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61
60. 각인
* * *
강림 던전을 클리어한 이튿날.
유르넷의 잔소리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왜 무모한 도전을 했냐는 둥, 죽으면 어쩔 뻔했냐는 둥, 나는 약 두 시간여에 걸쳐,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잠자코 들었다.
살짝만 어긋났다면, 그동안의 고생이 무색하게도 죽었을 테니까.
등급이 높고, 희귀하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각인이 아니다. 영웅의 태생과 마찬가지로, 무엇이든 하기 나름이라는 거지.
욕심을 부리긴 했어.
목숨을 걸어서 얻은 각인이 A급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다시 생각해봤을 텐데.
어쨌든 나는 무기 소환의 모든 스택을 소모했고, 몇몇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앞으론 내 힘으로만 싸우게 될 것이다. 마스터 간의 소규모 분란이 일어나도 가능한 니플헤임은 끌어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음을 잡은 암케나에게 잘못된 버릇을 들이고 싶진 않으니.
‘흑룡혈.’
내가 어제 획득한 각인의 이름이다.
바로 오늘, 각인을 박은 뒤 테스트를 거칠 예정이었다.
그런데…….
“히히힝!”
회색 말이 고개를 들고 울었다.
건초더미를 품에 안은 키샤샤가 말에게 다가갔다.
“미안, 간달프. 밥 시간이구나.”
키샤샤가 말 앞의 먹이통에 건초를 놓자, 간달프가 허겁지겁 건초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맛있게 먹어. 얼마든지 있으니까.”
타오니어의 2층.
나는 시공의 틈의 부속 시설인 마구간에 와 있었다.
한창 키샤샤가 마구간에 있는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와중이었다. 키샤샤는 건초를 부지런히 나르고, 더러워진 바닥을 빗자루로 쓸어담으며 물통의 물을 갈았다.
“도와줄까.”
“아니. 내 취미야.”
정색을 한 키샤샤가 바닥의 풀을 갈퀴로 쓸어 담았다.
나는 구석에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와준다고 해도 극구 싫어하니.
마구간의 동물들을 돌보는 일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취미라는 것이다. 고향에서도 동물을 여러 마리 키웠다고 한다.
‘3층 숙소도 없어지긴 했지.’
키샤샤의 고향과 비슷한 환경이었던, 대기실 3층의 숲과 마을은 진즉 철거됐다.
뭐,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방해는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짚더미 위에 주저앉아 키샤샤가 바쁘게 일하는 걸 지켜보았다.
“…….”
나도 좋아서 여기 있는 게 아니다.
각인을 박기 위해선 혼자 있을 만한 장소가 필요했으니.
내가 있는 4층의 저택은 리모델링을 한다고 난리였다. 내 방에서 각인을 시도할 예정이었던 나는, 네리사에게 반강제로 쫓겨났다. 훈련소도 마찬가지. 시설을 업그레이드하는 중이었다. 시설도 일정 레벨 이상부터는 증축에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 시간대에 인적이 없을 만한 장소는 여기, 마구간밖에 없다.
새벽에 해도 되지만, 테스트 시간까지 포함하면 늦어질 수도 있다. 지금은 암케나가 접속하지 않는 낮 시간대였다.
“이거만 끝내고 나갈 거야.”
키샤샤가 마구간의 물통을 새로 채우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여기에 와있는 이유를 아는 것 같다.
‘일단은…… 세 마리.’
나는 마구간 전체를 둘러보았다.
현재 타오니어 소속의 말은 세 마리였다.
각각 간달프와 사루만, 라다가스트. 제나와 키샤샤가 요일 던전에서 포획한 것이다. 앞으로 임무 규모가 점차 대형화될 테니, 필요한 말의 숫자도 점차 늘어날 것이다. 좀 더 상위 임무로 가면, 말뿐만 아니라 다른 탈것도 생겨나겠고.
“그런데…….”
나는 마구간 구석에서 빨빨거리고 있는 동물을 가리켰다.
“저건 뭐냐?”
“아, 저거 말이냐.”
키샤샤는 빙긋 웃더니 그 동물에게 다가갔다.
“마침 네 먹이를 안 줬네. 밥 먹자!”
“구…… 구구……!”
살이 푸짐하게 찐 비둘기가 홰를 치면서 키샤샤 주위를 맴돌았다.
“차원도시에서 데려왔어. 먹이를 주니 비공정까지 따라오더구나. 귀엽지 않아?”
비둘기가 모이를 정신없이 쪼아먹기 시작했다.
