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ad Demon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백발의 상남자
“어서 오십시오.”
차를 마실 때 등장한 노인장을 향해 혈야궁주가 존댓말을 했다. 일행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대청 입구에서 웬 노인장이 청년의 부축을 받아서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장이 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크게 뜬 채로 검마를 주시했다.
“오… 정말 좌사께서 방문하셨구려.”
검마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노인장에게 다가갔다.
“총사(總使)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인장이 부축하고 있는 청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용명(龍明)아, 고맙구나. 잠시 대기하여라.”
“예.”
나도 눈을 크게 뜬 채로 노인장과 검마를 바라봤다. 검마가 노인장을 자연스럽게 부축하더니 차를 마시고 있는 탁자로 안내했다.
가까이서 보니 백 세는 훌쩍 넘은 것처럼 보이는 노인장이었다.
혈야궁주가 직접 차를 따른 다음에 원형 탁자를 돌렸다.
“드시지요. 장로님.”
노인장이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궁주님. 오랜만에 손님들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봤습니다. 죽기 전에 좌사 얼굴을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갑고 좋습니다.”
노인장이 옆에 있는 검마의 등을 손주 대하듯이 쓰다듬었다. 검마가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어르신, 저는 교주와 다툰 후에 교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좌사가 아닙니다.”
“아, 그래요? 그것까진 몰랐습니다.”
노인장이 탁자에 둘러앉은 자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교주 곁에 직언하는 사람이 줄고 있으니 정말 걱정입니다. 젊은 일행은 누구입니까?”
노인장의 말에 교영이 소개했다.
“이쪽은 풍운몽가의 몽연 공자, 여기는 하오문의 문주 이자하라는 분이고 검마 아저씨의 일행입니다.”
노인장이 나와 색마 놈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소개했다.
“몽 공자, 이 문주. 이 늙은이는 허겸(許謙)이라 합니다.”
나이가 워낙 많은 상대여서 색마와 나도 정중하게 대꾸했다.
“어르신, 몽연이라 합니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장로님, 이자하라 합니다.”
궁주에게도 존댓말을 듣고 검마 선배까지 벌떡 일어날 정도면 대장로 대접을 받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허겸 장로가 혈야궁주에게 물었다.
“궁주님,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이 늙은이가 방해한 것은 아니겠지요? 사실 좌사가 방문했다기에 대화에 끼고 싶어서 일부러 왔습니다.”
혈야궁주가 나를 가리켰다.
“여기 하오문주가 사류곡이라는 살수 단체를 치려고 하는데, 본 궁에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장로께서는 사류곡을 아십니까?”
허겸 장로가 넓은 소매에서 낡은 수첩을 불쑥 꺼냈다.
“사류곡이라, 잠시만요.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기록보다 정확하진 않으니 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전부 허겸 장로의 손에 들린 낡은 수첩을 바라봤다.
낡아서 헤진 표지를 열자, 자그마한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몇 장을 휘적휘적 넘기던 허겸 장로가 한 부분을 읽었다.
“살수 부분에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네요. 사류곡은 늘 안개가 자욱하다. 배교자 칠(七) 교관과 그의 제자들이 숨어들어서 살수 활동을 했으나 진법을 익힌 자도 섞여 있어 잔당을 뿌리 뽑기 어려웠다. 교의 중진도 많이 죽었고, 진압하러 보낸 자들도 다수 당했다. 후에 교에서 파견한 일(一) 교관에게 진압되어 잔당의 목을 베고 거처를 불태워서 정리했다. 하지만 칠 교관의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들이 다시 자리를 잡은 모양이지요?”
나는 허겸 장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자세히는 모릅니다. 자꾸 제게 살수를 보내어서 추적 중에 알아낸 곳입니다.”
허겸 장로가 나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젊으신데 벌써 살수들에게 시달리시다니. 문주의 활동이 아주 활발했던 모양입니다.”
나는 허 장로에게 기이한 느낌을 받으면서 대꾸했다.
“이곳저곳과 싸우다가 그리되었습니다.”
힘겹게 걷는 것을 보아하니, 분명 무공을 잃은 노인장이다.
그런데도 딱히 약해 보이는 느낌도 없고, 충분히 예의를 갖출만한 상대처럼 보이는 게 신기했다.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 형성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때, 천하를 오시할 정도로 강했기 때문에 배어 있는 분위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자가 왜 이렇게 쇠약해졌는지는 당장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혈야궁주도 충분히 예의를 갖추고 있었고, 검마도 벌떡 일어나서 부축했으니 눈앞에 있는 허 장로는 교에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교영이 물었다.
