓰일 녀석이라고.
조슈아는 자체 군단을 형성하는 데 특 화된 타입으로 스킬,오시리스의 영역 을 통해 그림자 군단을 부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옛 뱀파이어 군단을 계 승했다.
바야흐로 뱀파이어 군주로서 군단을 확충시키는 데에도 큰 잠재력을 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년지주를 조슈아에게 인계 하기 에는 만년지주가 그를 ‘완전한 주 인’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보이지 않 았다.
성장을 최고조로 끝낸 본 시대 말기 의 팔악(八惡)마저도 가능한 일이 아 니었으니까.
항문을 꿈틀거 리고.
드러난 독니로 애걸하다시피 하고
있는 만년지주를 올려다보면서 말했 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자. 하고 싶은 만큼 낳아 보거 라.”
[ 만년지주에게 스킬,번식을 지시 했습 니다.]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두꺼운 실을 세차게 뽑아내는 것이었다.
만년지주를 토굴에 남겨 놓고 야영 지 본진으로 돌아왔다.
정작 거기는 난리가 나 있었다. 지금껏 그라프들의 습격이 단 한 번
도 없었기 때문에 더 긴장감을 폭발시 키던 중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들은 만년지주가 땅속을 헤집고 다녔던 움직 임을 오인하고 있었다.
고위 사제 마놀리아와 마법사 쎄레 빌은 한 쌍으로 묶여 호위 검사들의 방벽 속에서 사방을 주시하는 중이었 고,대(對)그라프용 투척 병기에는 운 용자들이 탑승해 있었다.
아인할이 내게 뛰어와 다짜고짜 소 리를 질렀다.
“한참 찾았지 않소! 매번 마차 안에 만 있던 양반이 하필 이럴 때……
걱정과 안도가 교차한 얼굴에선 정 말 눈물까지 글썽거 렸다.
황금 거위가 그라프에게 잡아먹혔을 것을 가정하면 그리도 심장이 철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
주변은 밝았다.
빛을 퍼트리는 쎄레빌의 마법 구체 가 허공에 떠 있기도 했고,잡부들이 설치해 뒀던 횃불들에 불을 붙여 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독 행동은 위험하다 하지 않았는 가,모험가 양반.”
바스만까지 거들고 나왔다. 그의 두 눈은 붉게 변해 있었다.
내 앞으로 달려왔음에도 그의 시선 은 빛이 닿지 않는 너머들을 노려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라프들은 영리한 족속들이네. 그 것들이 흉측한 모습을 했다고 얕잡아 보기엔 우리처럼 사고를 한단 말일세. 우리의 규모가 상당하기에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그대는 지금 그것들의 배 속에 있었을 거야.”
“본인의 실력을 과신하지 마시게. 그 럴 거면 왜 우리를 왜 대동해 왔는가, 이 말이네.”
바스만이 검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에 아인할이 덧붙였다.
“이쪽으로.”
나는 아인할이 뻗어 오는 손길을 뿌 리쳤다. 그러고는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장소로 향했다.
맞다. 마법사와 고위 사제가 보호받 고 있는 검사들의 방벽,그 안이었다.
“어딜 다녀온 거죠?”
고위 사제의 목소리는 청량한 동시 에 나를 향한 적의가 풍겨져 나왔다.
그런 그녀의 목덜미에선 어떤 나무 껍질 냄새가 났다.
바스만이 평소 씹고 다니던 나무껍 질 냄새였고,비단 목덜미뿐만 아니라
정숙하게 정돈해 둔 그녀의 로브 안 곳곳에서도 똑같은 냄새를 맡을 수 있 었다.
내 감각을 피할 순 없다.
그녀의 전신 어딘들 바스만의 혀가 아니 훌고 지나간 곳이 없던 것이다.
바스만이 그녀의 가슴골에 얼굴을 파묻고,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로 입술을 반쯤 열고 있었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녀는 엄중한 얼굴을 하고서는 중 년 남성의 손길에 참 쉽게도 무너졌 다.
