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Chapter 323
325. 경계의 왕 (2)
창백했던 시리스의 안색이 살구빛 을 띠기 시작했다.
무한의 힘이 조각난 뼈와 근육를 잇고,끊어진 신경과 혈관을 접붙였다.
점점 뚜렷해지는 박동. 그리하여. “쿨럭!”
시리스의 입에서 죽은 피가 튀어
나왔다.
“콜록! 콜록콜록!”
“시리니! 죽지 마!”
니하쿠가 매달리듯 말했다.
나는 시리스의 가슴에서 손을 뺀
뒤 중얼거렸다.
“질질 짜지 마. 안 죽었어.”
니하쿠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뒤이어 시리스의 눈꺼풀이 흔들리
더니,녹색 눈망울이 빛을 담았다. “시리니!”
니하쿠가 시리스를 벌컥 껴안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
를 깨고 싶진 않거든.
이 녀석도 수고가 많았다. 방심이 든 뭐든,나와 직접 맞상대하는 것 으로도 모자라,심장에 칼을 꽂아넣 어야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 니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한 번 죽 기까지 했고.
“..마스터.”
시리스는 쓰러진 채로 나를 돌아 보았다.
힘 빠진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그 호칭으로 나를 부르지 마라/
게임은 끝났다.
픽 미 업의 마지막 마스터인 암케 나가 접속을 끊고 나면, 서버가 다
시 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뫼비우스와 지구의 교차점은 영원
히 사라지고 말겠지.
“저는…… 윽!”
허리를 일으키려던 시리스가 눈썹 을 찡그렸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무 한의 잔과 이어졌다지만,그녀에게 도 새로운 힘에 적응할 기간이 필요 할 것이다.
“시리니! 무리하지 마! 또 쓰러지면 어떡해!”
시리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니하쿠 를 보았다.
그러더니 재차 나와 눈을 마주쳤다. “쉬고 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저는…… 마스터에게…… 용서 르..•’
“무슨 용서? 아,지구로 날 쫓아내 려던 거? 진작에 다 잊었는데.”
나는 뒷머리를 긁었다.
따지고 보면,니플헤임에게 도움
을 많이 받았다. 애초에 나는 게임 을 플레이할 때 영웅들의 사정을 조 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시리스와 유 르넷,리디기온,뮤덴과 니하쿠. 각 각 한 번씩은 나에 의해 죽기 직전
까지 가거나,소중한 동료를 잃은 경험이 있었다. 어지간히도 굴려먹 었으니까.
‘칼침 안 맞은 것도 다행이지.’ 그렇게까지 잘해줄 줄은 상상 못
했는데 말이야.
“오른팔이랑 왼눈이 없군. 기다려 봐. 재생해주마.”
“괜찮습니다.”
시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제 실수에 대한 죄값으
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외눈에 외팔이로 살겠다고?” “싸움에 영향은 끼치지 않을 겁니다.
새로운 방법을 익힐 테니까.”
시리스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무언가 굳게 결심했을 때의 표정.
나는 따지고 들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내버려두는 편이 좋겠지. 나 중에 설득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Now Loading..] [니플헤임이 재생성되는 중입니다!]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쿠구구구궁. 비프로스트가 꽂힌
자리의 옆,아름드리 나무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기둥이 솟아오르고 있
었다. 기둥의 정체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내가 심혈을 짜내 설계했던 대기실, 니플헤임의 핵심 구조물이 었다.
“이그드라실.”
곁에 있던 유르넷이 입을 열었다. “저 나무로부터, 신생 니플헤임이
만들어지겠죠.”
땅을 뒤흔드는 미약한 진동. 기둥으로부터 수많은 가지가 뻗어
나갔다. 꽃과 잎사귀가 피어나듯이, 가지에서 빛이 퍼져나가 공간을 채 우기 시작했다.
그저 어둡고 공허할 뿐이었던 바
닥이 깨끗한 타일로 마감됐다.
암흑의 지평선이 펼쳐져 있던 사
방이 두껍고 튼튼한 벽으로 가려졌다. 광장을 상징하는 분수가 투명한
물을 뿌렸고,그 주위로 벤치가 조 립 되었다.
‘이 광경은……
본 적 있었다.
내가 여기에 처음 떨어졌을 때, 대기실이 만들어질 때의 바로 그 장 면이었다.
가지에서 뿌려진 빛은,광대하고 드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내 가 알던 니플헤임의 풍경을 복원하
고 있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 던 이 경계에 새로운 빛과 색을 불 어넣고 있었다.
“왕이시여.”
유르넷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누가 왕이냐.”
“마스터라 부르는 것을 금지하시 지 않았나이까.”
“나는 왕이 아니야. 그딴 호칭으로 부르지 마라.”
유르넷이 난처한 듯이 나를 보았다. 이름을 정해달라는 뜻이겠지. 마
스터도 왕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한서 진.
지구에서의 삶은 버렸다.
