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ad Demon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우리는 상남자라서
내 예의 부족한 말에 허겸 장로가 대꾸했다.
“……확실히 젊은 시절에는 이 늙은이가 상남자였습니다. 그것이 벌써 반백 년이 넘었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장께서 내게 뭘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혈야궁이 마도 세력으로 남겠다면 도울 수가 없소.”
허겸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렸다시피 혈야궁은 약자를 괴롭히거나, 죽이거나, 고혈을 쥐어짜지 않는 세력으로 변하겠습니다. 그런 세력으로 변한다면 문주께서 도와주시지요. 제 남은 생은 이를 위한 잔소리를 하다가 끝마칠 생각입니다. 다행히 궁주께서도 이 늙은이의 말을 잘 들어주시는 편이니 헛된 일은 아닐 겁니다.”
나는 본래 헛소리를 많이 사내지만, 막상 약조 같은 것을 하려니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 노인장의 뜨거운 시선은 어찌 된 노릇인지 쉽게 피할 수가 없었다.
“노인장, 그렇게 합시다.”
“문주께서 약조하시겠습니까?”
나는 노인장의 눈을 바라보면서 약조했다.
“훌륭하게 늙은 상남자와 젊은 상남자의 약조로 하겠소. 혈야궁은 마도를 벗어나고, 하오문은 그런 혈야궁을 돕는다.”
말 몇 마디에 혈야궁을 돕게 생겼다.
이게 맞는 건가 싶다가도 서서히 번지는 노인장의 웃음을 보고 있으려니 외통수에 걸린 기분이 들었다.
허겸 장로는 그저 나이만 많이 먹은 노인장이 아니다.
“혈야궁이 강호의 어떤 단체와 싸우든 간에 별 관심 없소. 다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을 핍박하지 않겠다면 하오문이 도와주겠소.”
허겸 장로가 대꾸했다.
“그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자리의 주도권은 오롯하게 늙은 허 장로가 쥐고 있었다.
갑자기 허겸 장로가 손가락을 튕기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청년이 다가왔다.
“용명아.”
“예.”
다들 허 장로를 주시했다.
“내가 뭘 시킬 것인지 예상하느냐?”
용명이라는 청년이 대꾸했다.
“알 것 같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세 번째 책장, 여섯 번째 줄, 열세 번째 서책이다. 가져와라.”
“예.”
설명을 들은 용명이 빠른 걸음으로 대청을 나서자, 허겸 장로가 나를 바라봤다.
“문주님.”
“예.”
“극양의 무공과 극음의 무공을 조합하는 무학은 천하에 많지 않습니다. 이를 연구한 강호인도 적은 편이지요. 저는 비록 내공을 잃었으나 무학에 대한 공부와 조사는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 양 극점의 기를 조합하는 것에 대해 나름 정리한 서책이 있습니다.”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노인장을 바라봤다.
“음.”
“중요한 건 참고만 하시라는 점입니다. 무학은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 하면서 정의하는 단정적인 학문이 아닙니다. 각자의 신체 조건과 환경, 내공의 유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해하십니까?”
“예.”
“조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오른손에 물, 왼손에 물을 쥐고 합치면 어떻게 될까요.”
“그저 흘러내리겠지요.”
“양손에 각기 눈덩이를 쥐고 합치면 어떻습니까?”
“눈덩이가 커지겠지요.”
“한 손에는 돌, 반대 손에는 눈덩이가 되면 어떻겠습니다.”
“위력이 커집니다.”
“그러한 간단한 원리를 기(氣)의 발현과 조화의 측면에서 정리한 책입니다. 기를 어떤 질감으로 발현하여 다룰 것인지. 실제로 어떻게 조합해야 위력이라는 게 발생할 것인지. 체내에서 다룰 때와 체외에서 다룰 때를 구분했습니다. 제 경험, 싸움, 이 늙은 몸으로 직접 두들겨 맞아가면서 알아낸 것이 두서없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을 누군가에게 직접 전달하게 될 줄은 몰라서 서책의 제목은 임시로 적어 넣었습니다. 그저 음과 양에 대한 고찰(考察)입니다.”
순식간에 허겸이 무학의 이론을 소나기처럼 퍼부었으나 사실 나는 한마디도 빠트리지 않은 채로 다 이해했다.
실제 내 고민과 정확하게 부합되는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허 장로가 설명을 덧붙였다.
“도가에서 말하는 태극의 원리도 그렇습니다. 음과 양이 만났을 때 가장 효율적인 순간을 태극이라 본 것이지요. 어떤 식으로든 두 개의 힘이 맞물리는 순간, 폭발하는 찰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를 상대하기 위해 마도에서는 역태극을 오래 연구했는데 결국 최상 지점에 닿으려 노력하다 보면 같은 것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등봉조극(登峰造極)이든 탈마(脫魔)든, 완성으로 향하는 길목 근처에 붙은 푯말일 뿐입니다.”