비둘기는 무슨. 닭둘기겠지. 돼지처럼 살이 찐 나머지 목이 보이지도 않는다.
“이름은 구구콘이다.”
“구구콘?”
“구구~ 하고 울지 않느냐! 음후후.”
키샤샤는 사랑스럽다는 듯 비둘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둘기는 모이를 처먹느라 신경도 쓰지 않았다.
“구, 구구구…….”
취향은 존중하기로 했다.
키샤샤의 수인 베이스는 호랑이일 텐데.
이 녀석은 식사 시간에 태연히 생고기를 뜯는 놈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슴의 뒷다리를 뜯어먹는 모습을 본 카티오가 기겁하기도 했다.
‘용케도 안 잡아먹네.’
살이 포동하게 올랐는데.
그러고 보니 치킨을 먹어본 지도 꽤 지났다.
튀겨먹으면 맛있을 거 같았다.
“구……!”
비둘기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흠칫 몸을 떨었다.
키샤샤도 찌릿 나를 노려보았다.
“한,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무슨 소리를.”
눈치 한번 빠르네.
나는 피식 웃은 뒤 팔짱을 꼈다.
구구콘이 모이를 먹을 동안, 키샤샤는 새집을 청소하고, 모이통에 듬뿍 먹이를 담았다. 그리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대강 정리가 끝난 듯했다.
“나는 가보마. 이상한 짓 하면 안 돼.”
“걱정 마라. 손도 안 댈 거니까.”
“그럼.”
상쾌한 얼굴이 된 키샤샤가 마구간을 나갔다.
나름 스트레스가 풀린 것 같다. 오래 싸우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이기 마련. 제때 풀어주지 못한다면 컨디션 불량이 올 수도 있다. 나를 포함해, 1파티 멤버들은 각자 하나씩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나는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바닥에 쏟았다. 검은 구슬이 또르르 떨어졌다.
흑룡혈의 각인석이었다. 그 옆에는 비상용으로 준비한 회복 물약이 놓여 있었다.
마구간의 출입문을 잠갔다.
남에게 보여줄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구! 구구구!”
“히이이이잉!”
‘그냥 내일 할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금이야.
각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시도해야 한다.
“……하아.”
심호흡을 깊게 한 다음, 손을 각인석으로 가져갔다.
[각인을 시작합니다!] [사용 각인석 – 진 흑룡혈(A)] [해당 영웅 – 한(★★★★)] [성공 확률 – 알 수 없음]각인창이 시야에 떠올랐다.
[※주의!] [각인은 실패할 수 있으며, 실패한 영웅은 오염 상태에 빠집니다. 정말 각인을 시도하시겠습니까?] [Yes / No]뒤이어 요란한 소음과 함께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각인에 실패하면 네 영웅은 X된다.
대충 그런 뜻이다.
아무리 그 전까지 실력이 뛰어난 영웅이더라도, 여기서 실패하면 한순간에 끝이다.
오염에 걸린 영웅은 거의 되돌아오지 않으니까. 나도 수많은 유망주들을 승급과 각인에서 잃었었다.
‘정신력 문제야.’
실전을 거치면서 단련된 영웅들은, 웬만해선 오염에 빠지지 않는다.
100층까지 가려면 이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어 줘야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숨을 한 번 더 내뱉은 다음, 홀로그램을 터치했다.
[Yes(선택) / No]그리고 각인석의 표면에 왼손을 가져갔다.
[각인이 시작됩니다!] [의식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려주세요.]우우우웅.
각인석이 부르르 진동했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혈관 자체가 얼어붙는 듯한.
낯익은 목소리가 귀에서 울려왔다.
중후하면서 패도적인 음성.
어제 나와 한판 벌였던, 그 흑룡의 것이었다.
파지지지직.
왼손에서 검붉은 번개가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다만 고통은 거의 없었다.
……음소거 기능은 없나.
서서히 왼팔의 감각이 느껴졌다.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느낌이었다.
“좀 조용히 해라. 네 이야기는 하나도 안 궁금하니까.”
이상한 망상을 하는 것 같다.
나는 놈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팔에 집중했다.
왼팔 전체에서 검붉은 번개가 타오르고 있었다.
‘각인 위치는 여기인가.’
왼팔에서 스킬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이것도 제대로 알아둬야 하지.
“히히히히힝!”
“구…… 구구구!”
뭔가 알아챘는지, 동물들이 시끄럽게 울부짖고 있다.
