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일이 커졌다
릴리 가출 첫날.
저녁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온 대인은 곧장 릴리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를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인은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너 저녁도 안 먹으러 오고 뭐하는···.”
대인은 말을 멈췄다.
옷장과 책상이 다 열려있고, 침대 위에 옷가지가 어지럽혀져 있는 방.
릴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야?”
방 안을 둘러보는 대인의 눈에, 릴리가 책상 위에 남겨 두고 간 편지가 보였다.
– 나 찾지 마! –
편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그렇게 쓰여 있었고, 그 옆에는 대인의 것과 한 쌍인 가 놓여 있었다.
위치를 추적하지 못하게 팔찌를 빼놓고 가출한 것이다.
명백한 가출선언.
그러나 대인은 코웃음을 쳤다.
“지가 가봤자 어딜 간다고.”
시계를 보니 저녁 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분명 12시도 안 돼서 돌아올 거다. 대인은 그걸로 내기라도 할 수 있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걸 알아야지.”
대인은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TV도 보고, 스마트폰도 하고, 보려고 잔뜩 사둔 소설과 만화책도 꺼내서 뒤적거렸다.
10시 10분.
대인은 힐끔 문을 쳐다봤다가, 곧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꼬맹이 주제에 오래 버티네.”
10시 50분.
대인은 읽고 있던 만화책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더럽게 재미없네. 치킨이나 한 마리 시켜야지.”
11시 45분.
힐끔힐끔. 자꾸만 문으로 가는 시선을 멈출 수가 없었다. 대인은 신경질적으로 닭다리를 뜯었다.
“이게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안 들어와?”
12시 30분.
대인은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그의 모든 신경은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확신했다.
‘꼬맹이 녀석.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몰래 들어오려는 속셈이겠지. 혼날 것 같으니까 잔머리 굴리기는.’
아마 지금쯤, 꼬맹이는 건물 밖에서 창문의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이 꺼지면 까치발을 들고 살금살금 들어오려고 말이다.
괘씸하지만 한번은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혼내는 건 내일 해야지.’
특별히 남은 치킨은 꼬맹이 방에 넣어 뒀다.
-그리고 새벽 3시 5분.
대인은 이불을 걷어차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망할 꼬맹이가!”
대인은 옷장에서 대충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잡히기만 해봐라. 앞으로 한 달 동안 치킨 금지다.”
그러나 아침까지도 대인은 릴리를 찾지 못했다.
***
릴리 가출 둘째 날.
대인은 아침부터 릴리가 갈만한 장소를 하나씩 찾아다녔다.
“릴리요? 어제는 안 왔는데.”
시장에서 18년째 을 운영하는 사장님은, 단골손님을 찾는 대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대인은 마약통닭 사장님에게 명함과 치킨 값을 선불로 주며 말했다.
“오늘이라도 오면 저한테 연락 좀 주세요. 치킨도 한 마리 튀겨 주시고요.”
사장님이 걱정 되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지난 몇 달 동안, 릴리는 시장 상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주는 대로 잘 먹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게다가 얼마나 많이 사먹는지-,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더 주고 싶을 정도였다.
세달 동안 릴리가 가이아 대륙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을 땐, 시장상인들이 화이트하우스에 전화로 문의를 했을 정도였다.
“아뇨. 별일 아니에요.”
대인은 대충 얼버무리며 치킨 집을 나섰다. 다음 행선지는 그 옆에 있는 빵집이었다.
그러나 시장을 다 돌았지만 대답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릴리요? 못 봤는데요.”
“어젠 안 왔는데···.”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겨우 작은 단서를 찾은 건, 시장에서 벗어나 시내에 있는 햄버거가게에 들렀을 때였다.
“아, 어제 저녁에 왔었어요.”
역시나 뻔질나게 드나들며 릴리와-그리고 대인과도-얼굴을 익힌 햄버거가게 직원이 말했다.
“어제 와서 몬스터버거 E세트 시켜서 먹고 가더라고요. 근데 좀 이상했어요.”
“이상하다고요. 뭐가요?”
직원은 정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는 세트를 3개씩 시켰는데, 어제는 2개만 시키더라고요. 게다가 2개째도 다 못 먹고 남긴 거 있죠? 릴리가 음식을 남기는 건 처음 봐서···.”
‘혹시 어디 아픈가요?’ 라고 묻는 직원에게, 대인은 릴리가 햄버거를 다 먹고 어디로 갔는지 봤냐고 물었다.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가서 오른쪽으로 간 건 봤어요. 애가 워낙 기가 죽어 있어서···.”
