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k Me Up! RAW novel - Gaiden 76
75. 가질 수 없는 것
* * *
신전 최상층.
나는 테라스로 걸어 나왔다.
귀가 아플 정도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델하이브 도심에 가득찬 용병들이 황녀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양측의 세력은 비슷했지만, 결과는 황녀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원인은 여러 가지 있겠지. 지휘관의 능력과 병사의 사기, 우리 영웅들의 존재까지.
‘어쨌든…….’
60층도 무사히 클리어했다.
교단군의 거점인 성도를 점령한 이상, 남은 곳은 황자가 머물고 있는 제국 수도뿐.
요슈가 말하길 이미 수도의 포위가 끝났으며, 황자군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전쟁의 명분은 황녀에게 있었다. 숲에서 황자가 이세계의 존재를 불러왔던 일이 대륙 곳곳에 퍼져 버렸으니.
“…….”
나는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뚜벅. 작디작은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휘유, 어떻게든 이겼네요.”
제나는 뺨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고는 내게 달려왔다.
치열한 전투를 거쳤는지, 가죽 갑옷이 피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듣기론 내전도 거의 끝났다던데.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요?”
제나가 내 옆의 테이블에 엉덩이를 올렸다.
“100층까지 깨야 돼. 아직 멀었지.”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선방했어요. 저도 엄청 강해졌고, 오빠는 말할 것도 없구요. 이대로만 노력한다면 100층까지 될 거 같아요. 오빠,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제나가 쾌활한 몸짓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어울리지 않게 왜 이래. 나는 피식 웃었다.
“엣헴, 저도 다른 용병들한테 인정 많이 받았다구요. 처음 올 땐 촌구석 꼬마였는데 말이죠. 임무를 끝내고 돌아가면, 영웅 대접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일하긴 귀찮구, 하루종일 놀고 싶네요.”
제나가 중얼거렸다.
연금이나 축내며 살겠다는 건가.
나쁘지 않은 미래였다.
“오빠는 어때요. 농부라고 했으니…… 앗차.”
제나가 자기 이마를 콩 두드렸다.
그러고는 테라스 뒤를 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눈치 없게 또 방해를 했네. 대기실에서 봐요!”
제나는 테라스 바깥으로 뛰어내리더니 아래층 창문을 타고 사라졌다.
“방해는 아닌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느도 죽었고, 성도 점령도 거의 끝났지만 임무 클리어가 되지 않는다.
도시 여기저기에 잔존 병력이 있기 때문이겠지. 돌아가기까지는 당분간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과 약속을 했었나.
나는 뺨을 긁었다. 테라스와 이어진 홀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망설이는 듯한, 서성거리는 듯한 작은 발소리.
“지금, 괜찮은가?”
“괜찮아. 딱히 할 것도 없으니.”
나는 의자에 앉은 채 대답했다.
프리아는 테라스로 천천히 들어오더니 난간에 팔을 짚었다.
이곳과 지상의 높이 차이는 100m 이상. 아래의 용병들이 아득하게 보일 것이다.
“잘됐어. 이제 황제까지 한 걸음 남았네.”
“나는…….”
프리아가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그럴 자격이 없느니라.”
“그런 거에 자격이 어딨냐.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나는 오라버니와 그릇이 달라.”
“네 오빠란 작자가 뭘 했는지 알 텐데.”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이야. 내가 아는 오라버니는 제국과 백성 모두를 위해서 몸을 바칠 수 있는 분이다. 이기적인 나와는 다르다.”
“이기적?”
프리아가 눈을 감았다.
“내게는 배가 다른 남동생이 하나 있다.”
“…….”
“아주 어릴 적에 헤어졌지만 실로 천사 같은 아이였다. 사방이 틀어막힌 황궁에서, 그 아이는 내게 큰 힘이 돼주었어. 그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나쁜 마음을 먹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내가 싸우는 이유는 오라버니처럼 만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단 한 명을 위한 것이야. 그 아이가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느니라. 실로 이기적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프리아는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하지만, 한 가지가 바뀌었다.”