그게 아니라면 여자를 매혹하는 바
스만의 기술이 절정에 다다랐든지.
어쨌거나 둘의 관계가 끈적끈적해질 수록 그녀가 탐사대를 떠날 가능성은 줄어드는 것이 었다.
내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걸, 스스로 중단할 수 없을지 라도 말이다.
바스만이 그의 남성성으로 고위 사 제를 묶고 있다. 고맙게도.
나는 대꾸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고위 사제가 자신이 무시당했 다 생각했어도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 다.
내가 그녀 안의 마나를 훑고 있듯이,
그녀는 그간 내게서 느껴 왔을 불길한 직감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용쓰는 것 같았다.
“내게 할말이 없습니까?”
그녀가 먼저 말을 뱉었다.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녀가 바라는 대로 내 출신 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알면 경악으로 까무러치겠지만 그건 연희를 옆에 두었을 때로 예정되어 있 는 일이다.
아인할과 바스만,둘의 모략질이 어 느 순간 성급하게 궤도를 이탈하지만 않는다면.
예컨대 황금 거위의 배를 갈라 보기 로 마음을 바꿔 먹는다거나 하지만 않 는다면 말이다.
어쨌거나 요 며칠간 그녀가 보여 주 었던 모습들이 있었다.
그녀는 흥분으로 번질거 리는 눈빛을 띠곤 했었다
그런데 바스만과의 불장난 때문이라 고만 여기기엔,그 눈빛으로 혼자서 고서들을 뒤적거리는 순간들이 종종 있어 왔다.
“지금쯤이면 이름 하나 정도는 들을 수 있겠다 생각했었습니 다.”
“무슨 말인가요?”
“필요하다는 대로 다 지원해 줬습니 다. 성(聖) 카시안의 기록서를 열람하 기 위해서 또 이에 능하신 분을 모시 기 위해서 말입니다. 한데도 아직까지 이름 하나 얻질 못했습니다. 유적을 발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는 건 압니다. 그렇다면 적어도,어떤 유적을 탐사하고 있는지는 파악되어 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마놀리아 님. 아 인할의 명의로 신전에 기부한 황금이 어느 정도인지는 들으셨습니까?”
고위 사제는 직접적으로 이런 대우 를 받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인 지,미간만 굳히고 있었다.
내 입에서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려 던 그때. 아인할이 허겁지겁 끼어들었 다.
“지금 무슨 불경을……
고위 사제의 화가 치민 목소리도 그 때 동시에 나왔다.
“둠 엔테과스토!”
그에 모든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됐 다.
“이제 됐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시간이 멈춰 버린 듯 공기까지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움직이는 거라고는 깜박거려지는 사 람들의 눈꺼풀뿐이었다.
그 외에는 동작이 멎어 버린 채,일 초가 십 분 같이 흘러갔다.
내게도 그 이름은 뜻밖이 었다.
그라프들의 서식지라서 둠 인섹툼 정도에서 그칠 줄 알았건만 둠 엔테과 스토라니?
고위 사제의 만면으로 후회가 번지 고 있었다. 그녀와 처음부터 같은 연 구에 매진해 왔던 사제들도 두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다.
“곧 알려 드리려 했습니다.”
그녀는 우리들 쪽으로 쓴 목소리를 뱉었다.
내가 아닌,바스만을 향해서였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요,마 놀리아 님. 분명 사악한 마왕의 이름 을들었습니다.”
바스만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며 말했다. 항의하고 있는 거였다.
고위 사제는 자책 섞인 낯빛을 띠며 고개를 끄덕 거 렸다.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왜 모를까,그래서 그녀는 힘들어 하는 기색이었다.
사제들이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소 용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미 바스만에게 고 정되어 있었다.
바스만이 그녀에게 실망했다는 듯이 느릿한 한숨을 홀리던 때.
그녀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바스만의 손짓을 무시하면서 이렇게 말을 덧붙 였다.