“고맙습니다.”
햄버거 가게를 나선 대인은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쪽에 있는 음식점은 모조리 둘러볼 생각이었다.
“···잡히기만 해봐.”
*
둘째 날 저녁.
전부 허탕만 치고 길드로 돌아온 대인은 허탈함에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도시에서 적발적안의 꼬맹이가 사람들 눈을 피해 다니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하루아침에 증발한 것처럼, 햄버거 가게에서 목격된 걸 마지막으로 릴리는 아무 흔적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졌다.
대인이 과거 무림에서 배운 추종술도 전부 소용이 없었다.
‘설마 통제구역 밖으로 나갔나?’
아무리 화가 나도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미 치킨과 피자에 길들여진 녀석이, 밖에 나가서 몬스터를 구워 먹기는 힘들 테니까.
“응?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
아브락사스였다. 오늘도 청와대에서 통역사 일을 하고 길드로 돌아온 그녀는, 대인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진짜 무슨 일 있는 거야?”
“···혹시 꼬맹이 봤어?”
“릴리? 봤지. 어제···.”
아브락사스는 대답하다 말고 깜짝 놀랐다.
어느새 대인이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언제 봤는데?”
“···내 방에서. 어제 저녁에. 돈 좀 달라고 해서···.”
“돈을 줬다고?”
끝이 날카롭게 올라가는 대인의 목소리에, 아브락사스는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머리를 긁적였다.
“돈 말고도 이것저것···. 릴리랑 관련 된 일이야?”
대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자세히 말해봐.”
**
어제 저녁.
통역사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아브락사스는 방에서 편하게 쉬고 있었다.
그때 창문으로 누가 노크를 하는 것이 느껴졌다.
똑똑똑-!
창문을 열자, 군밤장수 모자를 눌러쓰고 두꺼운 옷으로 무장한 릴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
릴리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아스. 나 돈 좀 줄 수 있어?”
“돈? 돈은 뭐하려고.”
“묻지 말아줘. 심각한 일이야.”
복어처럼 볼을 잔뜩 부풀린 모습에, 아브락사스는 조카에게 용돈 주듯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있잖아···. 부탁 좀 해도 돼?”
릴리의 부탁은 좀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재밌을 것 같았기에 아브락사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대인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돈을 주고, 머리도 염색해주고 변장까지 시켜줬다고?”
“간단한 마법이랑 아티팩트 몇 개 준 게 전부야. 아, 투명망토는 주지 말걸 그랬나.”
는 말 그대로 몸을 투명하게 변화시키는 아티팩트였다. 등급이 여러 개로 나뉘는데, 상등급의 투명망토는 후각과 청각도 속일 수 있었다.
“네가 빌려준 건 당연히 최상급이겠지?”
아브락사스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하지. 내 레어에서 가져온 건데. 마음 먹고 숨으면 절대 못 찾아.”
대인은 손으로 얼굴을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아브락사스가 대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설마 릴리가 가출할 생각으로 그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어. 그런 말은 전혀 안 했으니까.”
“작정하고 나갔구만. 조용히 찾기는 틀렸어.”
“어떻게 할 거야?”
대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일단 길드에 알려야지. 더 이상은 장난이 아냐. 상황이 더 커지기 전에 찾아야 돼.”
대인은 릴리가 다칠 거라는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다. 지금 서울에서, 릴리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초인은 열 명도 안 된다.
그가 걱정하는 건 오히려 그 반대였다.
거의 잊고 지내지만, 릴리는 서울을 절반이나 불태운 재앙이었다.
그리고 아직 어린애다. 재앙의 불씨는 꺼진 게 아니다. 여전히 어느 방향으로도 번질 수 있었다.
‘돈이 있다니까 밥 굶은 일은 없겠지만···. 잠은 어디서 자는 거야? 괜한 시비에 휘말릴 수도 있고, 그러다 이상한 놈들이 꼬일 수도 있는데.’
차라리 몬스터가 상대였다면 걱정도 안한다.
하지만 교활한 속내를 가진 인간은 위험하다. 그들은 순진한 어린애 하나쯤은 쉽게 꼬드길 수 있으니까.
대인은 길드에 릴리의 가출 사실을 알렸다.
예상대로 난리가 났다.
“뭣? 릴리가 가출했다고!”
당장 백창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나!! 경찰에 신고는?”