“어르신, 칠 교관이란 게 무엇입니까?”
허겸 장로가 대꾸했다.
“아, 그냥 제 표현입니다. 제가 정리한 것은 주로 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칠 교관이라 하면 교에서 살수들을 키워내던 일곱 번째 교관이라는 단순한 뜻입니다. 살수 조직의 칠 조장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교의 세가 대단했던 시절에는 정말 인재들이 많았습니다. 후계 다툼 때문에 세가 약해지면서 교관들이 나가서 세운 살수 단체가 있었지요. 살수를 키워낸 교관들은 교에서 가장 안 좋은 부분을 익히고 배운 자들입니다. 궁주께서도 여기 하오문주와 함께 사류곡의 살수를 정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혈야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로님.”
이쯤 되면 누가 궁주인지 모를 지경의 문답이었다.
나는 허겸 장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쨌든 마교에서도 나름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의 전대 인물에 대해서는 당연히 아는 게 없었으나 분위기나 정황상 그러했다.
마도에서 백 살이 넘도록 살아남은 사람이라면.
이 사내가 두 눈으로 봤던 싸움, 배신, 죽음, 탄생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나이만 따지고 보면 신선(神仙) 같은 사내라서 나도 신기한 마음을 지닌 채로 차를 홀짝였다.
허겸 장로는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문득 색마 놈에게 이렇게 말했다.
“몽 공자.”
“예.”
“손을 좀 줘볼 수 있을까요. 내공을 살피고 싶은데.”
색마 놈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검마의 표정을 확인한 다음에 손을 내밀었다. 허겸 장로가 진맥하는 의원처럼 색마 놈의 손목을 붙잡더니 미소를 지었다.
“아, 혹시 옥화궁의 생존자…….”
색마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 예. 그렇습니다. 어머니 쪽이.”
허겸 장로가 색마의 손을 쓰다듬었다.
“정말 잘 장성하셨습니다. 옥화궁의 맥이 끊이지 않았다는 소식은 알고 있으나 직접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훌륭한 무공의 맥도 끊기지 않았다는 게 기쁘군요. 몽 공자.”
“예.”
“수련하시느라 고생이 참 많았겠어요.”
“아, 아닙니다. 스승님을 만나 지도를 잘 받고 있습니다.”
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 제 제자입니다.”
허겸 장로가 웃으면서 검마를 바라봤다.
“좌사께서 제자를 받다니 놀랍습니다. 옥화궁의 빙공도 끝을 보면 대단한 무학이니 광명검은 전수하지 마십시오.”
검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입니다.”
문득 나는 자세를 바로 해서 앉았다.
이 노인장, 평범한 사내가 아니다.
백전노장이 은퇴해서 반백 년 정도 더 살아남으면 눈앞의 노인장이 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불길하게도 이번에는 허겸 장로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허겸 장로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아…… 그러지 맙시다.’
허겸 장로가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문주께서 기분이 불쾌하실 수 있으나 이 늙은이가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몽 공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공을 한 번 살필 수 있을까요?”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착잡한 어조로 대꾸했다.
“예, 그럼. 가르침을 주시지요.”
허겸 장로가 내 팔목에 손가락을 가볍게 올려놓았다가 오래지 않아 손을 거뒀다.
문득 안색이 돌변한 허겸 장로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 * *
교영이 일어나서 물을 가져왔다.
“어르신, 물 좀 드셔요.”
분위기가 싸늘해진 상태에서 혈야궁주, 검마, 색마가 아무 말을 하지 않는 허겸 장로와 나를 번갈아서 바라봤다.
허겸 장로가 물을 마시더니 그제야 표정을 좀 풀었다.
“문주님, 젊은 나이에 성취가 대단하십니다. 혹시 문주님도 좌사의 제자입니까?”
검마가 대신 대답했다.
“아닙니다.”
“죄송한 질문이나, 좌사께서 믿는 분입니까?”
검마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평소 행동이 다소 과격하고, 언행에도 예의가 없으나 품은 뜻에 대해서는 나이와 무관하게 높이 사고 있습니다. 허 장로님, 하오문주는 나쁜 사내가 아닙니다. 경계하지 마시고. 하실 말씀이 있으면 기탄없이 하시지요. 제가 함께 듣겠습니다.”
“그간의 행적을 간단히 알 수 있을까요?”