“여기는…… 성(聖) 제이둔께서 둠 엔테과스토와 성전을 벌이신 곳일지 도 모릅니다. 그럼 그대들은 성지에 발을 딛고 있는 게 됩니다. 우리 주 락 리마의 가호를.”
유적에도 급이 있다.
성 카시안이나 성 제이둔 같은 태고 의 홀리 나이트들과 관계가 있다면 S 급.
하물며 두 번째 마왕,둠 엔테과스토 까지 얽혀 있다면 역경자를 터트려 버 린 것과 비슷하게 SS급이 되어 버리는 거다.
당연히 탐사대는 흥분에 휩싸였다.
그런데 진짜 흥분으로 범벅된 장소 는 만년지주의 준동으로 중단되었던 바로 거기,바스만과 고위 사제가 다 시 살을 맞대고 있는 쪽이었다.
배꼽 아래로는 종교도 없고 진리도 없 다는 말은 고위 사제에게 제격이 었다.
그라프의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난리를 쳤던 그 밤마저,바스만을 은 밀히 불러낸 것이 그녀였으니까.
그녀는 성(性)에 눈을 떴다.
“언질이라도 해 줄 수 있던 것 아니 었습니까.”
“미안해요,바스만. 그동안엔 확실치 가 않았어요. 저도 안 지는•…”. ”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해 오셨습니 까?”
“아…… 흑…… 얼마 되지 않았어 요”
둘의 대화는 간드러지는 신음 소리 다음으로 잠깐 몇었다.
“해도 모두가 다 들었습니다. 성 제 이둔까지 언급하신 건 지나치셨습니 다,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마왕의 이 름을 처음에 언급해버리고 말았으니 까요. 거기서 멈췄다면 다들 두려움에 떨…… 아……
“발견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혀와 혀가 섞이는 음란한 소리가 따 라붙었다.
바스만은 내 수하가 아니었지만 정 작 벌이는 짓은 그에 준했다.
사제가 탐사대를 이탈하지 못하도록 막고,또 그녀의 내면에만 감춰져 있 던 말들을 끄집어내 내게도 들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또 아인할은 어떤가. 내 주머니를 털 어먹으려고 혈안이 된 만큼 비용을 부 풀릴 수 있는 항목들을 청구서에 모조 리 밀어 넣었다.
신전에 있는 성 카시안의 기록물과 는 별개로,그가 도시에 퍼져 있던 지 방 고서들을 사들인 양만 해도 몇 수 레는 넘었다.
거기에 수레를 끌 잡부들을 추가시 키며 인건비를 부풀리고,또 거기에 잡부들이 먹을 식료품을 추가를 구입 하며 그 수레를 끌 잡부들을 또 추가 시키고.
아인할은 단지 착복하기 위해서였지 만 그가 사들인 쓰레기 고서들 중에는 고위 사제에게 영감을 준 것도 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마놀리아 님.”
고위 사제가 영감 받은 고서의 이름 들과 내막을 읊어 나가던 중,바스만
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이 말 을 가로챘다.
“어쨌든 복귀 즉시,도시 연합의 메 이어(Mayer)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 해질 겁니다. ”
“거기까진 생각 못…… 아…… 아…… 멈추지 말아요. ”
“하지만 그걸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두려운 건,사제님과 헤어질 수 도 있는 경우입니다. 메이어들이 사제 님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그들은 엠퍼러 엑사일의 군대를 주 시하느라 여유가 없어요. ”
“아닙니다. 위대한 성물(聖物) 하나 는 전황을 바꾸는 법입니다. 그도 아 니라면 엠퍼러 엑사일의 귀에도 이 일 이 들어갈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제께선 사실을 말한 것에 불과하나 전쟁의 불씨를 당긴 것인지도 모를 일 입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이번 탐사에서 발굴을 끝낸다면 모 든 게 해결됩니다. 저도 사제께 성심 # 다할 테니, 사제께서도 탐사에 성 심을 다해주시면•,
“아흑“””!그래요. 그래요. ”
바스만의 정성이 통했다.