허 장로의 말은 나뿐만이 아니라 무공을 수련하는 검마, 색마, 궁주, 교영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준 것처럼 보였다.
오래지 않아 용명이 돌아와서 허 장로에게 서책을 내밀자, 그것을 받아든 허 장로가 아무런 조건이나 감정도 내비치지 않은 채로 내게 내밀었다.
“문주께서 살펴서 참고하십시오.”
나는 혈야궁을 도와준다고 했기 때문에 서책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잘 보겠소.”
“용명아, 우리는 이제 물러나자꾸나.”
허 장로가 용명을 바라보자, 용명이 허 장로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허 장로가 좌중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럼 이야기마저 나누십시오. 그리고 사류곡을 칠 때 여기에 있는 용명이도 데려가면 도움이 될 겁니다. 적어도 민폐 끼치는 일은 없도록 가르쳐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용명이라는 청년을 바라봤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면 허 장로가 그간의 무학을 집대성해서 가르치고 있는 젊은 제자라는 소리였다.
혈야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허 장로에게 말했다.
“장로님, 살펴 가십시오.”
허 장로가 사람들과 편안하게 눈을 마주쳤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래 살려면 일찍 자야 합니다. 먼저 가겠습니다.”
평범한 말이 이제는 평범하게 들리지 않아서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히 쉬십시오. 장로님.”
“총사 어르신, 또 뵙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나는 노인장과 용명을 잠시 불러세웠다.
“잠시만.”
나는 노인장이 전달한 서책을 탁자에 올려둔 다음에 말했다.
“노인장, 머무시는 곳까지 내가 부축하리다.”
노인장을 부축하고 있는 용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와 허 장로를 바라봤다. 허겸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용명이 옆으로 물러났다.
나는 허 장로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늙은 상남자와 젊은 상남자가 길을 갈 것이니 다들 방해하지 마시오.”
나는 허겸의 옆에 달라붙어서 앙상한 그의 몸을 부축했다. 몸이 너무 가벼워서 손가락으로 들 수도 있을 것 같은 무게였다.
허겸이 부축하고 있는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문주, 갑시다.”
나는 늙은 상남자와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짧지만 긴 여정이 될 것 같았기에 슬금슬금 입술에 침을 발랐다.
“노인장.”
“말씀하시지요.”
“돌아가신 우리 조부님보다도 반백 년은 더 선배시오. 내 조부께서는 객잔에서 오래 고생하셨는데, 노인장은 마도에서 살아남았으니 정말 대단한 여정에서 살아남으셨겠소. 그간, 미친놈들도 많이 보셨을 테고.”
허 장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를 말입니까. 교 내부에도 분쟁이 많아 온갖 마귀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우리는 그제야 대청에 도착해서 바깥을 바라봤다. 깨끗하게 펼쳐진 내원 길이 실로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노인장을 내 등에 업은 채로 이동하면 순식간에 지나치겠지만, 우리는 상남자들이라서 계속 걸었다.
“하늘에 계신 조부님이 근래 나를 보면 아주 놀랄 것이요.”
“어째서요.”
“국수도 제대로 못 만들고 걸레질이나 하던 녀석이 지금은 강호인들을 때려죽이면서 돌아다니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시겠소. 아마, 그대로 객잔을 이어받아 하루하루 일을 해도 걱정하셨을 것이고. 이처럼 강호에 돌아다니는 것을 보아도 걱정이 많으실 게요.”
“강호에 오신 것을 후회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금이 좋소.”
“이 늙은이도 그렇습니다. 내세(來世)라는 게 있어 그곳에도 강호가 있다면 저는 주저 없이 강호에서 살아갈 겁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요.”
노인장과 길을 걷는 와중에 눈앞에 이름 모를 꽃잎이 흩날리고 있어서 우리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흩날리는 꽃잎이 지나가고 나서야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상을 이해하고 저를 포함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것만 반백 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다그치고 비난하고 꾸짖을수록 삐뚤어지는 자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선 안 됐는데 말입니다. 어떤 시기에는 죽이고 죽여도 끝이 없다는 사실에 실의에 빠져 지내기도 했지요.”
“나도 어리석은 상남자라서 노인장을 일찍 만났다면 많이 혼났겠소.”
“문주께서는 언제부터 그렇게 삐뚤어지셨습니까.”
나는 실실 웃으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글쎄요.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술에 취한 놈들의 헛소리를 너무 자주 들었던 모양이지 젊은 내게도 너무 오래된 일이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삐뚤어졌을 거요. 나중에 크면 저 병신 같은 취객 놈들부터 두들겨 패야겠다고 생각했으니……. 노인장은 어땠습니까.”