특히 구구콘은 내 주위에서 날갯짓을 하며 정신 사납게 펄떡거렸다.
파직. 파지직.
왼팔의 번개가 잦아들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건…….’
왼팔의 팔뚝에서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선명한 칠흑색 광택. 흑룡의 비늘이었다.
다만 비늘은 얼마 안 지나 사라졌고, 멀쩡한 피부로 돌아왔다.
파지직.
번개가 잦아들었다.
나는 왼팔을 돌려보았다.
정상적으로 움직인다.
각인이 거의 끝난 듯했다.
한 놈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만 제외하면, 아직 사고는 없었다.
“왜.”
기회라니.
“……?”
파지지지직!
별안간, 왼팔에서 눈이 멀 정도의 섬광이 피어올랐다.
섬광은 한 줄기 번개가 되어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작은 용의 형상을 만들었다.
용이 포효했다.
[Danger!] [‘한(★★★★)’이 오염되기 시작합니다!]번개가 재차 왼팔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번에 느껴지는 감각은…… 아까와는 다르다.
혈관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왼팔을 타고 올라왔다.
“…….”
파지지지지지직!
왼팔 어깨까지 올라온 번개가 심장으로 향했다.
나는 재빨리 뚜껑을 따 놓은 물약을 복용한 뒤,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왠지.”
“쉽게 물러간다 했어.”
스릉.
나는 오른팔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비프로스트의 대용품에 불과하지만, 오염에 대한 저항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콰직.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검날을 어깨에 박아넣었다.
눈앞이 순간 붉어졌고, 시야가 아찔해졌다.
그래도 이 정도 고통은…….
‘한두 번 겪은 게 아냐.’
나는 오른손을 어깨에서 맴돌고 있는 번개로 가져갔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지만 억지로 눌러 참았다.
뚜둑.
근섬유가 끊어지는 소리.
뒤이어 어깨의 살갗이 벗겨졌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어깨의 번개를 팔에서 뜯어냈다.
파지지지직!
나는 번개를 잡아 뜯었다.
“그래?”
번개 속에서 용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나는 왼팔을 보았다. 찢어진 피부가 급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번개를 뽑았어도 각인은 몸속에 남아 있는 건가.
“구구구…… 구!”
“히힝! 히히히힝!”
동물들이 사납게 날뛰고 있다.
나는 숨을 골랐다.
“큽!”
왼팔에 꽂힌 검날을 뽑았다.
피가 뿜어지기 전, 비늘이 생겨나 상처를 가로막았다.
나는 오른팔에서 불타고 있는 번개를 굳게 잡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날뛰고 있는 비둘기를 발로 짓눌렀다.
그리고 번개를 움켜쥐었다.
“구……?!”
용과 비둘기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뒤.
나는 팔을 부여잡은 채,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왼팔의 상처는 사라졌지만, 불에 덴 듯한 화끈거리는 통증이 맴돌았다.
“……후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대처가 빨랐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다면 되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뭐일 거 같냐?”
나는 짜증이 팍팍 묻어나는 말투로 아래를 보았다.
내 발밑에서 살이 도톰하게 오른 비둘기 한 마리가 홰를 치고 있었다.
비둘기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제 날개와 몸을 차례대로 훑었다.
“몸을 갖고 싶다면서? 원하는 대로 해줬잖아.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화를 내냐?”
“그래.”
“구…… 구웃?!”
비둘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넌 비둘기가 됐다.”
“몸이 생겨서 잘됐네. 참고로 그 비둘기의 이름은 구구콘이야.”
사실, 나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생각 못했는데.
강림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가 눈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지.
수많은 강림과 각인 과정을 지켜봤던 나도 처음 목격한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번째 물약을 꿀꺽 삼킨 뒤, 다시 놈을 보았다.
비둘기는 뚱뚱한 발을 놀리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밑을 바라보기도, 날개를 살펴보기도 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약 5분여 동안 몸 관찰을 마친 비둘기는 이제야 현실을 받아들였는지, 내게 대뜸 호통을 쳤다.
“어떻게 돌려내면 되는데.”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어쩌다 보니 된 거라서. 방법을 알려주면 생각해 볼게.”
한동안 고민하던 비둘기가 날개를 펼쳤다.
“구구구! 구…… 구!”
비둘기의 부리가 크게 열렸다가 닫혔다.
“내 몸을 빼앗고 싶다면서. 너를 되돌리면 난 죽는 거 아냐?”
내가 가만히 있자, 비둘기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쿠쿠쿡…….”