한 이스라트도 마찬가지. 타오니
어에는 프리아나 다른 동료를 만나 러 한 번은 가야겠지만,거기에 눌 러앉을 수도 없다. 그 이름도 이제 끝난 것이다.
“로키.”
어느 신화에서 세계를 멸망시킨 신의 이름.
내 계정명이기도 했다.
“로키 님.”
유르넷이 읊조렸다.
그러더니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저는 왕이라는 호칭이 마음에 듭 니다만.”
“앙?”
“저희 세계에서도 왕은 환상 속의 존재였으니까요. 만백성을 승리로 인도하며 번영을 이끈다는…… 그런 전설이 있었지요.”
지구라고 다른 줄 아나.
그곳에서 왕이란 존재는 과거의 유물이었다.
역사책으로 몇 번 살펴봤을 뿐, 지금의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납득했습니다.”
내가 이 부분을 설명하자, 유르넷
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제 역할은 아직 그 자
리에 어울리지 않는 로키님을,진정한 왕의 자리에 인도하는 것이겠군요.”
“뭐라?”
“괜찮습니다. 저희도 신하가 무엇 인지,충성이란 게 뭔지 잘 모르니 까요. 서로 배워나가면 되지 않겠습 니까. 언젠가는 만족할 만한 관계를 맺을 거라 생각합니다.”
유르넷의 눈부신 미소에 나는 넋 을 잃어버렸다.
어이가 없어서.
“겨우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은 도망 못 치실 겁니다. 우 후후.”
“….”
계약을 파기할 거라 생각하진 않겠습니다,로키님.”
유르넷이 말을 마쳤다.
뭐, 이 정도는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겠지.
받아들인 건 나 자신이었다.
뿌우우.
우렁찬 나팔 소리.
나는 위를 올려보았다.
〈니플헤임 전군,전진!〉
차원문 너머,무수한 비공정이 모 여들고 있었다.
드디어 니플헤임의 본대가 도달한 모양이었다.
〈타천의 불을 밝혀라!〉
드넓은 경계의 하늘이 가려졌다.
기함인 브륜힐트01을 중심으로, 수백 대의 크고 작은 비공정이 함대 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니플헤임의 상징인 산양 조각상을 앞세운 채 전진하는 중이 었다.
“로키님에게 영원한 승리를 안겨 줄……:
“내버려 두면 죽지 않냐,저거?”
” …그렇습니다만.”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곳의 싸움은 바깥과는 완전히 다르다.
놈들을 쓸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므하하하하하!]
브륜힐트01의 뱃머리.
해적모와 안대를 쓴 요정이 광소 를 터뜨렸다.
[정직원이 된 이상,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파편들아,보이느냐! 나의 이 초 하이퍼 슈퍼 울트라 황
금 함대가! 두려움에 떨거라,므하 하핫! 어디 을 테면…….]
“재는 다시 인턴으로 만들어라.” “예.”
나는 망토를 펄럭였다.
내가 디디고 선 신생 니플헤임이
속속들이 재구성되고 있었다.
‘나의 영지.’
니플헤임.
앞으로는 나의 요새이자 성이 될 것이다.
‘재밌을 것 같군 새 게임을 시작하는 기분이야.
한 번 더 마스터가 되는 것이다.
그 전과 차이점이 있다면,이제는 나의 명운도 니플헤임과 함께한다는 것.
「알아둬라.J 나는 중얼거렸다.
힘이 깃든 목소리가 경계 전역으 로 퍼져나갔다.
「나와 계약한 이상, 너희는 죽어도 죽지 못해.」
죽어도 살아나서 싸워.
우리는 하나인 동시에 모두가 될
것이다.
무한의 잔은 더 이상 나 하나만의 힘이 아니다.
「대신 너희에게,내가 싸울 힘을
주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승리를 움켜쥐기 위해.
“왕에게 승리를.”
리디기온이 읊었다.
〈승리를!〉
〈승리를!〉
〈승리를!〉
〈우리의 왕에게,승리를!〉
〈경계의 왕에게,승리를!〉
아득한 합창이 울려 퍼졌다.
“새 전력이 필요하겠군요. 뫼비우
스의 전 차원에 연락책을 만들어 놓 겠습니다. 전쟁을,그리고 명예를 원
하는 자가 있다면,우리와 함께할 수 있도록.”
유르넷이 말했다.
“그들에게 우리는 발할라(Valhalla) 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입니다.”
발할라.
나쁘지 않은 어감인데.
“타오니어에 몇몇 유력한 후보가
있는데,들어보시겠습니까?”
“그건……
나중에 할 일이야.
나는 씨익 웃었다.
“아론.”
” 예”
“여기 온 것을 후회하지 않나?”
아론이 창을 매만졌다.
“후회는 질릴 정도로 했습니다.” “그래?”
“수천 년 동안이나,질려버릴 정도 로,남는 게 없을 정도로 했지요.”
내가 나쁜 놈이긴 하지.