프리아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은백색 드레스에 장식된 은방울이 쩔렁거렸다.
“나는 사치를 부리고 싶다. 그렇기에 황제가 되려는 것이야.”
“사치는 질리도록 할 수 있겠지. 돈이야 차고 넘칠…….”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싶구나.”
프리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비추었다.
“화려한 황궁도, 값비싼 보석도, 예쁜 옷도 필요 없어. 그건 내게 아무 의미도 없느니라. 한, 그대는 내가 정녕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
“그대가 나와 다른 차원에 산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손을 뻗어도 닿을 수가 없는 곳이지. 하지만, 제국의 황제가 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예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줄은.
“그대는 이곳에서의 싸움이 끝나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겠지.”
“…….”
“나는 싫다. 내게는 아직 그대가 필요하다. 모두 앞에서 가면을 쓰는 것도 지쳤어. 마음을 터놓고 지낼 자가 필요하구나. 그런 사람이 없다면…… 나는 언젠가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요슈는…….”
“요슈는 아니야.”
프리아가 칼같이 말을 끊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는 나보다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겠지. 그대에게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느니라. 단지 말해두고 싶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60층을 돌파했다지만 언제 어떤 임무가 나올지 모른다. 또한, 바깥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마스터 시절, 나는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고 방심할 때마다 몇 번이고 쓴 물을 들이켠 적이 있었다.
“소득이 없지만은 않았어. 네 당황스런 얼굴을 처음 보는구나.”
프리아는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그래서 결론은?”
“…….”
프리아가 볼을 부풀렸다.
“종신 계약. 나와 종신 계약을 맺어다오, 한.”
“종신…… 뭐?”
프리아는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옆에 있어 다오. 네가 원한다면, 제국의 황제로서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금화의 산, 보석의 강, 드높은 작위와 영지까지.”
“그, 그건…… 권력 남용인데.”
“사치를 부리겠다고 말했잖느냐. 그래서 어쩌겠느냐? 나와 평생토록 계약을 맺어 보겠느냐? 네가 바란다면 어떤 일이라도 이루어주마. 그것이 나의 각오야. 나의 마음이다.”
나는 입을 벌렸다.
‘이 녀석…….’
자기가 뭔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건가.
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주춤거렸다.
“지금 답하긴…… 좀 곤란한데.”
“싸움이 끝났을 때, 내게 대답을 들려다오. 기다리고 있으마.”
프리아는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널 실망시키지 않도록, 나도 노력할게.”
“…….”
“훗후, 권력이란 좋은 거구나.”
프리아가 싱긋 웃고는 물러섰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테라스를 떠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종신 계약이라고?’
그런 짓을 하면…… 지구로 돌아가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과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타오니어가 되살아난다면 프리아는 그곳에서 황제직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방금 프리아가 내게 했던 제안은, 자신이 집권할 때 힘을 보태달라는 의미였다.
‘하, 거참.’
그제야 나는 세월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코나 훌쩍거리던 꼬맹이가 나한테 저런 말을 할 정도로 컸다니.
[스테이지 클리어!] [‘한(★★★★★)’, ‘제나(★★★★★)’, ‘벨키스트(★★★★★)’, ‘키샤샤(★★★★★)’, ‘카티오(★★★★★)’ 레벨 업!] [‘로데리크(★★★★★)’, ‘베닉(★★★★★)’…….] [보상 – 300,000G, 저주받은 눈동자, 괴수의 심장…….] [MVP – ‘한(★★★★★)’]곧이어 스테이지 클리어 메시지가 떴고, 빛이 나를 휘감기 시작했다.
나는 테라스에서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이 정도로 충격을 먹을 줄이야.