“저는 평생을 수련과 싸움으로 보냈습니다.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지요. 어느 날 저를 지탱하던 무공을 모조리 잃고 나서야 세상이 달리 보였습니다. 무공이 전부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전부를 잃고 나서야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본성이 아둔하여 너무 늦게 알아차린 셈입니다. 다행히 제 공로가 많다고 생각했는지 절 죽이려는 자들은 교에 없었습니다.”
“그랬을 거요. 아무리 마귀들이라도 상남자는 존중해줘야 하는 법.”
“그런 제가 어느 날, 교주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을 때는 이미 무공을 잃은 후였습니다. 제가 무공을 잃었다는 사실을 잠시 깜박했을 정도로 늙었던 것이지요.”
나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노인장의 전성기 시절에 교주와 붙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소.”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곳을 부정하고, 달리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옳은 말씀이오.”
노인장의 시선을 따라 도착한 곳은 화려한 별채가 아니라 수련할 공간을 앞마당에 배치해 둔 단정한 목옥(木屋)이었다. 나는 은퇴한 옛 마도 고수의 검소한 거처를 천천히 둘러봤다.
노인장이 말했다.
“평상에 좀 앉겠습니다.”
나는 노인장을 평상으로 안내해서 함께 걸터앉았다.
이렇게 앉아서 바라보니 궁주가 머무는 본청과 내원의 풍경도 눈에 잘 들어오는 거처였다.
“문주, 성취가 빠르나 방심하지 마십시오.”
“그러겠소.”
“제자인 용명에겐 이런 것을 가르쳤습니다. 참고하세요.”
“경청하리다.”
“너보다 그릇이 큰 사람을 만나면 주인으로 섬겨라. 너보다 그릇이 작은 사람을 만나면 미련 없이 떠나라. 단, 정말 네가 용납하지 못하는 뛰어난 인간을 발견하게 되면 충성을 다해 달라붙어서 먼저 친구가 되어라. 마음을 깊이 나눈 벗이 어느 날 갑자기 찌르는 칼은 그 어떤 고수도 막기 어렵다. 이것이 어떤 논리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허겸 장로와 눈을 마주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지독한 살수(殺手)의 논리가 되겠소.”
허겸 장로가 말했다.
“맞습니다. 용명은 제가 마지막으로 가르친 살수입니다. 죽이고자 하는 대상에게 접근하여 온 생애를 바치다가, 가장 확실한 순간에만 임무를 떠올릴 사내입니다. 이는 절대로 죽이기 어려운 대상을 암살해야 할 때 쓰는 방식입니다. 교주를 염두에 두고 가르친 제자인 셈이지요. 아직 교주와 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허겸 장로의 손을 만져봤다. 내공은 잃었으나 손가락 마디마다 두껍게 붙어 있는 굳은살은 그대로였다.
“노인장이 사류곡을 쳤던 일 교관이셨소?”
“그때 칠 교관을 잡아내지 못한 게 종종 생각나긴 했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등장할 줄은 몰랐습니다. 문주도 조심하십시오. 제가 용명을 키워냈듯이 당시 칠 교관도 누군가를 가르쳤다는 뜻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먼 하늘을 바라봤다.
“사방에 적이 많소. 살수들 때문에 잠자리가 내내 불편했는데 이것은 어찌 극복해야겠소. 나는 근래 밥을 먹다가도 꾸벅꾸벅 조는 지경이라…….”
노인장이 생각에 잠겼다가 대꾸했다.
“방법이 없습니다. 살수들도 졸음을 참는 게 가장 힘듭니다. 사나흘 참는 것은 버틸 만하나, 십여 일 이상 버티는 것은 일류 살수도 힘겨운 일이지요. 쪽잠이라도 주무시는 문주가 살수보다 더 편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한 채로 인내를 겨룰 수밖에요. 수하들도 잘 활용하십시오. 가장 좋은 건 살수가 지켜드리는 것인데 그 또한 사람의 마음이 의심으로 뒤덮이면 편치 않으실 겁니다.”
나는 노인장의 대답에 질려서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남는 게 쉽지 않소.”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또한 삶의 기쁨입니다.”
“맞소. 그것이 상남자의 삶이지.”
내가 평상에서 일어나자, 허 장로가 나를 올려다봤다.
“문주님, 이 늙은이 죽기 전에 한 번 더 보러 오십시오.”
나는 허 장로가 내미는 쭈글쭈글한 손을 붙잡았다.
“우리 늙은 상남자 선배, 오래 살아남아 계시오. 내가 또 보러 올 테니.”
허 장로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씨익 웃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상남자들이라서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가 그대로 작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