아론이 훈련소 교관으로 남았다면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몫 그대로 편하
게 살다 갔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여동생 곁에서 웃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의 업보로군.’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든 것도. 영원의 싸움에 뛰어들게 만든 것도. “형님.”
“음?”
“더 이상 할 후회는 없습니다.”
아론이 확신 어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앞으로도 형님의 곁에서 싸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영광은 무슨.”
잘 따라와 주었다.
오랫동안 진전이 없어 고통받았을
때도 나한테 원망 한 마디 내뱉지 않았다.
모든 걸 부족한 자신의 탓으로 돌 린 녀석이었다.
나는 리디기온을 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태도의 칼집을 내보일 뿐. ‘말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니하쿠는 아예 구석에서 질질 짜
고 있었다.
“정말 다행임다, 마스터……. 마스
터….”
나는 어깨를 으쏙거렸다. 그리고.
“시리스.”
어느 정도 몸이 회복한 듯했다.
시리스가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천으로 묶은 왼눈과 펄럭이는 오
른팔 소매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나의……;
서브 마스터.
내가 가장 총애했던 영웅.
처음에는 유일한 4성이었기에 아
끼고 있었지만,도중부터 알 수 있 었다. 이 녀석은 평범한 영웅과 다 르다는 사실을.
때때로 실수도 하지만,
결국에는 옳은 길을 나아간다. “보기 안 좋다. 팔이랑 눈은 재생해.” “언젠가.”
시리스가 입을 열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지어졌다.
“제가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을 때, 붙이겠습니다.”
“또 말 안 듣네.”
이런 게 시리스답기도 하지만. ‘마스터와 영웅.’
일차원적인 관계는 끝났다.
길게 이어질 싸움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쌓아 올릴 때였다.
‘행복해 달라.’
마스터의 마지막 명령.
뭔지 모르겠지만,노력해볼 생각
이었다.
‘마스터.’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암케나의 조작창이 명멸하고 있었다. 오래 버틸 수 없어. 곧 접속이 끊
기고 말 것이다.
경계의 위.
작디작은 스마트폰의 화면 안에서 암케나는 나를 보고 있었다.
[Warning!] [서버가 불안정합니다!] [접속 종료를 대비해주세요.]하긴. 이제 끝이다.
서로 갈 길이 너무나도 달라.
‘앞으로는 게임 좀 적당히 하고.’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 던데.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좋지만,일상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적당적당히 해야지.
내가 할 말은 아닌가.
뭐,상관없다.
..야.,,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거든.
“이거 좀 바꿔줘.”
나는 군마 조각상을 들어 올렸다.
어찌나 많이 만져댔는지,머리와 발이 닳아 없어져 있었다.
지금은 조각상도,무엇도 아니다. 단순한 덩어리일 뿐이다.
[선물 상점!] [5,000골드로 _군마 조각상’을 구 매합니다.] [‘군마 조각상을 ’한에게 선물합니다!]덜컥.
나는 휘파람을 불고는 새 조각상 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잘 가라.”
지직. 지지직.
두어 번의 노이즈와 함께 암케나 의 조작창이 닫혔다.
[Error!] [접속이 끊겼습니다.]상공에서 떠돌던 빛이 사라졌다. 나는 조각상을 매만진 채 말했다.
“너희들,니플헤임의 상징을 바꿔 야 한다고 생각 안 하냐?”
유르넷이 눈을 깜박였다.
나는 조각상을 벨트 뒤의 파우치
에 조심스레 넣었다.
“산양은 촌스럽잖아. 멋도 안 나
고. 기왕 새로 시작하는 김에…… “혹시 손에 들고 계신 장난감을
말씀하신다면,사양하겠습니 다.”
시리스가 헛기침을 했다.
“아까 전에 반성한다며.”
“이것과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시리스는 나를 보며 웃었다.
‘이런.’
멋을 모르는 중생들이군.
나는 혀를 쯔쯔 찼다.
그오오.
그 순社 어디선가 들리는 울음소리. 나는 손을 뻗었다. 바닥에 꽂혀
있던 비프로스트가 날아와 손아귀에 잡혔다.
말을 꺼낼 필요도 없나.
이미 다들 전투 준비를 끝마치고
있었다.
언제 여유를 부렸냐는 듯,그들의 표정에는 긴장이 가득했다.
‘혼자가 아니다.’
낯선 느낌이었다.
옆에 누군가 있어 준다는 건.
아주 오래도록 느껴보지 못한,그
런 간질거리는 감각.
그와 동시에 새로운 투지가 타올
랐다.
‘끝은 존재한다.’
언젠가 승패는 나뉠 것이다.
이 길고 긴 전쟁도 끝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이곳에 서 있을 수 있을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
웃음이 나왔다. 혼자일 때도 그랬어. 나는 승산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그아아아아아!
수천 마리의 파편들이 쏟아져 나 왔다.
물론,이기는 건…….
“여기다.”
나는 비프로스트를 치켜들었다.
내 곁에서 다른 영웅들이 뛰어올
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