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123
-123-
낯 뜨거운 속삭임에 귓불이 화끈거렸다. 레아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가, 가르쳐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는 당연히 레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언제 ‘그 행위’를 했으며, 임신은 또 어찌 했단 말인가.
커다란 혼돈 속에서 그간 이상했던 몸 상태가 와르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월경이 한참 없었다.
하면 음식을 못 먹었던 건 입덧이고, 배 속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은 태동이었다는……?
레아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샤칸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거짓말이라 말해주면 좋겠는데, 전혀 그럴 기미가 없었다. 지긋하게 레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레아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일단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당혹스러웠다.
물음표로 가득한 머리가 어지러웠다.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남자를 앞에 두고, 레아는 차근차근 생각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이샤칸은 도통 도와주질 않았다. 그는 기겁할 말들로 레아의 생각을 방해했다.
“네가 나한테 임신시켜달라고 했잖아.”
“……?”
겨우 진정되어가던 심장이 다시 덜컥거렸다. 이샤칸은 레아가 물러난 만큼 따라붙었다.
“안에 싸달라고, 내 아이가 갖고 싶다고 그렇게 부탁했잖아.”
뒷걸음치다 등에 벽이 닿았다. 이샤칸이 손을 벽에 짚었다. 몸이 느슨하게 기울며 가까워졌다.
“그래서 내가 위아래로 가득 넣어줬는데…….”
레아를 가둬두듯 선 채로 그가 말했다.
“다 잊었지, 레아.”
이샤칸은 그리 말하곤 입술을 다물었다. 달빛을 등지고 내려다보는 눈빛이 노골적이었다.
“…….”
분위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이샤칸의 눈매에 걸려있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 위로 약간의 조급함이 어렸다. 충동을 억누르는 듯한 눈이었다.
느릿하게 달아오르는 금색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입 안이 버석하게 말라왔다. 레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언젠가 함께 살을 붙이고 침대에 누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이샤칸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마치 레아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가장 기분 좋은 곳만을 만져주었다.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던 손가락의 감촉과 움직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집요하게 괴롭히며 만져대는 손길은 레아가 울어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문득 어떤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둑한 방 안, 기다란 베일을 쓰고서 누군가의 위에 올라앉아 흐느끼는 모습이었다.
-당신 아이 가질래. 안에 해줘…….
레아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아주 짧은 회상이었으나, 레아를 끝없는 미궁에 빠트리기엔 충분했다.
내가 정말 저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민망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직접 말하기까지 했다니. 어쩌면 주술이 없던 기억을 만들어서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이 아닐까 의심되었다.
벌집을 들쑤신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무 혼란스러워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굳어있던 때였다. 이샤칸이 갑자기 시선을 돌렸다.
“…….”
그가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레아는 그를 따라 창밖을 보았다. 어두운 정원으로 마차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늬 없는 마차는 조용히 백작저 앞에 멈춰 섰다. 마부가 급하게 내려 작은 계단을 펼치고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서 길게 뻗어져 나온 다리가 계단을 밟았다. 늘씬한 체구의 남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은색 머리카락이 우아하게 빛났다.
경멸스러운 눈으로 웨들턴 백작저를 응시하는 남자는 블레언이었다.
* * *
웨들턴 백작저의 연회장은 수많은 집시들로 가득 차있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고, 벽에 기대어 서있는 그들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수십의 사람이 모여 있으나 회장은 고요했다. 침묵의 틈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신 눈물을 닦아내던 젊은 여자가 외쳤다.
“그녀가 내 자매의 심장을 먹어치웠어!”
여자는 핏발 선 눈으로 가슴을 쥐어뜯었다.
“도와준 은혜를 이따위로 갚다니……!”
집시들은 그녀의 비명을 들으며 침묵했다. 나서서 편들거나 위로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만류하는 이 또한 없었다.
세르디나는 대륙의 집시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롬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야망에 반하여 모두가 에스티아로 모여들었다. 본래 자유로이 곳곳을 떠도는 집시들이 한곳에 모여든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집시들은 세르디나를 도와 주술을 완성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쌓아올린 주술을 완성함으로써, 거대한 힘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제 대륙을 롬의 세상으로 만드는 일도 머지않았다고, 다 같이 꿈에 부풀어있었는데…….
학살이 벌어졌다. 쿠르칸이 왕궁에서 머물던 집시들을 살육한 것이다. 그러나 세르디나는 자매형제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오히려 동족의 시체에서 심장을 파먹고, 더 큰 힘을 추구했을 뿐이었다.
가만히 구석에 앉아있던 늙은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힘에 미쳐버린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장미가 담긴 꽃바구니를 끌어안은 여인은 회장 안의 집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리 첫 번째 힘을 이은 주술사라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기에 한계가 존재하는 법이니…….”
그때 연회장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요란한 소음에 집시들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남자는 에스티아의 왕이었다. 웨들턴 백작이 허겁지겁 뒤를 따라 들어왔다.
블레언은 차가운 눈으로 집시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연회장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에 스치는 갈대처럼 낮은 속삭임들이 귀를 간질였다.
“세르디나의 아들이야.”