대인은 고개를 저었다.
“경찰에는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 다른 길드들도 알게 될 테니까요.”
“그게 무슨 상관···.”
백창수는 말하다 말고 침묵했다. 대인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눈치 챈 것이다.
“···오래 숨길 수는 없을 거네.”
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우릴 주시하고 있을 테니 조만간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늦추는 게 좋겠죠.”
백창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풀어서 릴리를 찾아보지. 다른 길드에서 눈치 채기 전에 찾을 수 있을 게야. 너무 걱정하지 말게.”
우선 길드에 조치를 취한 대인은,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째 울렸을 때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예.
묵직한 목소리의 주인은 최성민.
붉은 안개 때 도움을 준 이후로, 대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길드의 대표였다.
길드 규모는 작아도, 최성민은 수완이 좋고 야망도 있는 사내였다.
대인은 그 능력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최 대표님. 조용히 사람 좀 찾아주실 수 있습니까? 다음에 제가 저녁 한번 제대로 사겠습니다.”
물론 그 저녁이 단순히 식사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대인은 길드에 투자하고 있었다.
-맡겨 주십시오.
전화를 끊은 대인은 곧바로 길드를 나섰다.
아브락사스가 그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어디 가려고?”
“할 수 있는 건 다 하려고.”
*
릴리의 실종 소식을 전해들은 눈눈이들이 짧은 팔을 맹렬히 휘두르며 각오를 다졌다.
[대인! 걱정하지 마랏!] [릴리는 우리 친구닷!] [우리가 친구를 찾는닷!]대장 노릇을 하는 통통한 눈눈이를 필두로, 모든 눈눈이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
릴리 실종 소식을 전해들은 로로우 인들이 대인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소형 루벨론을 출격시키면 됩니다!”
“탐지능력을 지닌 을 가진 친구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 키리가 선언했다.
“릴리를 찾을 때까지 공사는 중지합니다! 모두 릴리를 찾아주세요!”
““예!””
일사분란하게 흩어지는 로로우인들.
지구인 인기투표 1위가 꼬맹이였다는 걸, 대인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
밤을 꼬박 샌 장영신이,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대인을 바라봤다.
“···저걸로 찾을 거예요.”
장영신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주먹막한 크기의 미니 드론이 백 대나 있었다.
전부 릴리를 찾기 위해 제작된 수색용 드론들.
잠시 후, 백 대의 드론이 일제히 하늘로 떠올랐다.
위이이이이잉!
특성의 마력이 깃들어 하나하나가 벌새처럼 빨랐다.
*
-릴리 가출 5일 째-
많은 초인길드의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화이트하우스에서 릴리가 실종됐다고 합니다.”
“릴리?”
“그 7팀에서 불꽃을 다루는 그 여자애 말입니다.”
“이제 누군지 알겠네. 그래서 요즘 그렇게 도시를 들쑤시고 다니는 거였나?”
“도시는 물론이고 싹 통제구역 바깥까지 뒤지고 있더라고요.”
“아직 못 찾은 걸 보면 죽은 거 아닐까?”
“그럼 이렇게 도시를 들쑤시고 다닐 리가 없죠. 보통 애도 아니고 초인인데···.”
“그래서 실종이 아니라 가출이라는 말도 있던데요?”
여기까지는 누구나 평범한 가십거리로 하는 이야기였다.
최근 가장 잘나가는 동종업계의 동향은 누구나 신경 쓰는 분야니까.
하지만 남들보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들, 그리고 동종업계 최고를 노리는 경쟁자들의 생각은 조금 더 나아갔다.
“그 꼬마 외국인이지? 부모는 없고, 당연히 법적인 보호자도 없겠군.”
“소문으로는 임대인 팀장의 동생이라고 하던데···.”
“헛소리지. 임대인의 부모는 둘 다 한국인이야. 그 정도는 조금만 알아봐도 알 수 있어.”
“사촌일 리도 없으니 완전히 남남이네.”
“임대인은 그냥 그 꼬마를 주웠을 뿐이야. 길에서 로또를 주운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사무실에서, 회의실에서, 차 안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과 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임대인이 릴리의 보호자였을 순 있지.”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라는 법은 없잖아?”
“임자 없는 로또를 안 찾는 건 바보지.”
초인길드 뿐만이 아니었다. 눈치 빠른 기업가, 범죄조직도 흥미를 가졌다.
거의 같은 시기에 생각을 정리한 그들은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꼬마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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