“주로 문주가 태어난 출신 지역의 흑도 세력을 많이 죽이고 흡수하여 정리한 것으로 압니다.”
“맹이나 교와는 아직 분쟁이 없었습니까?”
“예.”
허겸 장로가 그제야 나를 바라봤다.
“문주께서는 혹시 삼재의 제자십니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허겸 장로가 말했다.
“때로는 저도 아는 것이 많아서 당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일을 접했을 때 그렇지요. 올해 제 나이가 일백 년에 십일 년을 더해야 합니다. 문주님의 나이가 매우 젊은데 극양의 내공과 극음의 내공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으니 제가 당황할 수밖에 없지요. 실은 교주가 익히는 무공이 그러합니다. 교주가 몰래 키워낸 제자를 이곳에 보낸 게 아닐까 해서 제가 잠시 당황했습니다. 문주께서 홀로 익히신 것이라면 이 늙은이가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이해합니다.”
당연히 교주는 천옥을 취하려고 했으니 음과 양의 무공을 조화롭게 익혔을 것이다. 교에 오래 있었던 장로가 나를 살피다가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허겸 장로가 내게 물었다.
“제가 하오문이라는 단체는 들은 바가 없는데 문주께서 만드셨습니까?”
“예.”
“개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일하는 자들을 내버려 두라는 취지에서 만들었습니다.”
허겸 장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것참 제가 들었던 개파의 목적 중에서 가장 화끈한 대답이로군요.”
교영이 물었다.
“어르신, 어떤 점이 화끈한 것이죠?”
허겸 장로가 말했다.
“일하는 자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건 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개파의 목적이 평생 싸우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어요. 많은 문파의 흥망성쇠를 전해 들었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이로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허겸 장로가 내게 물었다.
“음과 양의 조합은 잘 이뤄지십니까?”
무공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마자,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홀로 익히느라 원활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입문 단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군요.”
문득 허겸 장로가 혈야궁주를 지그시 바라봤다.
“궁주님.”
“예.”
“사류곡을 치는 일. 궁주께서 하오문주를 좀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스럽군요.”
혈야궁주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할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예.”
이번에는 허겸 장로가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문주님.”
“예.”
“이 늙은이의 나이가 무척 많습니다. 언제가 됐든, 제가 귀천하면 문주께서는 혈야궁을 좀 도와주십시오.”
“예?”
나는 대답을 하자마자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했다. 미리 짜놓은 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검마, 교영, 혈야궁주까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혈야궁주가 말했다.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가 동네 무관도 아닌데.”
“예, 압니다.”
허겸 장로가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제가 죽으면 교주가 궁에 찾아올 겁니다. 그때 도와달라는 얘깁니다.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그럴 겁니다. 교주가 저를 무서워할 리 있겠습니까. 제가 옛 시절에 젊은 교주를 구해준 적이 있어서 못 본 척 가만히 있는 것이겠지요. 그때는 교주도 아니었습니다. 교주는 남을 챙겨주거나 사정을 봐주는 사내가 아니지만, 목숨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은원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제가 그간 궁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고요.”
갑자기 허겸 장로가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주시했다.
“본 궁은 교에서 나왔으나, 독립한 이후 무공을 익히지 않은 약자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문주는 약자를 돕는 사내이니 추후 본 궁을 너른 마음으로 도와주십시오. 마도 출신이라 하여 다 같은 마귀(魔鬼)들은 아닙니다.”
나는 내공을 잃었다는 사내의 눈빛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너무 해괴한 요청이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도와줄 일이 있으면…….”
허겸이 내 말을 끊었다.
“문주님.”
“예.”
“누군가가 손을 뻗어주어야 가끔이라도 마도에서 벗어나는 자들이 생깁니다.”
일백 하고 열한 살이나 더 처먹은 노인장이 떼를 쓰니까 나도 어리둥절했다.
“어르신, 궁금한 것이…….”
“물어보십시오.”
나는 허겸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무공은 어쩌다 잃으셨습니까.”
허겸이 대꾸했다.
“이 늙은이도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면서 오만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널리 알려진 사내의 행보를 방해했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그자는 나중에 삼재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검마와 혈야궁주의 표정을 확인했다.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제야 궁주와 검마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노인장은 존경을 받을 만한 사내다.
삼재와 겨뤄서 살아남은 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기 드문 백발의 상남자(上男子)가 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 감탄한 모양인지 평소의 내 말투대로 주둥아리를 열었다.
“와아… 노인장, 상남자셨소.”
“…….”
분위기가 싸해졌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