이윽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광장에서는 이번 임무에 참가한 전투직과 그들을 마중 나온 보조직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희생자가 거의 없는 승리. 암케나도 영웅들이 승리를 자축할 수 있도록 각종 요리와 술, 파티용 테이블을 광장에 배치했다.
광장 구석 테이블.
나는 의자에 앉아 술잔을 들이켰다.
머릿속에서 프리아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왜 거절 안 했지?’
나는 머리를 긁었다.
프리아의 제안을 단칼에 끊지 못했다.
마음속에 망설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글쎄, 부러워 죽겠지 뭐예요.”
나는 시선을 돌렸다.
각종 요리가 늘어선 뷔페 테이블 옆, 제나가 닭꼬치를 손에 든 채 종알거리고 있었다.
“아아~ 나도 누구 없나? 젊고 잘생긴 귀족 오빠가 나랑 종신 계약…….”
나는 제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파지지직! 검붉은 번개가 튀더니 제나가 내게 미끄러지듯 끌려왔다.
“으갸악!”
텁.
나는 제나의 양 뺨을 움켜쥐었다.
“듣고 있었냐?”
“아니, 아하하.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요…….”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찌, 찌져져요!”
“함부로 말하지 마.”
“그낭 부허다고 하 거데…….”
“알았어, 몰랐어?”
제나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손을 놓자 제나는 빨갛게 부풀어 오른 뺨을 매만졌다.
“아고, 아파라.”
“이번 일이 퍼져나갔다간 알지? 나랑 백 번 연속 대련이야.”
“……그건 죽어도 싫네요.”
제나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좋아.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
“옛 써!”
제나가 도망친 뒤, 나는 다시 술잔을 들이켰다.
왼손으로는 테이블 위의 책장을 넘겼다.
[역천의 서]그림책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엘 시드와 이국의 공주 렐테아가 맺어지는 파트였다. 뭐, 여기에 있는 녀석들은 역천의 서가 뭔지도 모를 테니, 대놓고 봐도 상관없다. 겉보기에는 두꺼운 책일 뿐이고.
‘이 녀석도 60층 부근이었군.’
나와 흐름이 비슷했다.
난관을 뛰어넘은 뒤, 도라도의 모든 세력이 하나로 합쳐지는 부분.
‘하지만 왜…….’
그런 결말이 났지?
입에서 피를 토하는 엘 시드의 모습이 떠올랐다.
“…….”
엘 시드가 내 앞에서 죽은 이유.
그것은 경고하기 위함이었나.
‘난이도가 급격히 어려워진다?’
아니.
엘 시드는 결국 모든 임무를 클리어했다.
임무가 어려워도, 충분히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현재 타오니어의 상황도 마찬가지.
수도를 제외한 타오니어의 모든 지역이 황녀군의 깃발 아래에 들어왔다. 내전은 마무리만 남겨뒀을 뿐, 실질적으로 끝났다고 해도 되겠지. 또한 프리아는 차원검 루스라다를 각성했으며, 파편 시리즈와도 싸울 만한 수단을 손에 넣었다.
‘문제는…….’
도라도와 타오니어.
세세한 사정은 다르지만 큰 줄기는 비슷했다.
‘모르겠군.’
나는 술잔을 벌컥 들이마셨다.
술이라고 해도 도수가 거의 없어 음료수에 가까웠다.
오늘도 할기온과의 대련이 예정되어 있기에, 적당히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취한 채로 훈련에 임할 수는 없으니.
엘 시드에 대한 부분은 유르넷이 잘 처리해줄 것이다.
조사도 거의 마무리 부분이라고 들었다. 엘 시드에 대한 얼마 남지 않은 의문도 곧 밝혀질 것이다.
나는 빈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귀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때마침 연락하려고 했는데.
“유르넷이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그런데?”
잠시 뜸을 들이던 유르넷이 말했다.
유르넷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딱히 그러진 않을 것…….”
삑.
일방적으로 통신이 끊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