고위 사제는 밤낮을 잊고 몰두하기 시작했다.
탐사조들이 넓혀 가고 있는 지도를 제 옆에 큼지막하게 두고,그 옆에는 온갖 고서들이 위태위태한 자태로 쌓 여 있기 마련이었다.
나도 마냥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마나를 탐구하는 틈틈이 주변에 주목 할 곳이 없는지,초극의 감각을 심심 치 않게 퍼트려 왔었다.
하지만 특별한 걸 느끼지 못했다.
모두가 불가사의하게 여기는, 그라 프들의 습격을 받지 않는 날들 또한 매일매일 이어지고 있었다.
그 날은 마나의 세계에서 빠져나왔 어도 스킬의 회전력을 선명하게 연상 할 수 있을 만큼 진도가 나간 날이었 다.
식자재들로 채워져 있던 수레가 바 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날이었으며,내 식탁에도 요리 가짓수가 현저하게 줄 어든 날이기도 했다.
아인할과 바스만 역시 본인들의 식 사량을 줄이고 있었다.
그들은 나보다 열성적이 었다.
도시로 귀환하면 2차 탐사를 명목으 로 탐욕 가득한 청구서를 내게 내밀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그들의 목표는 황금에서 성물(聖物)로 바뀐 지 오래 였다.
둘은 도시로 돌아가는 즉시,여기가 도시 연합의 권력자들에 의해 교착 전 장으로 변해 버리게 될 거란 걸 확신 하고 있었다.
성 제이둔이 마왕 둠 엔테과스토와 성전을 치른 곳.
가뜩이나 그라프들까지 사라져 버린 곳.
내가 생각해도 인근의 권력자들이 여기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첫 탐사가 실패로 끝을 맺는다면 적당한 조치를 취할 생각이 었다. 누구도 내 영역에 접근하지 못 하도록.
그런데 그날 탐사조 하나가 환희의 함성과 함께 복귀한 것이었다.
“마놀리아 님의 말씀이 맞았습니 다!”
그 목소리에 흥분을 누르지 못한 이 는 아인할과 바스만뿐만이 아니 었다.
고위 사제는 오래된 곰팡냄새로 찌 든 손을 씻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청중의 환호를 부추기는 슈퍼스타처럼 두 팔을 연거푸 치솟아 올리고 있었다.
어서 거기로 야영지를 옮기자는 몸 짓이었고,비로소 탐사에서 처음으로 진전을 보인 순간이 었다.
이후 야영지를 옮길 준비로 모두가 들떠 있던 무렵에서였다.
빌어먹을 진동에 또 집중이 깨졌다. 막 몰입하려던 찰나라서 짜증부터 치 밀었다
창밖은 고위 사제가 둠 언테과스토 를 언급했던 때만큼이나 격정에 사로 잡혀 있었다.
잡부들은 몸을 떨면서 탐사조들이 쓰던 곡괭이라도 찾아 헤매는 중이었 다.
드드드 —
단언컨대 그 진동은 만년지주가 만 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충실한 녀석은 자신의 아방궁에 서 번식 활동 중이지 않은가.
지하의 움직임에 따라,지면도 오르 락내리락하며 커다란 형체로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저것들.
성체(成體) 그라프란 걸 확신할 수 있었다.
[ 만년지주가 전투에 돌입하였습니다. ]만년지주가 본인의 아방궁을 만들어 둔 방향 외,나머지 방향들에서 성체 그라프들을 위시로 한 그라프 떼가 밀 려든다.
그것들이 향해 오는 방향으로 온 땅 들이 뒤집어지고 있었다.
바스만의 외침은 그가 직접 지면의 꿀렁거 림들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 을 때 터졌다.
“성체! 성체다아아아아一!”
그 외침을 들으며 나는 이렇게 생각 했다.
그라프들이 단체로 미쳐 돌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