“쿠엑!”
나는 비둘기의 목덜미를 움켜쥔 다음 끌어올렸다.
“닭둘기는 짖는 소리도 요란하군.”
“꾸엑!”
풍덩!
나는 옆에 있는 물통에 비둘기의 머리를 처박았다.
비둘기가 날개를 펄럭이며 바둥거렸으나, 한낮 새 따위가 힘이 있을 리 없지. 나는 더 깊이, 물통 바닥까지 놈을 빠뜨렸다.
“꾸억, 끄헉, 꾸르륵……!”
30초를 센 뒤, 물통에서 꺼냈다.
두 번째 풍덩.
다시 30초를 셌다.
세 번째 풍덩.
이번에는 1분을 셌다.
“끼라라락!”
네 번째가 지나서야 놈이 조용해졌다.
나는 짚더미 위에 엎어져 있는 비둘기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까불지 마라.”
“꾸르…… 꾸르르!”
“시끄러우니까 닥쳐.”
나는 비둘기의 머리를 바닥에 패대기친 다음, 부리를 강제로 열어 볏짚을 쑤셔 넣었다.
쓰러진 비둘기가 날개를 파들거렸다.
“네가 상황을 모르는 거 같은데. 위대한 종족이니 뭐니, 지금 넌 돼지 같은 닭둘기 새끼일 뿐이야. 알겠냐? 꼬우면 그 잘난 용으로 변신해보든가.”
“아직도 모르겠냐?”
나는 히죽 웃은 뒤, 놈의 머리통을 짓밟았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두개골. 살짝만 힘을 줘도 놈의 머리통은 감자칩처럼 박살 날 것이다.
“상관없어. 똥 밟았다 생각하고 새로 각인을 구하면 돼. 지 주제도 모르는 닭 새끼한테 당하는 것보단 낫지.”
나는 발끝에 아주 약간, 힘을 주었다.
“꾸엑!”
비둘기가 격렬하게 팔딱거렸다.
오염까지는 예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단 말이지.
나는 상당히 짜증이 나 있었다. 각인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을 정도로.
하마터면 재수 없는 꼴을 당할 뻔했으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필요 없다니까.”
“꾸에에에에에엑!”
볏짚을 토해낸 비둘기가 좌우로 꿈틀거렸다.
“이제 상황을 알겠냐?”
“늦게라도 알아서 다행이네.”
나는 발에서 힘을 풀었다.
비둘기가 헥헥거리며 모로 쓰러져 있었다.
“좋아, 구구콘.”
나는 발을 움직였다.
“그래.”
이제야 자리가 마련된 것 같다.
나는 볏짚 위에 풀썩 주저앉은 뒤, 궁금했던 것을 하나씩 물어보기 시작했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지어내길래 물통에 1분쯤 박아놨더니, 순순히 사실을 토해냈다.
“흑룡혈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 말이군.”
구구콘은 체념한 듯이 답했다.
과연.
이 녀석이 말한 시험이라는 것은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의미였던 것 같다.
“그래서 넘어가는 척 뒤통수를 쳤다는 거냐.”
“구구…….”
구구콘의 고개가 축 처졌다.
이놈의 설명에 의하면 내게 각인된 흑룡혈은 불완전하다고 한다.
몸을 옮기기 위해 각인에 있어야 할 요소를 뺀 뒤, 특수한 마법을 넣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지?”
“흐음.”
구구콘이 몇 번이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을 다른 차원에 팔아넘긴 거 말이냐.”
뭐, 말투를 보면 이 세계의 진실을 이미 꿰뚫고 있는 것 같다.
귀찮은 설명은 필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넌 무슨 쓸모가 있지?”
“구? 구웃!”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구구콘의 목을 틀어쥐었다.
“네가 나한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해봐.”
“네가 거기서 수천 년을 지냈든, 수만 년을 지냈든 내 알 바 없고. 뒤통수친 새끼를 살려주려면 그에 걸맞은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 여기서 모이나 축내며 살겠다고?”
“구우욱!”
내가 손을 놓자, 구구콘이 부리를 벌렸다.
“그래? 단단해지는 거 말고 뭐가 있는데?”
구구콘은 절뚝거리며 볏짚 위에 서더니, 날개를 양옆으로 펼쳤다.
그와 동시에 놈의 눈이 번뜩이며 용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X나 세다 이거군.
“진정한 힘?”
구구콘이 날개를 펄떡거렸다.