“가짜 왕족.”
“거짓으로 만들어진 왕.”
“하지만 이제는 진실로 고귀한 피가 되었지.”
“롬의 세상을 만들어줄 존재야.”
속삭임을 들으며 블레언은 입매 한쪽을 비뚜름히 끌어올렸다. 집시들이 숨죽이는 사이, 울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번뜩 쳐들어 외쳤다.
“세르디나! 세르디나는 어디에 있지! 그녀가 직접 찾아왔어야지!”
대비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는 것에 블레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무식하고 천박한 집시임을 감안하여 자비롭게 설명해주었다.
“병환 중이시기에 내가 대신 온 것이다. 에스티아의 왕이라면 차고 넘치지 않느냐.”
“닥쳐!!”
여자는 블레언에게 달려들었다. 뒤편에 서있던 웨들턴 백작이 놀라서 달려 나왔으나, 그 전에 블레언이 여자를 발로 걷어찼다. 뒤로 나동그라지는 여자를 내버려두고, 블레언은 거만하게 말했다.
“일전의 사건에 대해서는 대비께서 확실하게 되갚아주실 테니, 다들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줬으면 좋겠군.”
그가 양팔을 펼치며 선언했다.
“결혼식이 지나면 롬의 세상이 올 것이다. 수백 년을 기다렸으면서 어찌 며칠은 참지 못하는 건가. 모두 때를 기다려라.”
염원했던 꿈을 이뤄줄 존재의 선언에 집시들은 침묵했다. 고요한 집시들을 보며 피식 웃은 블레언이 고개를 까닥였다.
“주술을 할 줄 아는 자가 있나?”
늙은 여인이 장미 꽃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른 몇몇 집시들도 걸어 나왔다. 블레언은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숫자를 헤아렸다.
“마차를 보내겠다. 내일 아침 왕궁에 입궁하도록.”
용건을 끝낸 블레언은 곧장 뒤돌아섰다. 발길질 당했던 젊은 여자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블레언의 등에 저주를 퍼부었다.
“괴물이 괴물을 낳았구나!”
한 맺힌 외침이 쨍하게 울려 퍼졌다.
“네놈도 편히 죽지는 못하리라! 내 자매와 똑같이 짐승의 발톱에 갈가리 찢겨 죽으리라!”
그녀의 절규에 블레언은 웃었다. 그리고 시선조차 주지 않고 연회장을 벗어났다. 웨들턴 백작이 쩔쩔매며 뒤따랐다.
“송구합니다, 전하. 워낙 못 배운 것들이다 보니…….”
“알고 있네. 백작이 내게 변명할 필요는 없지.”
블레언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급히 저를 따라 멈추는 웨들턴 백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술 한잔하겠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면서도, 백작은 군말 없이 응접실로 블레언을 모셨다. 가장 좋은 술을 내어온 웨들턴 백작은 블레언에게 손수 술을 따라주었다. 블레언은 소파에 앉아 잔을 기울이다 말고 쓰게 웃었다.
웨들턴 백작과는 이따금 사냥을 함께 나가거나 했지만, 결코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함께 술잔을 기울일 상대가 외조부뿐이라니 우스운 꼴이었다. 허나 귀족들은 전부 인형이 되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블레언은 빠르게 잔을 비워나갔다. 취기와 함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선명해졌다.
-대답하지 않으면 또 때리실 건가요.
-아니면 내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협박하실 건가요.
악에 받친 목소리와 눈빛은 블레언에게 저주를 퍼붓던 집시 여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어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되돌리고 싶어 뒤를 보았지만, 지나온 길은 무너져 없어진 지 오래였다. 어떤 결말을 맞이하건 간에,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잿더미로 스러진 복숭아 과수원과 함께 블레언의 마음도 결론을 내렸다. 레아를 온전히 가지는 일을 포기했다.
설혹 결혼식 때 주술이 실패하여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이번에는 그냥 인형으로 만들어버릴 것이었다.
“……하온데 전하.”
웨들턴 백작이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갑자기 집시들은 왜 왕궁으로 데려가십니까?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벌레처럼 기어 들어갈 놈들이지 않습니까.”
그의 질문에 블레언은 짧게 웃었다.
“집시들의 심장을 파낼 것이네.”
웨들턴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외조부를 앞에 두고, 블레언은 대수롭잖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힘이 부족하여 당한 것이니, 아들 된 도리를 다해야 하지 않겠나.”
그가 술잔을 쭉 들이켜고서 중얼거렸다.
“더 쳐먹이면 강해지겠지. 짐승놈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어느새 술병이 비었다. 블레언이 빈 술병을 흔들어보이자, 넋이 나가있던 웨들턴 백작이 자리에서 허둥지둥 일어났다.
“새, 새로운 술을…….”
저장고에 괜찮은 술이 있다며 직접 다녀오겠다는 말에 블레언은 그를 따라 일어섰다.
“함께 가지. 잠시 걷고 싶으니.”
두 사람은 곧 응접실 밖으로 사라졌다. 인기척이 사라진 곳에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응접실은 새로운 손님을 맞이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이는 여태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레아와 이샤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