검붉은 번개가 구구콘의 등 뒤에서 튀어나와 용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어서 놈이 날개를 앞에 내밀었다.
지이잉.
마굿간 문에 있던 나뭇가지가 구구콘의 날개로 빨려 들어갔다.
구구콘이 나뭇가지를 내게 내밀었다.
“…….”
“그걸 위해선 네가 필요하고?”
구구콘이 내게 가슴을 내밀었다.
“……흐음.”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단순한 면역이라면 이놈의 방어를 내가 뚫지 못할 리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놈은 수많은 속성을 두른 참격 속에서 한치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힘이 작용한다는 의미였다.
‘엄청난 괴물인 건 맞아.’
나는 본래 형태인 용을 끌어내지도 못했다.
이 녀석은 내가 만나온 강림 몬스터 중에서도 탑 클래스였다.
“야.”
“너랑 비슷한 게 세 마리 더 있지?”
사대 가문이라고 하니까.
“일단 각인이나 돌려놓고 말해. 일부러 빠뜨렸다며.”
구구콘이 내게 앞날개를 내밀었다.
파지직! 검붉은 번개가 내 왼팔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불길한 느낌이 없었다.
[빠라밤!] [각인이 완료되었습니다.] [‘한(★★★★)’의 몸에 특별한 능력이 새겨집니다!] [진 흑룡혈(S, Lv.1)] [고대 흑룡의 순수한 혈통을 증명하는 피.] [효과 : 모든 속성 방어력 + 20%] [고유 스킬 : 1. 흑룡린(黑龍鱗, 지속 시간 1초)] [※그 밖에 알려지지 않은 스킬이 다수 존재합니다.]나는 각인 설명창을 훑어보았다.
추가된 것은 별로 없다. 알려지지 않은 스킬이 있다는 한 줄 설명이 전부였다.
‘S급으로 올랐군.’
지금은 별 차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인의 레벨과 스펙이 오를수록, 점차 숨겨진 능력이 개방되겠지.
그것이 저 녀석이 말한 ‘자격’일 것이다.
나는 왼팔을 돌렸다.
별다른 차이는 없는 것 같지만, 움직임의 끝에 묘한 감각이 딸려 들어왔다.
팔이 셋으로 늘어난 듯한 기분이었다.
꼬리가 생긴다면 이런 느낌일까.
“야.”
“아까, 너랑 비슷한 놈들이 세 마리나 더 있다고 했잖아.”
구구콘은 불쾌한 듯이 혀를 찼다.
이놈이 사대 가문 중 하나의 조상이라면, 나머지 세 가문에도 비슷한 존재가 있을 터.
‘타오니어엔 S급 각인이 최소 3개는 더 있다 이거군.’
이건 상당한 행운이다.
소속 영웅과 마찬가지로, 각인도 계정에 따라 각기 다르다.
다만 S급 각인은커녕 A급도 없는 곳이 부지기수였다.
‘나머지 세 개도 전부 가져온다면…….’
나는 웃었다.
무슨 드래X볼도 아니고.
각인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어떻게 키우고 활용하느냐의 문제지.
‘만약 기회가 생기면, 다른 애들한테나 줘야겠네.’
나 혼자만 스펙이 올라선 의미가 없으니.
“그렇다기엔 괴물들이 하도 많아서 말이야. 하여튼, 네가 있으면 도움이 되는 게 맞겠지?”
“그러냐.”
나는 픽 웃고는 왼팔을 보았다.
검을 오른손에 쥐었다.
‘한번 실험해볼까.’
어떻게 써야 할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스킬을 쓸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그 느낌을 끌어올렸다.
[각인 발동!]촤르륵!
순간, 왼팔 전체에서 비늘이 돋아났다.
검은 비늘이 왼팔 소매를 찢어발기며 길쭉하게 튀어나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팔뚝에 검을 찔러넣었다.
[해당 영웅은 물리 면역입니다!]카앙!
검날을 튕겨냄과 동시에, 비늘은 빠르게 사라졌다.
아직 이 정도겠지. 1초밖에 유지되지 않았다. 발동할 수 있는 텀도 꽤 있는 것 같고.
몸이 지치는 듯도 했다.
꾸준히 연습해야겠네.
실전에서 사용하려면, 익시드나 패검혼과 묶어 쓰는 훈련이 필요했다.
“…….”
풍덩!
나는 구구콘의 목덜미를 움켜쥔 다음, 물통에 꼬라박았다.
“꾸, 꾸르르르!”
“말투가 재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